라떼는 말이야, 첫 제품 빠르게 개발하느라고 매일없이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이거야…라고 말할 만한 경험은 없다. 그래도 막 일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꽤 바쁘게 살았구나 싶다. 연구실 동료 대여섯이 모여 어떻게든 회사가 굴러가게끔 고군분투하던 때였다. 최대한 빨리 제품을 출시하고는 싶은데 여느 초기 스타트업처럼 인력은 부족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같이 일하던 프리랜서 개발자의 사정 때문에 정말로 주말 중 하루는 꼬박꼬박 출근해야 했다. 놀랍게도 주말에 사무실에 나와보면 동료 한둘은 꼭 그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는 근무 제도도 제법 엄격했다. 아침 9시 반까지 출근하고 하루 8시간 근무해야 했다. 스타트업 치고는 근무 제도가 조금 ‘빡센’ 편이었지만 출퇴근 시간을 철저히 기록한다거나 근태로 인사 평가를 하는 게 아니었기에 우리끼리 최소한의 규율을 지키면서 일하자는 약속에 가까웠다. 다들 연구실에 있을 때만 해도 슬렁슬렁 일하는 것 같더니 회사 사무실에서는 상당히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나 또한 이 규칙 속에 녹아들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9시 반 출근은 조금 벅찼다. 사무실은 캠퍼스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고 내 통근 시간은 버스 배차 간격에 따라 1시간과 1시간 15분 사이를 오갔다. 환승해야 하는 버스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마다 허탈함에 고개를 떨구곤 했다.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도저히 못하겠어서 포기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나로서도 첫 정규직 생활이었기에 회사 생활에 찌들지 않아 생생한 에너지를 내뿜을 수 있었다. 법정 근로 시간이 52시간인 시대, 정확히 측정한 적은 없지만 아마 주 52시간 넘게 일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기준에 적당히 알맞은 의욕과 열정이 있었고 이를 적당한 과로로 다스렸다. 뭐 아무튼 이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초창기에 비해 회사 규모도 상당히 커졌고 그에 맞추어 다양한 사내 제도가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 특히 근무 제도에는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일단 출근 시간이 오전 11시까지로 늦춰졌다. 시차 출퇴근 제도가 채택되어 필수 근무 시간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를 제외하면 자유롭게 출퇴근하면서 주 40시간만 근무하면 된다. 자리 비움 제도를 활용하면 업무 시간 중에도 하루 최대 2시간까지 개인 용무를 볼 수 있으며, 반반차 제도까지 생겨서 2시간씩 쪼개 휴가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장기 근속자에게는 리프레시 휴가가 주어지기도 한다.
어느새 이렇게 다니기 편한 회사가 되었다. 한번은 채용 공고를 작성할 일이 있어 참고 삼아 다른 회사의 공고들을 여럿 살펴본 적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비슷한 규모의 회사에서 우리만큼 괜찮은 근무 제도를 갖춘 곳이 없었다. 내가 알던 그 열정 넘치는 ‘젊꼰’들이 모인 회사가 맞나 싶다.
근무 제도가 유연하게 마련되어 있어도 막상 그 제도를 누릴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회사가 더러 있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일하고 휴식하겠다는 분위기가 전사적으로 잘 만들어졌고 당연하게도 누가 언제 휴가를 쓰고 자리 비움을 하든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와인바를 열기로 결심한 뒤 내 지상 목표는 ‘워워밸’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미 회사에서는 내게 기대하는 역할이 공고했고 그 기대는 월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가게를 열었다고 해서 회사 일을 소홀히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동시에 가게에서는 아내를 충실히 서포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두 마리 토끼에게 각각 100% 힘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역시 일등 공신은 우리 회사의 제도와 분위기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우리 가게는 공식 영업 마감 시간이 밤 11시지만 경우에 따라 연장 영업을 묵인하기도 한다. 우리 부부가 손님들과 대화를 하다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때도 종종 있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자려고 하면 새벽 1시를 넘기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별로 부담이 없는 이유는 여차하면 느직이 11시까지 출근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1시까지 출근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10시 반 정도까지만 나가도 충분히 피로를 회복하고 아침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다. 만약 출근 시간이 아침 8시나 9시로 정해진 회사였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게다가 시차 출퇴근 제도와 반반차 제도가 도입되면서 시간과 체력을 관리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 오랜 시간 근무하고 아닌 날에는 근무 시간을 줄여서 체력을 안배할 수 있다. 만약 가게 오픈 시간부터 예약이 몰리는 날이 있다면 빠르게 사무실을 나서 가게로 향한다. 그래도 힘에 부칠 때에는 휴가를 쓰면 된다. 반반차를 쓰면 연차 사용의 부담은 덜하면서 정신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꽤 충전이 된다.
이렇게 보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가게를 오픈해야 하는 자영업자가 직장인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동료들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출근하고 휴가를 쓰는데 가게 영업에 관해서라면 우리 가게를 지켜보는 모든 잠재적 손님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자영업의 굴레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운 법이다.
손님에게 풀타임 직장인이 본업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대개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 내 사정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도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며 혀를 내두른다. 정작 나는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 있다.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히 운이 좋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회사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미 말했듯 지금의 자율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진 건 모두의 덕분이다. 여기에 더해 적극적으로 근무 제도 개선을 제안했을 이름 모를 동료들,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직접 아이디어를 전개하면서 체계를 만들어간 운영 파트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제도를 최종적으로 승인한 경영진까지 다 빚을 진 기분이다. 태생이 ‘쫄보’라 그저 조용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누구보다 더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보다 업무 강도가 높아지고 휴식 시간이 줄어드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최근에 퇴근 후 예상치 못한 긴급 이슈가 터진 적이 있었다. 그날은 회사 퇴근 후 가게에 나갔다가 연락을 받고 다시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원격 근무를 했다. 내가 짰던 코드에서 문제가 터졌고 고객사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고쳐달라고 하니 별도리가 없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코드를 붙잡고 있었더니 다행히 해법이 보이긴 했다. 조금 더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실험을 반복했고, 그와 동시에 고객사를 담당하는 동료와 소통하며 요청이 있을 때마다 신속하게 대응했다. 밤 9시쯤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여 개운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나 같은 ‘주 40시간 지킴이’가 12시간 가까이 사무실을 지킨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나서 주말에 가게 1주년 파티로 낮부터 정신없이 일을 했더니 저녁쯤에는 입술 한 구석에 포진이 올라온 게 느껴졌다. 딱히 엄청나게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건방 떨지 말라고 몸이 신호를 보낸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탈이 안 날 정도로만 딱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나 보다. 앞으로도 겸손한 마음으로 균형의 수호자가 되어 워워밸을 소중히 여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