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백그라운드가 없는 사람도 손쉽게 개발자의 알아볼 방법이 있다고 한다. 아래 기준에 따라 점수를 가감하면 된다.
신체 거북목 +1 삐쩍 곯았음 +2 풍채 좋음 +2
시계 기어핏, 미핏, 애플워치 +1 알록달록 디즈니 +1 정상적 시계 브랜드 -1
옷 스타일리쉬 감각 -3 대충 챙겨 입음 +1 티셔츠에 혀, 꼬인 뱀, 펭귄, 눈깔 +3
노트북 씽크패드, 델, 맥북 프로 +1 이상한 스티커 덕지덕지(1개당 +0.1)
점수가 5점을 넘으면 ‘개고수’, 3점만 넘어도 최소 중수 이상이다. 이 채점표를 만든 사람에 따르면 본인의 경험에 미루어보아 꽤 신뢰도가 높은 지표라고…. 농담인 걸 알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웃픈’ 농담이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은 개발자의 외양과 패션 감각이 이 정도라고 인식하고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개발자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사회성이 부족하고, 그들만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유머 코드를 가졌고, 한번 코딩에 몰입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밤을 새울 것만 같은 이미지까지 박혀 있다. 단어 하나로 요약하자면 너드nerd나 긱geek이라 할 수 있겠다. 10년도 더 전에 영국 시트콤 <IT 크라우드The IT Crowd>를 깔깔대며 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래의 나를 보며 웃는 셈이었다.
개발자 일을 시작한 이래로 뛰어난 개발 실력을 갖추어야겠다는 다짐이 최우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편견과 거리가 먼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개고수 개발자처럼 보이기는 싫었다는 말이다. 개발자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며 누군가와 협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제로 회사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혼자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시간 못지않게 다른 구성원과 의견을 주고받고 회의를 하는 시간이 많다. 업무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 모두 한 팀이 되어 시너지를 낼 때 좋은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갈 수 있게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노력이 필요하다.
편견에서 멀어지기 위한 내 노력은 나름대로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회사 동료들이 위의 채점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면 높은 점수는 나오지 않을 거라 믿는다(제발).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조직을 위하겠다는 숭고한 동기만으로 움직인 적은 없다. 난 그저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을 뿐이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길을 걷는다는 자각 자체가 내게는 커다란 원동력이다. 공교롭게도 자의로 탐색하든 타의로 결정되든 정말 남다른 경로를 잘 골라서 움직여 왔다.
군 시절 내 보직은 연대장님을 모시는 운전병이었다. 개인 시간을 갖기도 좋고 연대장님 옆에서 콩고물도 좀 얻을 수 있는 자리이자, 항상 대기 상태를 유지하며 실수가 없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나를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불쌍히 여겼지만 이런 장단점을 다 떠나서 연대 내에 단 하나뿐인 보직이라는 것만으로 이 역할을 기쁘게 맡을 수 있었다.
대학원 휴학을 결정하면서는 이래도 되나 싶어 걱정이 되면서도 내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이 덜했다. 펍에서 일하고 경험을 쌓기로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는 여러 차례 보직을 바꿨다. 처음에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맡았고 그 뒤에 딥러닝 기술 연구를 맡았다가 이내 딥러닝 기술을 제품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회사의 인력 사정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움직였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 회사의 핵심 코드를 모두 만져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어차피 스타트업이란 고질적으로 인력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일당백으로 업무를 맡아 줄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회사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맡을 만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궂은일을 내가 해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이런 내게 개발자 생활과 와인바 영업을 병행한다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와인바를 운영하는 개발자로, 가게에서는 개발자가 본업인 사장님(알바생에 가깝지만)으로 비칠 수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발자국이 거의 없이 깨끗한 길을 새로 개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내가 와인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흔쾌히 같이 하겠다고 말한 데에는 내 내면에 존재하는 바보 같은 욕구의 지분이 컸다.
이 욕구는 개인 차원에서 가게 차원으로 이어졌다. 나와 아내 모두 우리 가게가 서울의 여느 와인바와는 다른 곳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와인을 반드시 병 단위로 주문해야 하고, 이용 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되어 있고, 파스타나 문어 요리는 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고…. 수익성을 따지면 모두 이해가 되긴 하지만 우리가 이런 천편일률을 답습해서는 우리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지루하게 느껴질 터였다.
사워도우를 메인으로 하는 콘셉트는 우리의 바람을 이루기에 딱 알맞았다. 캉파뉴, 바게트, 치아바타 세 종의 빵을 와인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여느 베이커리처럼 빵을 아침에 굽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아주 매력적이었다. 갓 구운 빵을 퇴근길에 즐길 수 있는 곳은 분명 드물 것이다. 빵 외에 치즈와 과일 위주로 가볍게 메뉴를 구성하고 와인을 잔으로도 판매하여 최대한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왠지 ‘각 잡고’ 와인을 마셔야 할 듯한 가게는 벌써 널릴 대로 널렸으니까.
고객 편의성과 브랜딩 측면에서도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와인들의 사진과 생산자, 포도 품종 및 기타 특징들을 노션으로 정리해서 공개했고 매달 짧은 이야기와 플레이리스트를 ‘월간 없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배포하고 있다. 와인 페이지와 월간 없음악 모두 가게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은 링크를 통해 들어가 볼 수 있다.
월간 없음악이야 반쯤 재미 삼아 만들고 있지만 와인 페이지는 소비자의 편의를 우선하여 기획하고 제작했다. 가게에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우리가 어떤 와인 리스트를 갖추고 있는지 소비자가 알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게 메뉴판의 QR 코드를 찍으면 와인 페이지로 이동하도록 해 놓아서 방문객들도 쉽게 와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 와인바가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하면 이 작업이 내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내게는 우리 가게의 모든 ‘독자성’이 너무나 확실한 욕구 충족의 길이었다.
쓰고 나니 너무 건방 떤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평범하고 얼마나 남다른지는 결국 상대적인 개념인지라 누군가에겐 나도 ‘평범한 사람 1’에 불과할 테다. 가게를 찾아 주는 손님들 중에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영업을 하면 할수록 더 겸손해진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평범하게만 살아왔다고 하기에는 그간 내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다른 길에 매력을 느끼는 건 어떻게 보면 별 쓸모없는 허영심이자 반골 기질인데 시원시원하게 버리기가 어렵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내 인생도 몇 풀 더 꺾이고 나서야 비로소 무난한 길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게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예사로운 와인바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다. 이건 솔직히 좀 뼈아프다. 우리의 독자성이 대중에게 어필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겠으나 흔하디 흔한 곳으로 인식되고 싶지는 않다. 어딘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존재해서 우리 가게만의 매력을 좋아해 준다면, 우리 가게를 찾는 게 남들과 다른 취향을 뽐내는 방법이라 생각해 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