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평가의 공포
그럭저럭 평범하게 회사생활을 해 나가던 첫 해, 제가 각성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느 늦여름 회식 자리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다들 취기가 올랐습니다. 삼삼오오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눌 때였습니다. 저희 조직 담당 임원이신 상무님께서 저를 가까이 부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직에 책임급 이상이 30명이야. 너는 그 중에 몇 등이나 될 것 같니?”
상무님의 질문 의도는 뚜렷했습니다. 경력 입사 첫 해였던 저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나 뚜렷한 업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물쭈물하고 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무님께서는 한 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퍼포먼스가 있어야 해, 퍼포먼스가.”
그러면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시더니, 옆 자리 부장님과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가셨습니다.
상무님의 의중은 명확했습니다. “너는 내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 이대로라면 너는 연말 평가에서 하위 등급을 받을 거야.” 라는 시그널을 명확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분명 격려와 조언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저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직장생활 하다 보면, 연말에 하위등급을 주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미리 언질을 준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여러 번의 회식을 가졌지만,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는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하나도 즐겁지 않은 회식이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즐거웠는데 기분이 상했지요.
저는 카이스트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책임급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직장 생활 초년생이었습니다. 2월에 입사해서 3~4개월간은 대졸사원들과 함께 직무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회식 날은,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였습니다.
다른 입사 동기들이 그랬듯, 지도선배에게 하나씩 업무를 배우면서 익혀 나가고 있을 시기에 그런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었지요. 지도선배나 팀장님께 그런 말을 들어도 언짢을 텐데, 최종 평가권을 쥐고 계신 담당 임원께 그런 말을 들었으니 더더욱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직 뭔가 제대로 일해 볼 시간도 없었는데, 입사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에게 무슨 성과를 요구하시는 것이었을까요? 함께 일하는 선배사원에게, 그리고 팀장님께 답답한 마음에 술기운을 빌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대체 성과라는 게 무엇인지 말이죠.
“고객 부서나 동료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내는 게 성과야.”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죠.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당시에는 너무 막연하고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다 할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고민과 함께 그 해 여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 내가 C를 받게 되겠구나. 그리고, 무언가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인사평가 제도는 참 냉정합니다. 모두가 열심히 했지만, 평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서열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죠.
연말에 구성원의 기여도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서 등급을 매긴 뒤, 다음 해 연봉 인상에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당시 제가 속해 있던 회사에서는, 소속된 조직 인원의 최소 10%는 반드시 하위 등급을 부여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긴장감을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성과를 내서 기여하라는 취지였겠지요.
하지만 업무에 따라서는, 성과를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판매 실적이나 계약 건수 등과 같이 정량적으로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업무라면 모르겠지만, 연구개발 조직은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맡은 일의 종류가 다르고, 난이도가 다르고, 협업 관계로 서로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구의 일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거기서 저성과자 10%를 골라 내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지요. 조직변동이 있지 않는 이상 모두가 계속 보고 일해야 하는 관계잖아요? 특별히 문제되는 행동을 해서 팀장이나 임원에게 찍히지 않는 이상, 낮은 등급의 평가는 주는 사람도 미안하고, 받는 사람도 기분 나쁜 일이지요.
당시 저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가설을 세워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하위등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열심히 고생 많이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만약 신입사원이 들어오게 되면, 당연히 업무를 배우는 중이어서 조직에 기여한 바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경우에 팀장 입장에서는, “미안하다, 누군가는 꼭 받아야 하는데, 아직 신입이니까 기회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 줘.”라고 위로하면서 낮은 평가를 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기업에 따라서 대졸신입사원들은 첫 해에 인사평가를 유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신입사원에게는 하위등급을 주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유예조항이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입사원의 탈을 쓴 경력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온 책임1년차들은, 첫 해부터 바로 인사평가 대상이었지요. 당연히 평가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높은 평가등급은 더더욱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입사 1년차 제 개인적으로 세운 목표는, “절대로 하위등급을 받지 말아야겠다.”였습니다. 고등급 평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요. 당시에 그건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름대로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무님께서 “여기서 네 등수가 얼마일 것 같아?” 라는 격려 말씀(?)를 해 주셨으니, 심적인 충격이 저는 꽤 컸지요. “아, 올해 내가 하위등급 대상자에 오른 모양이다.”
어느 정도 회사에 익숙해진 중견 사원들은, 인사평가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야, 뭘 고과에 신경써, 고과는 일하다 보면 따라 오는 거야.”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해 주셨죠. 사실 인사고과 조금 깎인다고 당장 해고되거나, 월급이 눈에 띄게 깎이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저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중간은 가야지 하위등급이라니,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지요. 100명 중에 90등 아래라는 이야기니까요. 심리적인 충격이 꽤 클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