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요일에 연차를 씁니다
"개인 사정으로 연차를 사용합니다. 바쁠 때 본의 아니게 휴가를 사용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녀와서 업무에 더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요, 제가 담당한 파트에 소속된 입사 3년차 어떤 후배가 연차휴가를 사용하면서 팀내에 쓴 메일 내용이었어요.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휴가인가보다 하고 지웠을 메일인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휴가를 쓴다는 것이 좀 부담이 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연차휴가를 낼 때 약간의 죄책감, 또는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나만 휴가를 쓰면 다른 동료들에게 업무부담이 가중될까봐, 또는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질까 봐, 인사평가철일 때는 안좋은 인상을 줄까 봐,... 참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입사 첫 해 만난 팀장님은 업무 실력으로나 인품으로나 최고였습니다. 연차휴가는 문자로든 전화로든 통보만 해도 되게끔 팀을 운영하셨어요. 다만 말도 없이 "노 쇼" 하는 거는 협업하는 사람들끼리 좀 아닌거 같으니, "오늘 연차 씁니다" 하고 문자 한 통 남기면 충분하다고..
이듬해 조직 변경 하고 나서 만난 팀장님은, 휴가 쓰겠다고 말씀드리면 굉장히 심사숙고 하시는 게 티가 나더라구요. 휴가 쓰기가 참 부담스러웠죠. 대 놓고 못 쉬게 하시는 건 아닌데, 심적인 부담을 굉장히 많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해에 말에 연차휴가 안 못 쓴 거 돈으로 받으니 몇백 되더군요.
저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통 "원드라이브"라는 클라우드에 저장합니다. 원드라이브에서는 몇 년 전 이맘때 사진을 모아서 리마인드 앨범 형식으로 보여 주는 기능이 있어요. 2년 전, 3년 전, 5년 전 이 날짜에 찍은 사진... 아이들이 완전 아기 때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문득 아이들 커 가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지금 큰딸은 초딩2학년, 작은 딸은 여섯살인데 나중에는 이 시절도 그리워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연말에 휴가 많이 남겨서 돈으로 받는 것도 꽤 쏠쏠하긴 하죠.. 근데 나이가 조금씩 들고 가정을 이루고 나니, 쉼의 가치라는 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삼사 년 전부터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네요. 경쟁도 업무도 성과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을 밀도있게 보내는 것이 훨씬 더 큰 가치로 다가오더라구요.
그 때부터는 연차휴가를 가급적 남기지 않고 다 쓰는 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휴가를 몰아서 장기로 쓰는 것보다는, 짧게라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제 스타일에는 더 맞는 것 같더라구요. 1~2주에 반나절 정도씩,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반차를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1년에 22개 정도의 휴가를 쓸 수 있으니, 40번 이상의 반차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수요일쯤 쉬어 주니까 훨씬 한 주가 짧고 금방 지나가게 되더군요. 주중의 휴식을 통해서 아내와 함께 서점 구경도 하고, 아이들과 햇볕도 쬐고, 드라이브도 하니까 리프레시도 되고 너무 좋았습니다.
2주에 한번씩 주중에 반차 내는 것만으로도, 일하는 내내 에너지 수준이 확실히 높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의욕도 생기고 기분도 좋아졌지요. 우울증 증세도 호전되었고요. 이전 같았으면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고 멘탈이 깨질 법한 상황도 조금 위트있게 넘길 수 있게 되더군요.
수요일에 연차를 쓰겠다고 미리 계획을 해 놓으면, 월요일 화요일이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더라고요. 이틀 후에 쉴 거니까 말이죠. 목요일 금요일도 마찬가지지요. 일주일이 짧으니 업무 강도를 견디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저는 힘들기 전에 쉽니다. 힘들고 나서 쉬면, 그걸 회복하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더라고요. 20~30대 때는 많이 느끼지 못했는데, 30대 후반이 되니까 힘들고 나서 쉬는 것보다는 힘들기 전에 쉬는 게 에너지 효율, 업무 효율, 감정관리, 멘탈의 견고성 측면에서 훨씬 더 유리했습니다.
죄송한 연차메일을 쓴 후배에게 메신저를 보냈습니다. "S선임, 휴가 가는 거는 죄송한 게 아니에요. 회사 일 다 잊어버리고 쉬다 오세요." 완전히 부담을 털어버릴 성격의 친구가 아닌 건 알지만, 파트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들기 전에 쉬라고 권하곤 합니다.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앞으로 얼마나 먼 미래에 주4일제가 실제 논의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쉬는 날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수요일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