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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적 설계와 경로의존성

왜 VHS가 베타맥스를 이겼을까 – 지배적 설계의 힘

by 드라이트리

기술혁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초기에 다양한 경쟁 기술이 난립하는 시기가 존재합니다. 여러 기업이 서로 다른 규격과 설계를 내놓고, 소비자와 시장은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 탐색하는 과정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하나의 기술이 사실상의 ‘표준’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우리는 지배적 설계(Dominant Design)라고 부릅니다. 일단 시장에서 하나의 지배적 설계가 자리 잡고 나면, 그 이후의 혁신은 새로운 경쟁 기술의 등장보다는 기존 설계를 조금씩 개선하는 ‘점진적 혁신’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70~80년대의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전쟁, 즉 소니의 베타맥스(Betamax)와 JVC의 VHS(Video Home System) 경쟁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베타맥스가 더 선명한 화질과 작은 테이프 크기를 자랑했지만, 승리의 영광은 VHS가 차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녹화 시간의 차이가 결정적이었습니다. VHS는 2시간 이상의 영화를 한 번에 녹화할 수 있었던 반면, 베타맥스는 1시간이 한계였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화질보다도 한 편의 영화를 끊김 없이 녹화할 수 있다는 점이 더 큰 가치였습니다. 기술적 우위보다 사용자 경험의 적합성이 선택을 갈랐던 것입니다.


둘째, 제휴와 개방 전략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소니는 자사 규격을 독점적으로 유지하며 폐쇄적 전략을 택했지만, JVC는 VHS 규격을 개방하고 여러 제조업체와 손잡았습니다. 파나소닉, 히타치, 샤프 등 수많은 기업이 VHS 진영에 합류하면서 규모의 경제와 가격 경쟁력이 빠르게 확보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다양한 제조사의 기기와 테이프를 저렴하게 선택할 수 있었고, 이는 곧 VHS 생태계의 압도적인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의 힘이 작동했습니다. 시장에서 한번 표준이 자리 잡으면 이후의 선택은 그 경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비디오 대여점이 VHS 테이프를 대량 확보하면, 소비자는 VHS 기기를 사야 했습니다. 반대로 소비자가 VHS 기기를 사면 대여점은 VHS 타이틀을 더 확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네트워크 효과와 상호의존적 선택이 VHS의 우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결국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설계가 항상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비자의 사용 맥락에 맞는 기능, 생태계의 확장 전략, 그리고 표준이 고착화되며 강화되는 경로의존성이 결합될 때 비로소 지배적 설계가 형성됩니다. VHS와 베타맥스의 사례는 이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원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iOS와 안드로이드, 전기차 충전 규격의 CCS와 NACS, 클라우드 플랫폼의 AWS와 Azure 경쟁 등 수많은 기술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기술의 세부 성능이 주목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누가 더 큰 네트워크와 생태계를 만들어내는가가 승부를 좌우합니다.


따라서 기업이 기술 전략을 설계할 때, 단순히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 지배적 설계를 만들어낼 것인가, 경로의존성을 어떻게 활용해 시장을 잠글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VHS가 베타맥스를 이긴 이유는 바로 기술경영 이론이 설명하는 지배적 설계와 경로의존성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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