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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세상에서 혁신하는 힘 – 외부 지식을 내 것으로

협력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흡수역량입니다

by 드라이트리

기업의 혁신은 더 이상 내부 연구소만의 성과가 아닙니다. 대학의 기초연구, 스타트업의 도전적 기술, 파트너사의 현장 노하우, 표준화 커뮤니티의 집단지성이 서로 얽혀 새로운 가치를 만듭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훌륭한 아이디어를 들여온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과가 되지는 않습니다. 외부 지식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자기 것으로 재구성해 실제 사업에 적용하는 일련의 능력, 즉 흡수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역량이 부족하면 훌륭한 기술도 보고서 한 장에서 끝나고, 협력은 이벤트로 끝날 뿐 조직의 능력치로 축적되지 않습니다.


흡수역량은 네 단계로 이해하면 실용적입니다. 첫째, 인식입니다. 시장의 변곡점과 관련된 외부 지식을 빠르게 찾아내는 탐색 능력입니다. 논문, 특허, 컨퍼런스, 오픈소스 커뮤니티, 고객의 사용 데이터, 규제 초안 등에서 약한 신호를 잡아내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둘째, 동화입니다. 발견한 지식을 내부 언어로 번역해 조직의 기존 지식과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용어의 정의를 맞추고, 기존 아키텍처에 어디를 손봐야 할지 지도를 그리며, 영향 범위를 분해합니다. 셋째, 변형입니다. 외부 지식을 단순 도입이 아니라 재해석하고 조합해 새로운 설계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실험을 통해 우리 맥락에 맞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성능과 비용, 리스크를 균형 있게 최적화합니다. 넷째, 활용입니다. 제품과 프로세스, 비즈니스 모델에 실제 반영해 매출과 비용 절감 같은 결과로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이 단계에서 공급망, 영업, 서비스까지 변화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어떤 조직이 흡수역량을 잘 갖추는지는 선행조건을 보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관련 분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 쌓여 있는지, 기능 간 협업을 촉진하는 구조인지, 실험과 학습을 장려하는 문화인지, 기술정책과 지식재산을 다룰 수 있는 제도가 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은 경계인재입니다. 외부와 내부를 오가며 언어를 번역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게이트키퍼가 있어야 속도와 품질이 살아납니다. 또한 모듈화된 제품 구조와 표준화된 인터페이스는 외부 기술의 결합 비용을 낮추어 동화와 변형을 빠르게 만듭니다.


산업별 사례를 떠올려 보면 맥락이 선명해집니다. 제약에서는 대학이나 바이오 스타트업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후보물질을 확보한 뒤, 임상개발과 규제 대응, 글로벌 생산과 유통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후보물질을 가져오는 일보다 임상 설계와 제조공정 개발, 시장 접근전략을 결합하는 동화와 변형의 역량이 성패를 가릅니다. 반도체에서는 장비업체와의 공동개발, 설계자산 라이선스, 공정 레시피 학습이 복잡하게 얽힙니다. 공정 통합과 수율 개선의 루틴, 현장 데이터의 정합성 확보가 곧 흡수역량입니다.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오픈소스 도입이 일상화되어 있지만, 보안 검증과 라이선스 컴플라이언스, 내부 코딩 표준과의 정렬, 배포 자동화 체계가 없다면 기술 부채만 늘어납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외부 센서와 소프트웨어 스택을 끌어와 전자전기 아키텍처에 녹여야 하며, 필드 데이터로 성능을 학습시키는 운영 능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흡수역량은 개방형 혁신과 표리의 관계입니다. 외부와 협력하되, 무엇을 내부화하고 무엇을 파트너에 맡길지, 어느 지점에서 공동 IP를 설정할지, 지식의 이동 경로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중요합니다. 계약 이전 단계부터 지식재산과 보안, 데이터 사용권을 명확히 정리하고, 공동개발 과정의 산출물을 코드와 문서, 특허, 데이터셋 단위로 분해해 관리해야 합니다. 협업의 목적이 파일 교환이 아니라 학습 곡선의 공유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 지식이 조직에 남습니다.


프로세스 관점에서 실행 지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탐색 포트폴리오를 설계합니다. 중장기 로드맵에 따라 논문, 특허, 표준화 활동, 오픈소스, 스타트업 스카우팅을 정기적으로 훑고, 각 신호의 사업 연계 가능성을 정량화합니다. 다음으로 기술 온보딩 절차를 표준화합니다. 기술 평가 체크리스트와 파일럿 설계를 사전에 정의하고, 보안과 컴플라이언스 검토, 데이터 거버넌스, 테스트베드 접근 권한 같은 지원을 원스톱으로 제공합니다. 이후에는 변형의 실험 설계를 촘촘히 합니다. 최소기능제품 수준의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들고, 성능과 비용, 리스크에 대한 가설을 설정해 검증합니다. 마지막으로 활용 단계에서 확산을 설계합니다. 공급망, 제조, 영업, 애프터서비스까지 표준 운영절차를 업데이트하고, 교육과 KPI를 연동합니다. 이 흐름을 고정 의제로 삼아 정례적으로 점검하면 조직의 학습 속도가 올라갑니다.


조직 설계와 인사제도도 흡수역량을 좌우합니다. 기능 간 크로스팀을 상시화하고, 외부 협력 경험을 승진과 보상에 반영하며, 핵심 인력을 프로젝트 간 순환시켜 지식의 확산을 촉진합니다. 경영진 차원에서는 연간 예산과 별도로 기회 대응을 위한 옵션 예산을 확보해 신호가 포착되었을 때 즉시 파일럿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합니다. 기술 스카우팅, 기술사업화, 법무와 IP, 보안, 데이터 관리가 같은 테이블에서 움직이는 거버넌스를 마련하면 병목이 크게 줄어듭니다.


측정 없이는 개선이 없습니다. 흡수역량을 가늠하는 지표를 선행지표와 결과지표로 나누어 관리하는 것이 유용합니다. 선행지표로는 외부 기술 스캔 건수와 파일럿 착수 비율, 첫 프로토타입까지의 리드타임, 기능 간 프로젝트 참여율, 외부 파트너와의 공동 산출물 수, 오픈소스 기여와 재사용 비율, 표준화 회의 참여 정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과지표로는 외부 유래 기술이 반영된 제품의 매출 비중, 생산성 향상이나 원가 절감 효과, 품질 지표의 개선, 특허의 외부 인용 구조 변화, 인수 후 기술 통합 완료까지의 기간 등을 추적합니다. 지표는 조직의 주의를 특정 행동으로 끌어당기는 자석이므로, 우리 사업의 본질에 맞춘 최소 핵심지표를 정하고 일관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한 실패 요인도 분명합니다. 내부 발명 우월주의로 외부 아이디어를 과소평가하는 태도, 특정 파트너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신선한 아이디어가 들어오지 않는 과임베디드 현상, 파일럿만 많고 운영 전환이 더딘 전환 리치, 법무와 보안의 늦은 개입으로 생기는 계약과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인수합병 과정에서의 기술 부채와 인력 이탈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피하려면 초기에 성공 기준과 종료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고, 실패의 기록을 남겨 재시도를 빠르게 하며, 파트너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학습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정책과 생태계 차원에서도 흡수역량은 의미가 큽니다. 시험인증 인프라, 데이터 샌드박스, 기술이전 전담조직, 인력 재교육 프로그램은 기업의 동화와 변형을 가속하는 공공재입니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결과물의 이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코드, 데이터, 실험 프로토콜을 산업 표준에 맞춰 정리하고, 기업은 프로젝트 초기에 상호 기대치를 문서화해 협력의 마찰을 줄여야 합니다. 스타트업과의 협력에서는 PoC를 단기간에 설계하고, 공평한 IP와 수익 배분 원칙을 마련하는 것이 장기적 신뢰를 만듭니다.


결국 협력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지식이 우리 제품과 프로세스, 의사결정의 일부가 되는 순간에 비로소 혁신이 됩니다. 흡수역량은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의 근육입니다. 인식과 동화, 변형과 활용의 고리를 빠르게 돌릴수록 협력의 단위 성과가 조직의 체력으로 바뀝니다. 열린 세상에서 강한 기업은 아이디어를 많이 만나는 기업이 아니라, 만난 아이디어를 자기 피와 살로 만드는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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