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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C 이후, 한국 스타트업 투자 왜 멈추는가

출구 부 - 롱머니 부재, IPO 편중, M&A 빈약, 규제 리스크

by 드라이트리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시리즈 A와 B까지는 비교적 활발합니다. 정부 모태펀드와 중소형 벤처캐피털이 초기 성장 단계 자금을 공급하면서 어느 정도 선순환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리즈 C 이후, 즉 수천억 원 단위의 대규모 스케일업 자금이 필요한 단계에서는 투자가 급격히 줄어듭니다. 이는 단순히 돈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첫째, 가장 큰 문제는 롱머니(Long Money)의 부재입니다. 한국의 벤처펀드는 대부분 만기가 7~8년으로 짧아, 투자 후 비교적 빠른 회수 압박에 직면합니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장기적으로 기업을 지켜보기보다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크게 느낍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벤처펀드는 12년에서 길게는 15년 이상을 운용하면서, 스타트업이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스케일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합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국민연금, 보험사, 공제회와 같은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벤처투자에 매우 소극적입니다. 자산운용 포트폴리오에서 벤처 자산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도 못 미치며, 이로 인해 수천억 원에서 조 단위까지 투입할 수 있는 장기 자본 공급자가 사실상 부재한 상태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자금 구조는 짧은 만기와 작은 펀드 규모에 갇혀 있어, 스타트업이 시리즈 C 이후로 나아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대규모 성장 투자를 받기 어렵습니다.


둘째, Exit 메커니즘의 편중입니다. 한국 스타트업의 출구는 거의 IPO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스타트업 엑시트의 80% 이상이 M&A로 이루어지는 반면, 한국은 90% 이상이 IPO입니다. 이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가 제도적 규제와 문화적 인식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수합병이 총수 일가 승계 수단으로 해석되거나 공정거래법의 제약으로 제한되면서, 대기업은 스타트업 인수를 주저하게 됩니다. IPO 중심의 구조는 결국 출구가 지나치게 협소해지고, 투자자들이 후속 투자를 망설이는 원인이 됩니다.



<미국과의 비교>


한국의 현실은 IPO를 한다 해도 코스닥에 상장한 스타트업의 시가총액이 대체로 5천억 원 안팎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도 규모는 해외 시장 기준으로는 ‘미드캡’도 아닌, 여전히 중소기업 수준에 가깝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IPO가 엑싯이라고 해도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과 회수 규모가 제한적이니, 시리즈 C 이후 수천억 원 이상을 태우는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시리즈 C, D, E, F, G까지 이어지는 후속 라운드 펀딩 문화가 뿌리 깊습니다. 우버, 에어비앤비, 팔란티어, 스페이스X 같은 기업은 수차례의 대형 라운드를 거치면서 수십조 원 단위의 기업가치를 쌓아 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VC뿐 아니라 사모펀드(PE), 연기금, 소버린펀드 같은 장기 자금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덕분에 미국의 스타트업은 IPO 이전에도 이미 글로벌 유니콘, 데카콘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IPO는 기업가치를 더 키우는 “중간 관문”일 뿐 최종 출구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단순히 IPO와 M&A 비중의 차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은 IPO가 곧바로 Exit의 끝이 되고, 그마저도 시총 5천억 원 정도의 작은 규모에 묶이는 반면, 미국은 시리즈 C 이후 계속되는 투자 라운드와 다양한 출구 전략이 존재합니다. 이 차이가 누적되면서 한국에서는 후속 투자 자체가 위축되고, 기업가치 성장에도 한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글로벌 메가 Exit 사례의 부족입니다. 생태계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몇 개의 굵직한 성공 사례인데, 한국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미국에서는 OpenAI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딥마인드, GM의 크루즈 인수처럼 대규모 인수나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며 투자자들의 기대를 자극합니다. 중국 역시 바이트댄스, CATL, 앤트그룹 등 세계적 유니콘이 스케일업 성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쿠팡과 크래프톤 정도를 제외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대규모 성공 사례가 드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수천억 원을 넣어도 글로벌 성공 스토리로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불신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규제 리스크입니다. 퓨리오사AI의 메타 인수 무산 사례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글로벌 빅테크에 매각되는 것을 기술 유출로 간주해 사실상 봉쇄한 것입니다. 이는 한국 스타트업에게 가장 현실적인 출구였던 전략적 M&A의 길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 상승은 제한되고, 글로벌 자본은 한국 시장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과의 비교>


이스라엘은 작은 내수시장과 제한된 자원 때문에 태생적으로 글로벌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타트업이 성장하려면 미국과 같은 거대한 자본시장과 연결되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었고, 이는 실리콘밸리와 긴밀한 투자·M&A 네트워크로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엑싯은 대부분 글로벌 M&A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인텔이 170억 달러에 인수한 모빌아이, 구글이 11억 달러에 사들인 웨이즈, HP가 인수한 인디고 같은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VC들이 시리즈 C 이후 대규모 투자를 담당했고,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같은 글로벌 빅테크는 이스라엘에 R&D 센터를 설치하며 생태계와 밀착했습니다.


만약 한국이 이스라엘처럼 실리콘밸리와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지금처럼 시리즈 C 이후 자금 공백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해외 VC와 글로벌 성장펀드가 대규모 자금을 공급해줬을 것이고, 스타트업은 코스닥 IPO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양한 출구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글로벌 기업에 매각되는 성공 사례가 쌓였다면,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국내외 투자자들이 더 과감하게 후속 투자를 집행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빅테크들이 한국을 단순한 소비 시장이 아니라 R&D와 M&A의 거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단순한 자금 유입을 넘어 인재 순환과 기술 교류가 활발해져 생태계 자체가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은 다릅니다. 내수시장이 비교적 크고,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글로벌보다 국내 대기업과의 거래 관계에 의존하고, 규제 또한 글로벌 M&A를 제한합니다. 퓨리오사AI가 메타에 매각되지 못한 사례처럼 ‘기술 유출’ 우려가 앞서다 보니, 전략적 출구의 길이 원천적으로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식 활발한 글로벌 엑싯과 투자가 한국에서 구현되지 못한 이유는 시장 구조, 규제 환경,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만약 한국이 이스라엘처럼 실리콘밸리와 활발히 연결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시리즈 C 이후 공백은 훨씬 덜했을 것이고, 스타트업 생태계는 글로벌 자본과 사례를 축적하면서 더 빠른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스라엘 모델을 모방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은 대규모 내수시장과 기술 주권에 대한 우려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므로, 글로벌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국가적 기술 보안을 지킬 수 있는 절충적 모델을 설계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직면한 시리즈 C 공백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일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에서 시리즈 C 이후 투자가 약한 이유는 자금, 제도, 사례, 규제라는 네 가지 요인이 서로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향이 필요합니다. 첫째, 연기금과 보험사 같은 장기 자금이 벤처 생태계로 들어와야 합니다. 둘째, 대기업 인수에 대한 규제 부담을 완화하고 세제 인센티브를 통해 M&A를 촉진해야 합니다. 셋째, IPO 외에도 해외 직상장, SPAC, 세컨더리 펀드 등 다양한 출구를 마련해야 합니다. 넷째,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업이나 조건부 인수를 허용해 국제적 자본과 기술 교류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결국 한국의 시리즈 C 이후 투자 공백은 창업가 개인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생태계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벽을 허물지 못한다면 기술 스타트업은 출구 없는 성장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 스타트업의 다음 도약을 위해서는 롱머니, Exit, 규제라는 세 가지 축을 동시에 재설계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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