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은 쉽지만 스케일업은 어려운 나라의 역설
한국은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한 나라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매년 수만 개의 법인이 새로 생기고, 중소벤처기업부와 모태펀드, 각종 액셀러레이터와 벤처캐피털이 초기 시장을 뒷받침한다. ‘혁신 창업국가’라는 구호가 공허하지 않게 들리는 이유는, 실제로 젊은 창업자들이 앱, 플랫폼, 헬스케어, 인공지능, 반도체 장비 등 다양한 영역에서 회사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단계에서 터진다. 초기 창업은 쉬운데, 시리즈 C 이후의 스케일업 자금조달과 해외 진출, 엑시트 전략이 유리천장처럼 막혀 있는 것이다. 창업의 수는 많지만, 글로벌 유니콘으로 도약하는 사례는 드물다. 왜 한국은 스타트업의 문턱은 낮지만, 성장의 천장은 그렇게 높은가.
한국 정부는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창업을 독려했다. 청년 창업 지원금, 대학 창업 보육센터, 창업진흥원 프로그램, 모태펀드 출자 등이 촘촘하게 얽혀 초기 창업자에게는 자금과 네트워크가 제공된다. 이 제도적 장치는 확실히 효과를 냈다. 정부 주도의 엔젤·시드 투자, 창업 경진대회, 액셀러레이터의 성장으로 한국은 창업 생태계의 모양을 갖추었다. “창업은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자금 이후, 특히 시리즈 C 단계에서 수천억 원 단위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순간, 한국 스타트업은 갑자기 숨이 막힌다. 대규모 펀드를 운영하는 벤처캐피털이 적고, 기관투자가의 장기 자금은 주로 부동산이나 대기업 지분에 묶여 있다. 한국 스타트업은 그래서 ‘중간 계단’을 잃고 만다. 시리즈 A, B까지는 정부와 소규모 VC가 버텨주지만, 이후 글로벌 확장 단계에서는 국내 자금 풀의 얕음을 실감한다. 결국 많은 스타트업은 해외 VC나 전략적 투자자에 의존하거나,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성장 정체를 맞는다.
한국 스타트업이 부딪히는 가장 큰 벽은 ‘롱머니(long money)’의 부족이다. 미국, 유럽, 중동의 대형 펀드는 10년, 20년 단위로 투자와 회수를 설계한다. 그러나 한국의 벤처펀드 운용 기간은 대체로 7~8년, 짧게는 5년이다. 펀드 매니저는 투자 후 2~3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하고, 그 결과 스타트업은 아직 제품 시장 적합성(PMF)을 검증하는 단계에서 빠른 매출 성장을 강요받는다. “빨리 크라, 빨리 나가라”는 압박은 장기적 혁신보다는 단기적 매출 확대에 치중하게 만든다.
이러한 단기 시계는 특히 딥테크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반도체 장비, 배터리 소재, 바이오 신약처럼 장기 연구와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분야는, 5년 내에 매출과 이익을 내라는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딥테크 창업자들은 초기 단계에서 정부 과제와 보조금에 의존하다가, 중간에 자금줄이 끊겨 해외로 나가거나 연구를 접는 경우가 잦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돈이 없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구조적 사실이다.
엑시트 구조도 문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스타트업이 성장하다가 대기업에 인수되는 것이 흔하다. 구글, 메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매년 수십 건의 M&A를 하며 신기술과 팀을 흡수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기업의 인수합병 문화가 약하다.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협력사로 두려워하지,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열사 간 내부 경쟁과 규제 리스크를 우려해 인수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한국 스타트업의 엑시트는 거의 IPO로 집중된다. 상장을 위해서는 일정한 매출과 이익을 보여야 하고, 기술 기반 스타트업은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 IPO에 성공해도 주가 변동성과 규제 리스크는 또 다른 부담이 된다. M&A가 부진하고 IPO만이 유일한 출구로 남는 구조는,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의 역동성을 제한한다. 창업자와 투자자가 과감한 모험을 하기보다, 안전한 업종과 확실한 매출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규제 환경도 유리천장의 일부다. 금융, 헬스케어, 모빌리티, 교육 등 많은 영역에서 혁신 스타트업은 기존 규제의 벽을 마주한다. 카카오 모빌리티, 배달앱, 온라인 교육 서비스가 사회적 반발과 규제 충돌을 겪은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규제가 단순히 늦다는 문제가 아니라, 규제 완화가 일시적 실험(샌드박스)에 그치고, 제도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한 번 열었던 문을 제도화하지 못하면, 스타트업은 언제든 불확실성에 갇힌다.
특히 금융과 헬스케어 분야는 “안전”이라는 이유로 규제가 더 강하다. 하지만 안전과 혁신은 반드시 대립하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규제를 혁신의 동반자로 설계해, 새로운 서비스가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곧바로 제도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아직 이런 ‘실험에서 제도로의 빠른 전환’이 부족하다. 규제 불확실성은 결국 투자자와 고객을 불안하게 하고, 스타트업은 자금과 시장을 동시에 잃는다.
금융과 제도 외에도, 사회문화적 요인도 스타트업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 실패한 창업자는 다시 도전하기 어렵다. 신용 불이익, 투자자와 고객의 신뢰 상실, 사회적 낙인이 동시에 따라붙는다. 반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 경험이 오히려 창업자의 경력으로 존중받는다. “한 번 망해 본 사람만이 다음에 성공한다”는 말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투자자의 합리적 판단이기도 하다. 실패를 통해 시장과 팀 운영, 기술 개발의 리스크를 학습한 창업자가 다음에 더 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 이 문화를 충분히 내재화하지 못했다. 실패는 낙인이고, 재도전은 위험으로 간주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업자는 안전한 아이템을 택하고, 투자자는 안정적 업종에만 돈을 넣는다. 결국 생태계 전체가 모험을 꺼리는 구조로 고착화된다.
그렇다면 한국 스타트업은 어떻게 유리천장을 깰 수 있을까. 첫째,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롱머니’의 유입이 절실하다. 연기금과 보험사 같은 기관투자가가 벤처투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정책도 이를 유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대기업의 M&A 문화를 바꿔야 한다. 스타트업을 경쟁자로만 보지 않고, 혁신의 파트너로 흡수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셋째,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 제도화로 빠르게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샌드박스가 실험실에 머물면 혁신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넷째, 실패에 관대한 문화가 필요하다. 재도전이 새로운 혁신의 토양이 될 수 있도록 금융, 제도, 사회적 인식이 함께 변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단순히 작은 기업이 아니다. 사회가 새로운 제도와 기술, 문화를 실험하는 장치다. 한국은 창업의 문을 열었지만, 성장의 문은 아직 좁다. 이중 구조가 바로 유리천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유리천장은 깨기 어려운 만큼 깨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전자정부, 모바일 결제, 초고속 인터넷, K-컬처에서 실험을 세계에 앞서 실행하고 증명한 경험이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 역시 그 연장선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세계적 혁신의 무대에 올라설 수 있다.
한국이 지금 직면한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창업의 나라로 남을 것인가, 성장의 나라로 도약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은 또다시 세계보다 먼저, 스타트업 생태계의 미래를 실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