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화 테크노내셔널리즘, K-팝에서 메타버스로

플랫폼, 데이터, 가상현실, 저작권, 팬덤이 맞물려 국가 브랜드가 될 때

by 드라이트리

한국을 이야기할 때 기술과 제조만으로는 절반밖에 말하지 못한다. 남은 절반은 문화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는 오랫동안 이야기되던 “부드러운 힘”이라는 수사를 넘어, 점점 더 구조화된 기술 체계와 결합해 일종의 국가 운영체제로 변하고 있다. 이 변환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돌 시스템이 발굴과 훈련, 콘텐츠 제작과 유통, 팬덤의 조직화와 데이터 분석, 투어와 굿즈, 게임과 웹툰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하나의 파이프라인으로 설계해 왔기 때문이다. 문화가 기술의 뒷좌석에 앉아 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가 국가 브랜드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지금의 특이성이다. 이 글은 K-팝이 메타버스와 인공지능, 데이터와 플랫폼을 흡수하면서 어떻게 문화 테크노내셔널리즘의 프로토콜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기회와 위험이 무엇인지 최대한 깊이 해부하려는 시도다.


무대 뒤부터 들여다보면 변화의 핵심은 제작 방식의 알고리즘화에 있다. 과거의 A&R이 귀와 촉으로 움직였다면 오늘의 A&R은 데이터와 실험으로 움직인다. 연습생 단계에서부터 퍼포먼스와 보컬, 언어와 표정, 카메라 동선과 소셜 반응이 로그로 남고, 발표 전후의 티저와 챌린지, 쇼츠와 릴스의 리텐션과 전환율이 일자별로 회귀 분석된다. 이 데이터가 다음 촬영의 콘티와 다음 안무의 동선, 다음 곡의 훅과 템포를 바꾸고, 심지어 다음 콘서트의 세트리스트와 굿즈의 생산량까지 바꾼다. 성공은 요행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요리법으로 표준화되고, 실패는 감정이 아니라 실험 로그로 수렴한다. 이 표준화가 차갑게 들릴 수 있으나, 바로 여기에서 K-팝의 독창성이 생긴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압력을 창작의 언어로 되받아치는 훈련이 집요하게 수행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K-팝의 한 곡, 한 편의 뮤직비디오, 한 번의 무대는 단발성 창작물이 아니라 다음 창작을 낳는 학습 데이터가 된다.


이 데이터는 플랫폼의 언어로 번역될 때 힘을 가진다. 발견과 소비의 플랫폼은 다르고, 소유와 소속의 플랫폼도 다르다. 숏폼 플랫폼은 발견과 확산의 엔진이지만, 알고리즘의 경향은 유행을 파도처럼 만들고 패러디를 복제처럼 만든다. 반대로 팬덤 플랫폼은 소속과 거래의 엔진이다. 멤버십과 팬커뮤니티, 디지털 포토카드와 실물 굿즈, 스트리밍과 투표, 팬미팅과 콘서트 예매, 라이브 상호작용과 사전 팬사 인증까지 하나의 폐루프 안에서 돌아간다. 발견의 플랫폼에 너무 의존하면 노출의 상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속의 플랫폼이 빈약하면 수익의 심장을 타사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기획사들은 두 플랫폼을 분리·결합하는 독특한 균형을 추구해 왔다. 바깥에서 발견해 안으로 모으고, 안에서 결속해 다시 바깥으로 퍼뜨리는 순환이다. 이 순환이 끊기지 않게 하려면 데이터 주권이 필요하다. 어떤 사용자가 언제 무엇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느 결제가 어떤 콘텐츠에서 일어났는지를 파편적 로그가 아니라 온전한 스키마로 소유하는 일이다. 데이터 주권은 선언이 아니라 설계이며, 설계의 완성도는 흥행의 지속가능성을 가르는 변수다.


메타버스는 이 설계가 공간으로 확장되는 첫 번째 실험장이었다. 오프라인 공연장의 심장이었던 박동과 함성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은 가상 스테이지와 인터랙티브 스트리밍, 볼류메트릭 캡처와 모션 트래킹, 실시간 렌더링과 다중 시점을 결합한 견고한 답변을 내놓았다.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 관객 규모와 참여형 카메라 뷰, 관객에게 귀속감과 동시성을 주는 미션형 상호작용이 더해지자, “관객”은 보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그래픽이 아니라 몰입의 설계다. 화면을 보는 시선의 높이와 이동 속도, 댓글과 이모티콘이 무대를 침범하지 않도록 배치하는 레이어링, 실시간 구간 반복과 즉시 하이라이트 생성 같은 인터페이스가 공연의 감각을 좌우한다. 기술은 몸의 기억을 속일 수 있을 때만 예술이 된다. 한국은 팬덤의 미세한 리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상 공연이 오프라인의 대체물이 아니라 별개의 체험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콘텐츠의 단위가 원자처럼 잘게 쪼개지고 서로 다른 매체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일도 한국식 문화 엔지니어링의 특징이다. 한 곡의 후렴이 챌린지로, 안무의 한 동작이 밈으로, 무대의 한 프레임이 배경화면으로, 촬영장의 한 어구가 음성 클립으로 복제되고 변주된다. 이 원자 단위는 저작권의 새로운 단위이기도 하다. 누구의 어떤 노동이 어디서 가치를 만들었는지, 변형과 2차 창작의 경계가 어디인지, 크레딧과 수익 배분이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모든 것이 다시 쓰여야 한다. 메타버스가 진짜 산업이 되려면 창작의 원자성과 소유의 추적성이 같은 세계를 살아야 한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방송과 공연, 디지털 싱글과 피지컬 앨범, 공식 영상과 팬캠이 분리·복합되는 세계를 관리해 왔다. 이 경험은 디지털 소유권의 논쟁이 과열될수록 더욱 빛을 낸다. 소유의 증명과 변형의 자유, 공식과 팬의 공존이 균형을 찾을 때, 문화는 싸움이 아니라 놀이가 된다.


인공지능은 이 모든 흐름의 뒤편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자동 번역과 자막 생성, 다국어 더빙과 발화 스타일 전환, 팬과의 대화에서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비서형 응답, 스케줄과 공지의 자동 요약, 악보와 편곡의 초안 제안, 사진과 영상에서의 결함 보정과 색채 일관화, 음성 합성과 립싱크 정합 등 이미 수많은 도구가 현장에 들어와 있다. 중요한 것은 도구를 쓴다는 사실이 아니라 도구를 쓸 때 생기는 책임의 설계다. 음성 합성은 목소리의 소유를 다시 묻고, 작곡 보조는 창작의 경계를 다시 긋는다. 팬과의 대화가 자동화될 때 진정성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자동편집이 자연스러워질수록 인간 편집의 가치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인공지능이 만든 아이돌과 인간 아이돌이 공존하는 무대의 규칙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으면 기술은 단기 효율을 늘리고 장기 신뢰를 깎아먹는다. 반대로, 출처 표시와 워터마킹, 원본 인증과 변조 경고, 합성 음성의 명시와 수익 배분, 고위험 주제의 응답 제한과 사람 검토의 의무화 같은 장치가 체계에 탑재되면, 기술은 위험을 줄이고 가능성을 확장한다.


노동과 권리의 지형도 달라진다. 아이돌의 노동은 무대 위의 시간보다 무대 밖의 준비와 관리, 온라인에서의 상호작용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데이터가 가치가 되는 순간, 데이터 노동의 가격과 보호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창작자와 안무가, 프로듀서와 믹싱 엔지니어, 3D 아티스트와 모션 캡처 배우, 커뮤니티 매니저와 번역가, 현장 엔지니어와 보안 인력, 공연 기획자와 영상 편집자까지, 문화의 사슬을 당기는 사람들의 권리는 전통적 저작권과 근로계약으로는 다 담기 어렵다. 메타버스와 AI가 결합한 세계에서 권리는 점과 선이 아니라 레이어다. 입력된 데이터, 가공된 표현, 배포된 파일, 상호작용의 로그, 2차 변형과 파생 상품에 이르기까지 권리의 궤적을 따라가는 기술과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은 산업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거치며 저작권과 인접권, 실연권과 초상권의 충돌을 수없이 겪었고 그때마다 타협안을 만들었다. 이 기록은 앞으로의 협상에서 출발선이 될 수 있다.


국가 브랜드의 관점에서 보면, 문화 테크노내셔널리즘은 과장된 구호가 아니라 회계와 인프라의 문제다. 한 편의 드라마가 해외 플랫폼에서 파는 권리료와 한 도시의 관광 수입, 엔터사의 시가총액과 관계 산업의 고용, 공연장의 수용 인원과 공항의 좌석, 스트리밍의 동시 접속과 전력망의 피크가 같은 방정식에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문화가 독자 생존하는 산업이 아니라 도시와 교통, 통신과 금융, 에너지와 치안이 얽힌 공급망 위에 올라서야 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을 한국은 이미 체감하고 있다. 결국 문화의 주권은 서버의 위치와 데이터의 흐름, 결제의 승인과 법정 통화, 세금과 관세, 비자와 보험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이 스스로의 규칙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가 콘텐트의 내용을 결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콘텐트가 흐르는 파이프의 규칙을 스스로 쥐자는 뜻이다. 파이프의 규칙을 가진 자가 생태계의 속도와 비용을 조절한다.


위험도 적지 않다. 숏폼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한 번 외면하면 신인 그룹의 노출 기회는 급격히 줄어든다. 특정 국가의 검열 규칙과 지불 제한이 강화되면 주요 시장의 성장세가 꺾인다. 거대 플랫폼의 수수료 정책이 바뀌면 음악과 굿즈의 채널 믹스가 순식간에 뒤틀린다. 가상 공연의 하드웨어 보급이 기대보다 늦어지면 콘텐츠 제작 비용을 회수하기 어려워진다. 인공지능의 합성 영상과 음성 범람은 아티스트의 안전을 위협하고 팬덤의 신뢰를 흔든다. 무엇보다, 과도한 수익화 전략이 팬의 피로를 쌓게 만들 위험이 늘 있다. 친밀감을 요금제에 묶어 팔기 시작하면, 문화는 곧 서비스의 탈을 쓴 과금 모델로 오해받는다. 친밀감은 신뢰에서 오고, 신뢰는 시간에서 온다. 시간을 돈으로만 환산하지 않는 상식이 산업의 수명을 늘린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실천의 우선순위는 실은 명확하다. 첫째, 문화 데이터의 보존과 개방, 보호를 동시에 달성하는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 공연과 연습, 녹음과 믹싱, 안무와 리허설, 팬덤의 상호작용과 제작 노하우를 메타데이터와 함께 구조화해, 창작자와 연구자, 교육기관과 기업이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재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소유와 진위를 증명하는 경량의 인증 체계를 보편화해 합성·변조와 원본을 구분하고, 파생 이용과 수익 배분의 자동화를 진척시켜야 한다. 셋째, 다국어·다형식 제작을 일상화해 한국어와 영어, 한자 문화권을 가르는 장벽을 낮추고, 지역별로 다른 규제와 지불 수단을 기술적으로 흡수하는 미들웨어를 갖추어야 한다. 넷째,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하이브리드 공연을 도시 인프라와 연결된 상시 서비스로 만들어야 한다. 공연장과 학교, 도서관과 체육관, 지역 커뮤니티가 저녁에는 가상 공연의 노드가 되는 설계는 문화 접근성의 정의를 바꾼다. 다섯째, 문화 기술의 교육을 표준화해 3D 그래픽과 모션 캡처, 실시간 렌더링과 인터랙션 디자인, 데이터 분석과 저작권, 윤리와 안전을 엮은 커리큘럼을 중등·고등·대학·직업훈련 전 주기에 넣어야 한다. 사람을 키우지 않으면 기술은 빛을 잃는다.


이 모든 논의가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비슷한 전환을 해냈다. 초고속 인터넷과 전자정부, 모바일 결제와 온라인 교육, 게임과 웹툰, 방송과 드라마, 그리고 K-팝이 각자의 파이프를 놓고 상호 운용성을 키우며 하나의 생활 운영체제로 결합하는 과정을 우리는 현장에서 보았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은 이 운영체제를 더 촘촘하게 엮는 접착제이자 새로운 감각의 무대다.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고, 과시보다 신뢰다. 팬덤을 고객으로만 보지 않고 공동 제작자로 대우하는 태도, 창작자와 수행자, 기술자와 운영자의 권리를 균형 있게 존중하는 제도, 합성 시대에 진위를 상식으로 구분하게 하는 표준,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플랫폼과 협력하는 영리함이 축적될 때, 문화 테크노내셔널리즘은 구호가 아니라 체질이 된다.


끝으로 메타버스라는 말을 한 걸음 물러서 보자.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더 높은 해상도의 픽셀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의 해상도다. 노래 한 줄과 동작 하나가 사람의 하루와 연결되는 방식, 한 도시의 밤이 한 대륙의 아침과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방식, 팬과 아티스트가 서로의 삶을 잠시 건너가 보는 방식이 기술로 부드럽게 매개될 때, 문화는 국경을 넘어가도 모양을 잃지 않는다. 한국은 이미 이 감각을 안다. 작은 나라가 세계의 취향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라 리듬을 빨리 배웠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싸움은 더 크고 더 화려한 무대를 짓는 일이 아니라, 더 섬세하고 더 공정한 무대를 운영하는 일이다. 그 무대가 플랫폼과 데이터, 메타버스와 AI, 저작권과 팬덤이라는 다섯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을 때, 한국의 문화는 더 이상 수출 품목이 아니라 자신을 갱신하는 국가의 운영체제가 된다. 그리고 그 운영체제가 잘 돌아갈수록, 세계는 한국을 하나의 장르로 부르게 될 것이다.






keyword
이전 06화소버린 AI, 작은 나라의 거대한 야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