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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전환과 국가의 생존 전략

석탄에서 원자력, 재생에너지와 수소까지

by 드라이트리

한국의 근대화는 값싼 에너지와 젊은 인구가 맞물린 거대한 압축 실험이었다. 석탄과 석유가 불을 지피고, 원자력이 전력의 바닥을 깔았으며, 값싼 전기가 포항의 용광로와 울산의 화학단지, 수도권의 전자공장을 밤낮없이 돌렸다. 그러나 이 성장 방정식의 두 변수—에너지와 인구—가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다. 인구절벽은 노동의 축을 약화시키고, 기후위기와 지정학은 에너지의 축을 흔든다. 게다가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배터리 기가팩토리라는 새로운 수요원이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전력을 요구한다. 문제는 기술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속도와 순서를 누가 설계하느냐, 부담을 누가 나누느냐, 그 과정에서 국가의 협상력을 어떻게 키우느냐다. 에너지 전환은 “무엇을 더 짓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영하고 상쇄하며, 어떤 옵션을 확보하느냐”의 게임으로 이미 옮겨갔다.


한국이 의존해온 전력 시스템의 심장은 오랫동안 원자력과 석탄이었다. 원전은 낮은 연료비와 높은 설비이용률로 제조업의 기초 체온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석탄은 계통의 관성(주파수 안정화)에 기여하며 대규모 기저부하를 담당했다. 그러나 석탄의 사회적 비용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고, 원전은 안전성과 폐기물, 신규 부지의 사회적 수용성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다. 그 사이 태양광과 풍력은 급속히 싸지고 커졌다. 문제는 설치 속도나 발전단가만이 아니다. 재생에너지는 출력이 기상에 따라 출렁이고, 도심과 산업단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송전·변전 인프라가 병목이 된다. 한국처럼 산지가 많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에서 주민 수용성을 확보하며 송전선로를 증설하는 일은 기술보다 정치의 영역이다. 계통 보강의 타임라인이 발전소 건설보다 길어지는 순간, 값싼 전기는 계통에 진입하지 못하고 ‘출력 제한’으로 잘려 나간다. 발전 설비를 늘렸는데 실질 공급능력(특히 피크 시간대의 신뢰가능 용량)이 늘지 않는 역설이 반복되는 이유다.


데이터센터는 전력 시스템의 새로운 주인공이다. 인공지능 학습과 대규모 클라우드 서비스는 24시간 높은 부하를 유지하고, 전력 품질 요구(전압·주파수 안정성, 순간 정전 무허용), 냉각을 위한 추가 전력, 입지 특성(광케이블 지연, 재해 안전, 부지 접근성)까지 겹쳐 일반 산업 수요와 다른 그림을 요구한다. 데이터센터는 흔히 재생에너지 구매를 통해 친환경 이미지를 확보하려 하지만, 구매계약서의 녹색 전기와 실제 시간대별 전력의 녹색성은 다를 수 있다. 한낮 태양광이 넘치는 시간대의 인증서만으로 새벽 두 시의 학습 부하를 상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시간 일치성”의 문제로 돌아온다. 한국이 진짜 의미의 녹색 데이터를 생산하려면 시간대별 재생 전력 매칭, 장기 전력구매계약과 저장장치 결합, 데이터센터 폐열의 지역난방 활용, 정전 시 블랙스타트까지 고려한 마이크로그리드 설계를 동시에 끌고 가야 한다. 전기는 더 이상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신뢰도와 시간가치가 가격에 반영되어야 하는 ‘서비스’다.


전기차 역시 전력 수요의 모양을 바꾼다. 충전은 사람의 생활 리듬을 따라 특정 시간대에 몰리기 쉽고, 대규모 단지나 고속도로 휴게소의 초급속 충전기는 변전설비의 한계를 순식간에 드러낸다. 무작정 완속 충전기를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대별 요금, 수요반응, 스마트 충전, 이차전지 연계, 나아가 차량-계통 양방향 연계(V2G)까지 포함한 종합 설계가 필요하다. 전기차는 이동수단이지만, 멈춰 있는 시간이 길다는 특성 덕분에 분산형 에너지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를 제도와 요금으로 유인하지 못하면, 전기차는 전력망의 새로운 피크 부하로만 남는다. 반대로 유인에 성공하면, 전기차는 송전망 증설의 완충 장치가 되고, 지역 단위의 전력안정에 기여하는 가변형 자원이 된다. 인프라 투자의 순서를 바꾸는 지혜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재생에너지의 성장과 계통 안정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수단은 다양하다. 첫째, 저장장치다. 리튬이온 ESS는 분 단위의 출력 조정과 주파수 보정에 탁월하지만, 계절 단위의 대규모 저장에는 무겁다. 양수발전은 수십 년짜리 인프라이지만 부지와 환경수용성의 제약을 받는다. 수소·암모니아·합성연료는 에너지 캐리어로서 장주기 저장과 탈탄소 산업연료의 교차점에 서 있다. 저장 믹스를 지역 특성에 맞게 설계하는 안목이 중요하다. 둘째, 계통 보조서비스 시장의 정교화다. 전력시장을 단순 에너지 거래에서 벗어나 관성 제공, 무효전력, 단락용량, 계통강도, 블랙스타트 등 눈에 보이지 않던 서비스를 가격으로 인정해야 한다. 재생·저장·수요자원이 이 시장에서 실질 수입을 얻어야 투자 유인이 생긴다. 셋째, 그리드 포밍 인버터와 동기조상기 같은 새로운 장치다. 석탄·가스 발전기의 관성이 빠지는 계통에서는 전자식 인버터가 스스로 기준파형을 제공해 “가상의 관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기술을 조기에 표준화하고 실계통에 투입할 수 있는 사업모델을 열어야 한다.


원자력은 감정의 언어를 벗어나 시스템의 언어로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대형 원전은 기저부하와 수출산업의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탈탄소·에너지안정을 위해 일정 비중이 필요할 수 있다. 동시에 부지·안전·폐기물·건설기간이라는 제약이 분명하다. 선택지는 고정된 정답이 아니다. 일부는 기존 대형호기의 생애연장을 통해 단가와 안정성을 확보하고, 일부는 소형모듈원전(SMR)의 기술성숙도를 지켜보되, 실제 난제인 공급망과 규제·운영 인력의 파이프라인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원전의 진짜 병목은 기술 그 자체보다도 사회적 신뢰와 행정 역량이다. 투명한 정보 공개, 사고·고장 데이터의 표준화, 지역 커뮤니티와의 상생모델, 비상대응 훈련의 일상화가 없다면 아무리 세련된 기술도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다.


천연가스는 전환기의 윤활유다. 탄소가 낮고 기동·정지가 유연하여 재생변동을 보완하기 좋다. 그러나 한국의 LNG 의존은 가격 변동과 지정학의 충격에 취약하다. 가스발전이 재무적으로 존속하려면 용량요금(가용성 가치 보상), 연료비 조정, 장기 가스조달과 전력시장 설계의 정합성이 필요하다. 가스발전의 생존은 단순히 민간발전사의 이익 문제가 아니라 계통 유연성의 보험이다. 다만 가스에 갇히지 않으려면 암모니아 혼소·수소 전환 가능성, 열병합과 지역난방의 최적화, 산업공정의 직접 전기화 등 출구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송·배전망은 에너지 전환의 간선도로다. 한국은 발전소를 짓는 속도보다 선로를 놓는 속도가 느리다. “어디에, 누구의 동의를 얻어, 어떤 보상으로”라는 사회계약 없이는 송전망은 한 미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계통 연계 대기열의 정리, 지역 이익공유 제도, 지중화와 경관 설계, 환경 영향의 과학적 공개, 공청회의 절차적 정의가 핵심이다. 전력망 투자에 대한 규제회계(Regulated Asset Base)와 장기 안정 수익률을 확정해 투자자의 불확실성을 낮추는 장치도 필요하다. 송전망은 공공재이자 자본집약산업이므로, 정치적 논란에 흔들리지 않는 재원 조달 프레임이 생태계의 체력을 지킨다.


가격과 요금의 문제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다. 지금의 전기요금 체계는 원가 신호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시간·공간별 희소성이 가격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 에너지 전환에서는 “언제·어디서·어떤 품질의 전기”가 중요한데, 단일 평균요금이 이 신호를 지워버린다. 시간대별 요금, 계절별 차등, 지역 혼잡비용, 용량요금과 수요요금, 분산자원 보상 등 가격의 다층화가 불가피하다. 동시에 에너지 빈곤층을 보호하는 생계형 구간요금, 저소득층·영세사업자 지원, 전환에 따른 산업 경쟁력 훼손을 막는 한시적 보조가 병행되어야 한다. 요금 현실화는 정치의 고난도 과제이지만, 늦출수록 비공식 부채가 쌓인다. 보조금은 감추는 도구가 아니라 전환을 촉진하는 다리여야 한다.


수소와 암모니아, 합성연료는 “장거리, 장주기, 부문 간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력망으로 옮길 수 없는 에너지를 배로 가져오고, 철강·시멘트·해운·항공 같은 탈탄소 난제 부문에 투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린수소는 값비싸고, 블루수소는 탄소포집의 신뢰 문제가 남아 있다. 한국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수입선 다변화와 국내 수요의 단계적 형성이다. 항만의 암모니아 혼소 실증, 산업단지의 수소 파이프라인, 연료전지의 분산전원화, 전환비용을 낮추는 세제·규정 개선이 차곡차곡 쌓여야 한다. 수소는 구호가 아니라 네트워크 산업이다. 파이프와 밸브, 압축기와 저장탱크, 계량과 안전, 보험과 표준이 맞물리지 않으면 첫 분자의 경제성은 나오지 않는다.


건물과 열의 문제도 전기 못지않다. 도심의 에너지 전환은 지붕 위 모듈과 벽체 단열, 창호 교체, 히트펌프, 지열·수열 네트워크, 지역난방의 저온화 같은 조각들의 합이다. “절약”은 캠페인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다. 성능 기반 리모델링 계약(EPC)과 그린 모기지, 건물 에너지 등급의 시장 가격 반영, 공공건물의 선도적 전환, 사유지 태양광의 표준화·안전 규정 개선이 도시의 전력 피크를 깎는다. 도시가스 배관망은 서서히 열 네트워크로 전환될 수 있고,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의 폐열은 도심의 겨울을 덜 춥게 만들 자산이다. 에너지 전환의 성공은 중앙정부의 목표가 아니라 지방정부의 집요함에서 나온다.


산업 전환은 단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가치사슬의 재편이다. 철강의 수소 환원, 석유화학의 전기화와 바이오 대체,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공정의 에너지 효율과 재이용, 항만의 육상전력 공급과 친환경 연료 전환, 조선의 암모니아·메탄올 추진선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이 변화는 기술투자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표준과 조달, 금융과 보험, 세제와 무역의 설계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의 확대는 한국 수출산업의 비용함수를 바꾼다. 탄소가격의 국내 도입 여부를 넘어, 최소한의 내부 “그림자 가격”을 가지고 투자 판단과 제품 가격에 반영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탄소를 돈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할 때, 전환은 추상에서 현실이 된다.


공급망의 지정학은 에너지 하드웨어의 목줄을 쥔다. 태양광의 폴리실리콘과 셀, 풍력의 대형 베어링과 희토류, 배터리의 리튬·니켈·코발트, 변압기의 전기강판—이 모든 것은 특정 국가·기업에 쏠려 있다. 한국이 에너지 테크노내셔널리즘을 말할 때, 의미는 국산화의 구호가 아니라 “교체 가능성”의 확보다. 한 벤더가 흔들려도 다른 벤더로 갈아탈 수 있는 설계, 한 국가에서 문제가 생겨도 대체 루트로 전환 가능한 계약, 핵심 부품의 일부는 국내 생산을 유지하는 기반이 주권의 내용이다. 모든 것을 다 만들 수는 없지만, 바꿀 수 있게 설계할 수는 있다. 그 설계가 협상력을 만든다.


인력과 조직, 교육의 문제는 전환의 속도를 결정한다. 변전소와 송전선로, 해상풍력과 원전, 수소 설비와 건물 리트로핏을 설계하고 시공하고 운영할 기술자와 감독, 검사와 안전, 데이터와 제어 인력이 부족하다. 대학과 폴리텍, 산업인력공단, 기업의 사내대학이 분절적으로 양성하는 방식으로는 따라잡기 어렵다. 직무 표준을 재정의하고, 국가기술자격과 산업표준을 연동해 교육과 현장의 언어를 맞춰야 한다. 숙련의 사다리를 빠르게 오를 수 있는 마이크로 자격, 산학겸임 교원, 현장실습과 디지털 트윈 기반 훈련, 외국인 숙련 인력의 합리적 도입이 동시에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진부한 문장이 이토록 사실이었던 적이 없다.


정책과 제도의 거버넌스는 실패와 수정의 로그를 남겨야 한다. 샌드박스는 시작이고, 제도화는 목적이다. 실증과 평가, 보완과 확산의 루프가 빠르게 돌지 않으면, 현장은 불확실성 비용으로 지쳐간다. 탄소와 전력, 연료와 인증, 안전과 환경의 규정이 서로 부딪힐 때, 부처 간 조정 능력이 전환의 병목이 된다. 데이터 기반의 정책평가—예컨대 출력 제한 시간, 연결 대기 기간, 송전 혼잡 비용, 피크 감축 효과, ESS 사이클 수명과 화재 리스크의 실측—가 공개되어야 사회적 신뢰가 쌓인다. 정책의 품질은 설명의 품질과 비례한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합의의 시간이 짧아진다.


결국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포트폴리오다. 원전은 안전과 신뢰를 담보로 기저를 지키고, 재생은 속도와 규모로 탈탄소를 끌고 가며, 가스는 유연성과 보험의 역할을 한다. 저장과 계통 서비스 시장은 변동성의 충격을 흡수하고, 송배전망은 보이지 않는 병목을 제거한다. 데이터센터와 전기차는 수요의 측에서 참여해 전력망을 지탱하고, 건물과 열 부문은 도시의 체온을 낮춘다. 수소와 합성연료는 장거리와 장주기의 간극을 메운다. 가격은 신호를 보내고, 제도는 예측가능성을 제공하며, 사회는 비용을 정의하고 분담한다. 기술은 기업이 만들지만, 속도는 제도가 만들고, 방향은 사회가 정한다. 작은 나라는 속도를 과시해 살아남지 않는다. 선택지를 늘리고, 교체 가능성을 확보하고, 실패의 비용을 낮추는 설계로 오래 버틴다. 에너지 전환은 거대한 건물 한 동을 짓는 일이 아니라, 작은 다리들을 촘촘히 놓아 강을 건너는 일이다. 한국은 이미 다리를 놓는 법을 안다.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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