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내셔널리즘의 파고 속, 생존을 넘어 도약으로
한국의 지난 반세기는 속도의 역사였다. 산업화는 “더 빨리, 더 많이”라는 명령문으로 작동했고, 민주화는 그 속도를 지탱할 제도와 권리를 마련했으며, 디지털화는 사회의 운영체제를 교체하듯 생활의 리듬을 재설정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속도만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인구절벽, 에너지 전환, 지정학적 분절, 데이터와 AI가 주도하는 패권 경쟁이 동시에 겹친 다중위기 속에서, 국가는 “얼마나 빨리”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얼마나 현명하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은 더 이상 성장의 촉매만이 아니다. 제도와 외교, 문화와 산업, 안전과 윤리의 교차점에서 국가의 생존을 가르는 언어가 되었다. 이 글은 한국이 그 언어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어떤 어휘를 먼저 익혀야 하는지, 어느 문법으로 문장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긴 제안이다.
첫째로, 기술 전략의 기본 단위는 더 이상 “제품”이나 “산업”이 아니라 “체계”여야 한다. 반도체에서 우리는 이를 뼈저리게 배웠다. 메모리의 초격차가 실재하는 동안에도 AI 가속기의 병목은 메모리 칩 그 자체가 아니라 패키징과 전력, 냉각, 소프트웨어 스택, 공급망의 예측가능성에서 발생했다. 한국이 메모리 강국의 지위를 방어하고 확장하려면, HBM의 수율과 성능을 이야기할 때 동시에 인터포저와 실리콘 브릿지, 열설계와 재료, 첨단 패키징 캐파, 고객과의 레시피 공동개발, 납기와 계약 구조를 같은 문장 안에 넣어야 한다. 기술의 우위가 수익과 협상력으로 번역되는 경로는 체계적 설계의 유무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배터리도 셀의 에너지 밀도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포메이션 전력과 공장 운영체제, 소재·부품 현지화, 리사이클 루프, 규제 준수의 디지털화가 결합될 때 비로소 ‘팩토리를 수출하는 나라’가 ‘팩토리 운영체제를 수출하는 나라’로 격상된다. 체계는 부품의 합이 아니다. 실행의 루틴, 데이터의 문법, 계약의 조항, 인력의 숙련, 정책의 일관성까지 묶은 하나의 생물이다.
둘째로, 주권은 자급자족이 아니라 선택권이다. 소버린 AI를 둘러싼 과열된 구호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핵심은 “교체 가능성”의 설계다. 데이터는 합법과 신뢰의 파이프라인으로 모으고 닦으며, 컴퓨트는 거대 모델의 증설 이전에 효율과 분산을 통해 단위 전력·단위 비용당 성능을 끌어올리고, 모델은 거대·중형·도메인 특화·온디바이스의 포트폴리오로 분화한다. 플랫폼은 툴 호출과 권한, 추적성, 근거 남기기를 운영규칙으로 내장하고, 제도는 평가와 인증, 조달과 감사의 행위 기준을 숫자와 로그로 남긴다. 이 다섯 겹이 갖춰지면 우리는 특정 벤더나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 특정 플랫폼의 약관 수정에도 최소 기능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협상력은 커지고, 협상력은 주권으로 번역된다. 반대로 내부에 아무 것도 없으면 외풍이 불 때마다 전원이 내려간다. 옵션 가치는 평소에 과소평가되고 위기 때 과대평가된다. 국가의 기술 전략은 그 옵션을 미리 축적하는 일이어야 한다.
셋째로, 에너지와 통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반이지만, 그 위에서 모든 기술 전략이 움직인다.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기가팩토리의 전력 수요 곡선은 과거와 다르고, 전력은 더 이상 “킬로와트시의 가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간 일치성, 신뢰도, 회복탄력성이 가격에 반영되어야 한다. 재생 확대와 송배전망 보강, 저장 믹스의 합리적 설계, 그리드 포밍 인버터와 계통 보조서비스 시장, 장기 PPA와 데이터센터 폐열순환 같은 도구는 기술 목록이 아니라 운영의 문장이다. 통신 또한 5G에서 6G, 지상망에서 위성으로 확장되는 길목에서 표준의 문장 속에 자신의 알고리즘을 심고, 스펙트럼과 광의 지도를 사회적 합의로 그리고, 사이버 보안을 운영의 기본값으로 내재화해야 한다. 에너지와 통신의 투자는 정치적 논쟁을 피할 수 없지만, 규제회계와 합리적 수익률, 시간·공간별 요금의 신호, 외곽 지역의 공동사용과 공공투자 같은 ‘지루한 설계’가 뼈대를 만든다. 화려한 청사진보다 지루한 설계가 시스템을 살린다.
넷째로, 문화는 더 이상 소프트 파워가 아니다. 데이터와 플랫폼, 저작권과 팬덤, 메타버스와 실시간 렌더링, 다국어 제작과 진위 인증의 조합이 문화 산업을 국가 브랜드의 운영체제로 바꾼다. 여기서도 핵심은 데이터의 주권과 관계의 설계다. 발견과 소속의 플랫폼을 분리·연결하는 루프, 원자화된 콘텐츠의 권리 추적과 2차 창작의 합의, 합성 시대의 진위 증명과 워터마킹, 창작 노동의 가격과 보호, 팬과의 상호작용을 돈으로만 환산하지 않는 상식이 문화 산업의 수명을 늘린다. K-팝과 드라마는 이미 세계적 무대를 확보했지만, 앞으로의 경쟁은 노출의 싸움이 아니라 신뢰의 싸움, 그리고 파이프의 규칙을 누가 쓰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파이프의 규칙을 설계하는 자가 생태계의 속도와 비용을 조절한다.
다섯째로, 스타트업과 대기업, 학계와 공공의 역할 분담을 다시 써야 한다. 한국은 창업의 문턱은 낮지만 스케일업의 계단이 끊겨 있다. 롱머니의 부재, M&A 문화의 빈약, 실험이 제도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규제의 구조가 유리천장을 만든다. 이를 깨려면 연기금과 보험 등 장기 자금의 참여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제도, 대기업의 인수·통합을 촉진하는 경쟁정책의 정교화, 샌드박스에서 제도화로 이어지는 표준 경로, 실패자에게 재도전의 신용을 회복시키는 금융의 룰이 필요하다. 딥테크는 5년짜리 펀드로 자라지 않는다. 공공 조달이 초기 시장을 열고, 대학과 연구소가 기초를 다지며, 대기업이 글로벌 유통과 규제 대응의 그릇을 제공할 때, 스타트업은 기술의 빈틈이 아니라 가치사슬의 빈칸을 메운다. 성장의 내구성은 생태계의 분업에서 나온다.
여섯째로, 인력과 교육은 선언이 아니라 설계다. RF와 광, 반도체와 재료, 프로토콜과 분산시스템, 보안과 정책, 데이터와 운영을 가로지르는 T자형·Π자형 인재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국가기술자격과 산업 표준을 연동해 직무 기술서를 업데이트하고, 마이크로 자격과 현장 실습, 디지털 트윈 기반 훈련으로 숙련의 사다리를 빠르게 오르게 해야 한다. 대학-연구소-기업-공공이 사람을 서로 빌려 쓰고 공동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논쟁이 소모전에 빠지지 않으려면, 전환의 위험을 분산하는 보험과 보육·주거·이동의 실질 지원이 동반돼야 한다. 기술 전략의 속도는 인력 전략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다.
일곱째로, 정책은 실패와 수정을 기록하는 로그가 있어야 한다. 샌드박스는 시작점일 뿐이고, 목표는 제도화다. 출력 제한 시간, 송전망 연결 대기, ESS 화재 리스크와 사이클 수명, 슬라이스 품질과 사고 상관, 데이터 오탈자율과 개인정보 노출 빈도 같은 운영 지표를 공개하고 토론하며 고치는 절차가 있어야 신뢰가 쌓인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합의의 시간이 짧아진다. 무엇을 요구하며 무엇을 면제하는지, 누구에게 어떤 책임과 권한을 주는지, 문제가 생기면 어떤 순서로 대응하는지—정책은 흐릿한 이상이 아니라 또렷한 매뉴얼이어야 한다. 그 매뉴얼이 축적될수록 기술은 더 빨리, 더 안전하게 도입된다.
여덟째로, 지정학은 상수이자 배경음이다. 수출통제와 제재, 데이터 역외이전과 사법권 충돌, 표준과 특허의 전장, 해저케이블과 위성망의 장악—이 모든 것은 한국이 바꿀 수 없는 파도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파도 위에서 배를 고치는 법은 있다. 멀티벤더·멀티국가·멀티클라우드, 상호 인증과 공동 개발, 핵심 부품과 기술의 선택적 내재화, 대체 가능 경로의 계약과 테스트, 동맹과의 실무 레벨 정보 공유와 공동 조달—지루하지만 유효한 도구들이다. “국산화”라는 단어가 갖는 감정적 울림에 갇히지 말고, 바꿀 수 있게 설계하는 합리로 이동해야 한다. 국가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의 목록은 만들 수 있다. 그 목록이 협상력의 본체다.
아홉째로, 사회는 기술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를 조율해야 한다. 로봇과 AI가 돌봄과 의료, 제조와 물류, 공공 서비스에 들어올수록 책임의 귀속과 존엄의 보호, 데이터의 경계와 감정의 언어가 중요해진다. 기술 윤리는 별도의 덕목이 아니라 제품 정의의 일부, 계약 조항의 일부, 운영 체크리스트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안전과 공정성, 설명가능성과 추적성은 비용을 늘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리콜과 사고, 불신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보험이다. 빠르게 만들고 나중에 고치겠다는 태도는 초기에 속도를 주는 대신, 장기적으로 신뢰의 이자를 눈덩이처럼 불린다. 한국은 실험과 수정을 빠르게 반복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이제 그 재능을 윤리와 안전의 로그로 확장할 차례다.
마지막으로, 국가 전략의 핵심 문장은 “포트폴리오와 옵션”이어야 한다. 원전은 안전과 신뢰를 담보로 기저를 지키고, 재생은 속도와 규모로 탈탄소를 끌며, 가스는 유연성과 보험의 역할을 한다. 반도체는 메모리-패키징-시스템을 통합 설계하고, 배터리는 팩토리 운영체제를 표준화해 수출하며, 통신은 표준의 문장과 스펙트럼의 지도, 바다와 하늘의 경로를 다중화한다. AI는 데이터-컴퓨트-모델-플랫폼-제도의 다섯 겹을 누수 없이 엮고, 문화는 파이프의 규칙을 스스로 설계해 신뢰를 축적한다. 스타트업은 롱머니와 M&A, 조달과 규제가 여는 계단을 통해 스케일업으로 올라가고, 인력은 교육과 자격, 이동과 복지의 설계로 재배치된다. 이 모든 것의 바닥에는 “교체 가능성”과 “실패의 로그”가 있다. 바꿀 수 있게 설계하고, 고칠 수 있게 기록하라—작은 나라가 오래 살아남는 방법은 늘 그랬다.
한국은 이미 세 번의 거대한 실험을 통과했다. 산업화의 속도, 민주화의 합의, 디지털화의 조직력이 그것이다. 네 번째 실험은 지금 진행 중이다. 기술과 국가의 미래를 같은 문장 안에 놓고, 그 문장을 하나의 체계로 실행하는 일. 이 실험은 화려한 수사도, 단번의 쾌거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작지만 단단한 다리를 촘촘히 놓아 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친다. 파도는 계속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더 큰 배가 아니라 더 좋은 설계다. 선택지를 넓히고, 바꿀 수 있게 만들고, 실패를 값싼 학습으로 바꾸는 설계. 그 설계를 국가의 생활규칙으로 만들 때, 기술은 더 이상 위험이 아니라 힘이 된다. 한국은 빠른 나라였다. 이제는 오래 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래 가는 나라는 결국 더 멀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