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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적 분노, 한국의 생존 DNA를 다시 세우다

한국의 성장동력과 미래 전략을 걱정하다

by 드라이트리

한국 사회의 위기의식


한국 현대사는 언제나 위기와 함께였다. 개항기의 불평등 조약, 국권 상실과 식민지 억압, 전쟁과 분단, 압축 성장과 외환위기까지, 우리는 늘 생존의 벼랑 끝에서 다음 단계를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위기의식은 단순한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았다. 위기는 분노를 낳았고, 그 분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집단적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애국적 분노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급격한 고령화, 생산성 둔화와 사회적 양극화, 미·중 전략 경쟁 속 지정학적 압력, 그리고 기후·에너지 전환이라는 세계사적 과제가 겹쳐져 있다. 성장률은 2%대 초반으로 떨어지고, 잠재성장률마저 1%대로 전망된다. 더 이상 과거처럼 “수출만 하면 성장한다”는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사회 곳곳에서 불안과 피로, 그리고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분노의 성격이다. 그것은 과거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일 목표로 수렴되지 않는다. 청년층은 미래에 대한 기회 부족에 분노하고, 중장년층은 양극화와 고용 불안에 분노한다. 기업은 규제와 글로벌 경쟁의 압력에 좌절하고, 지방은 인구 소멸의 위협 속에 고립감을 느낀다. 분노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때로는 상호 갈등으로 번져 사회적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그러나 이 분노가 다시금 ‘애국적 분노’로 재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애국적 분노란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국가 공동체의 생존과 미래를 걱정하는 에너지다. 그것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집단적 문제의식으로 응집될 때 힘을 발휘한다. 산업화 시대의 분노가 가난을 이겨내는 동력이 되었듯, 지금 우리의 분노는 지속 가능한 성장, 사회적 포용, 기술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애국적 분노는 냉소와 체념을 뚫고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밀어 올린다. 그 에너지를 제도 개혁으로, 혁신의 촉매로, 그리고 사회적 합의의 불씨로 전환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다. 결국 애국적 분노는 한국 사회가 다시 한 번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역사


한국 사회는 위기를 단순한 위기로 두지 않고, 그것을 기회로 전환하는 독특한 DNA를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고 국민소득은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렀지만, 교육에 대한 집념과 공동체적 결속이 살아남아 미래를 준비했다. “배워야 산다”는 신념은 훗날 산업화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1960~1980년대의 산업화는 이 DNA가 본격적으로 발현된 시기였다.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국민 전체를 총력전 체제로 끌어들였다. 노동자는 밤낮으로 일했고, 해외 건설 현장으로 파견된 근로자들은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부모 세대는 자식 교육에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희생과 노력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분노와 맞물리며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한국의 생존 DNA는 바로 이 압축 성장의 경험 속에서 속도와 총동원의 힘을 핵심으로 삼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또 다른 시험대였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대량 실업, IMF 구제금융이라는 충격 속에서 한국 사회는 구조개혁이라는 생존 과제를 강제당했다. 금융과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고, 정보통신 인프라를 확충하며, 벤처 붐을 일으킨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초고속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한 IT 혁신은 한국을 디지털 강국으로 도약시킨 계기가 되었다. 위기 속에서 산업구조가 바뀌고 새로운 성장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이 DNA는 살아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메르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한국은 신속한 제도 대응과 기술 활용으로 주목받았다. 코로나19 초기의 진단 키트와 모바일 추적 시스템은 “위기 대응 속도”라는 한국형 DNA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과거처럼 노동력과 인구를 총동원하는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과거처럼 무한정 성장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압축 성장의 DNA는 단기간 위기 돌파에는 탁월했지만, 장기적 지속성과 사회적 합의를 담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은 새로운 생존 DNA 2.0을 구축해야 한다. 과거의 DNA가 속도와 총동원을 중심으로 작동했다면, 앞으로의 DNA는 지속성과 제도화를 축으로 삼아야 한다. 규제를 혁신하면서도 제도로 고정하고, 인재와 자본, 기술을 장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며, 사회적 신뢰와 포용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한국의 생존 DNA는 “빨리, 더 많이”에서 “지속 가능하게, 더 똑똑하게”로 바뀌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생존 DNA와 한국 비교


이스라엘은 태생부터 위기와 함께한 나라다. 건국 직후부터 전쟁과 테러,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이스라엘 사회는 국가가 무너지면 개인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존 본능을 공유해왔다. 이 위기의식은 단순한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와 문화, 산업 생태계 전반을 형성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생존 DNA는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군사 연구개발이 민간 혁신으로 흘러가는 구조다. 군대에서 개발된 기술은 곧장 창업 생태계로 이전되며, 이는 사이버 보안, 드론, 인공지능, 센서 산업으로 확산되었다. 둘째, 글로벌 시장 직행 전략이다. 작은 내수 시장은 기업들이 태생적으로 세계를 무대로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셋째, 실패를 관용하는 문화다. 끊임없는 도전과 재기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혁신의 위험을 줄여주었다. 넷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가 자본, 인재, 네트워크를 연결해 이스라엘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대비가 뚜렷하다. 한국은 압축 성장의 DNA 덕분에 위기의 순간마다 놀라운 속도로 대응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총동원, 외환위기 속 구조개혁, 팬데믹 시기의 신속한 방역 등은 모두 “속도와 집단적 집중”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위기의식을 제도와 문화로 영속화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규제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실패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도 부족하다. 대기업 중심 생태계는 민간 혁신의 다양성을 제약하고, 글로벌 시장 직행 전략도 스타트업보다는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이 대비는 한국이 앞으로 어떤 생존 DNA를 가져야 하는지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 더 이상 과거처럼 인구와 자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는 버틸 수 없다.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위기를 제도화된 혁신 동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규제는 단순화되고, 공공조달은 스타트업의 초기 수요를 만들어주는 장치로 활용되어야 하며, 실패를 관용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전이 끊임없이 시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생존 DNA는 안보 위기를, 한국은 경제 위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제어해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저출산, 저성장, 지정학적 압력이라는 복합 위기를 안고 있다. 이 위기를 단순한 생존의 시험이 아니라, 혁신을 영속화할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면, 한국은 이스라엘과 다른 방식으로 또 하나의 생존 DNA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전략: 미국의 한국 의존도 증대와 AI·전력·자본·인재 삼각편대


지금 한국이 처한 환경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출산·고령화, 생산성 둔화, 미·중 전략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밀려오며 기존 성장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생존 DNA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국가 전략의 근간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 핵심 축은 미국과의 산업안보 연계, AI·전력 인프라 강화, 자본 조달 구조 개편, 그리고 인재 파이프라인 확보다.


첫째, 미국의 산업안보 의존도를 한국에 묶어야 한다. 방산, 조선, 첨단 제조에서 한국이 이미 가진 세계적 경쟁력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미국은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한국은 안정적 수요를 얻을 수 있다. LNG 운반선, 차세대 친환경 선박, 유도무기와 반도체 장비 부품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전략적 조달 체계와 긴밀히 연결될 때, 한국은 단순 협력자를 넘어 안보 공급망의 핵심 노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둘째, 국내에서는 AI와 전력 인프라를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초대형 GPU 팜,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망, 액침냉각을 활용한 친환경 데이터센터가 결합된 Compute-Grid-Cooling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 체제는 AI 학습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제조·방산·바이오 등 핵심 산업의 혁신을 촉진할 것이다. AI 역량 강화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한국 산업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다.


셋째, 자본 조달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해외 자본은 초기와 중기 단계(Seed~Series B)에서 혁신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도록 문을 열고, 국내 자본은 Series C 이후 스케일업 구간에서 집중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해외 자본은 혁신을 발굴하고, 국내 자본은 확장과 안정화를 책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 세제 혜택, 상장 패스트트랙, 공공조달 연계 약정을 활용할 수 있다.


넷째, 인재 파이프라인을 확립해야 한다. 해외의 우수한 AI·반도체·방산 인재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비자·세제·주거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국내에서는 병역과 교육을 연계한 AI·사이버 전문 트랙을 도입해야 한다. 동시에 스타트업과 대학이 실제 데이터를 활용해 문제를 풀어내는 국가 단위 챌린지를 상시화하면, 우수한 성과는 곧바로 조달과 정책금융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미래 전략은 의존도 상승–인프라 강화–자본 선순환–인재 확보라는 네 개의 축이 맞물려야 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생존 DNA 2.0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애국적 분노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제도와 전략으로 응집될 때, 한국은 다시 한 번 “생존을 성장으로 바꾸는 나라”라는 정체성을 갱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브레이크넥이 말하는 방향 있는 가속이며, 한국이 세계사 속에서 또 한 번 기적을 써 내려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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