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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주권과 정보 패권의 전쟁

5G에서 6G, 위성 인터넷과 사이버 보안까지

by 드라이트리


한국에서 통신은 언제나 산업과 안보, 문화와 일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혈관이었다. 전자정부가 탄생하고, 전자상거래가 생활이 되었으며, 게임과 K-팝이 국경을 넘어 번지는 동안, 그 아래에는 늘 촘촘한 광케이블과 기지국, 라우터와 스위치, 데이터센터와 해저케이블이 깔려 있었다. 이 혈관이 막히면 국가의 여러 장기가 동시에 멈춘다. 전력망의 제어 신호가 흔들리고, 병원의 PACS가 멈추며, 공장의 MES가 데이터에 접근하지 못하고, 금융의 결제와 인증이 일시에 오류를 낸다. 그렇기에 통신 주권은 단순한 기술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누가 규칙을 쓰고, 누가 알고리즘을 배포하며, 누가 엣지에서 코어까지의 경로를 통제하는가가 결국 한 국가의 속도와 안전, 협상력을 결정한다.


이 주권의 첫 번째 층위는 표준과 스펙의 전장이다. 5G에서 6G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속도는 더 이상 유일한 슬로건이 아니다. 초저지연과 초연결, 테라헤르츠 대역 활용, 단말·엣지·코어 전 구간에서의 인공지능 기반 제어, 전파 환경을 학습하는 자가구성 네트워크, 네트워크 슬라이싱과 RIC(RAN Intelligent Controller)에 의한 동적 품질 보장까지, 네트워크는 하나의 거대한 소프트웨어가 되어간다. 여기에서 표준 문서의 한 줄, 특허 청구항의 한 문장은 수십 년짜리 수익과 운용권을 좌우한다. “세계 최초” 상용화라는 타이틀로는 충분치 않다. 제조사와 통신사, 반도체와 단말, 계측과 보안, 학계와 연구소가 한 몸처럼 움직여 3GPP와 ITU, O-RAN과 IETF의 문장 속에 자국의 알고리즘과 인터페이스를 파고들어야 한다. 표준특허가 늘어나면 장비와 칩, 테스트 장비, 인증 서비스까지 모듈별 파생 산업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자국 생태계가 네트워크의 ‘기본값’을 정한다. 반대로 표준의 바깥에 서면, 통신망을 많이 깔아도 남는 것은 남의 규칙을 빠르게 이행하는 숙련뿐이다.


두 번째 층위는 스펙트럼과 광의 정치경제다. 낮은 주파수는 멀리 가지만 대역폭이 좁고, 높은 주파수는 넓은 대역폭을 제공하지만 금세 사그라든다. 중대역은 두 장점을 절충하지만 사용 수요가 가장 치열하다. 주파수 경매를 단순히 최고가 낙찰의 재정 수단으로만 다루면, 사업자는 과도한 전파 사용료와 라이선스 비용을 요금에 전가하거나 커버리지 투자를 줄여 서비스 품질이 악화된다. 경매 설계는 가격만이 아니라 의무와 권리를 함께 베어링해야 한다. 농어촌 커버리지와 지하·실내 품질, 백홀 투자와 지연 보장, 기업전용·캠퍼스망 할당과 공공안전망 연동 같은 조건을 요금가이드와 함께 얹어야 한다. mmWave의 공간 감쇠와 간섭 문제는 교과서적 사실이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초고해상도 비전·스캐닝, AR/VR, 밀집 공연·스타디움, 철도·항공의 특정 구간에서 가치를 낸다. 특정 밴드는 실패했는가의 프레임이 아니라, 어디에서 비용 대비 효용이 최대화되는가의 프레임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광케이블은 또 다른 스펙트럼이다. 메트로·액세스 구간의 다심(多心) 광과 도심 MDU의 내부 배선, 재난 시 파손 복구 표준, 권역별 다중 경로와 링 토폴로지, 교차 접속(IX)과 캐시 노드의 지리 분산까지, 물리적인 길의 다양성이 곧 회복탄력성이다.


세 번째 층위는 바다와 하늘이다. 해저케이블은 인터넷의 국경선이고, 착륙국과 랜딩 스테이션은 정보의 세관이다. 특정 국가·사업자에 해저케이블이 집중되면, 단선·사보타주·제재의 위험은 단번에 국가적 리스크로 변한다. 중복 경로와 다국적 케이블 참여, 착륙국의 다양화, 육상 구간의 이중화와 실시간 라우트 재가공 능력은 교과서적인데, 실제로는 비용과 행정, 통관과 인허가, 토지 보상과 어업권 합의가 길을 막는다. 이 지루한 절차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통신 주권의 핵심 업무다. 하늘에서는 저궤도 위성이 지상망의 빈틈을 메우고 군·재난·해양·항공의 생명선을 제공한다. 그러나 위성망의 진짜 권력은 위성 그 자체가 아니라 게이트웨이와 지상국, 키 관리와 암호화, 라우팅 정책과 이용 약관에 있다. 글로벌 사업자의 손안에 있는 게이트웨이에 접속하는지, 자국 게이트웨이와 백홀을 통해 주권 하에서 트래픽을 흘리는지, 전시·재난 시 우선접속과 네트워크 격리, 킬 스위치와 백업 프로파일을 어떻게 설계하는지가 결정적이다. 우주망은 군사와 민간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국방과 과학기술, 민간 사업자의 삼각 동맹이 아니면 실효적 주권을 확보할 수 없다.


네 번째 층위는 사이버 보안이다. 네트워크가 소프트웨어화될수록 공격 표면은 넓어진다. 베이스밴드와 펌웨어, 라디오 유닛과 DU·CU의 컨테이너, 코어의 마이크로서비스, API 게이트웨이와 오케스트레이터, OSS/BSS와 인증 서버, 심지어는 라우터의 BGP 정책과 타임싱크까지, 어디든 침투 경로가 된다. 방화벽 하나 더 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공급망 보안과 서플라이체인 SBOM, 서명·검증·배포의 일관성, 침해가정(assume breach)과 제로 트러스트 아키텍처, 레드팀·블루팀의 정기적 합동훈련, 관제와 위협 인텔리전스 공유, 랜섬웨어 보험과 사이버 재보험의 가격 신호, 양자내성 암호로의 선제 전환 같은 전술이 이미 기본 교양이 되었다. 네트워크 슬라이스는 편의만큼 위험도 분할한다. 공공안전·산업제어·자율주행용 슬라이스가 소비자용 슬라이스와 사고의 상관을 낮추려면, 기술적 격리뿐 아니라 운영·변경관리·감사의 격리까지 갖춰야 한다. 엣지 컴퓨팅은 지연을 줄이는 대신 물리적 보안과 운영 복잡도를 높인다. 엣지 노드의 패치·키 회전·로그 보존·사고 포렌식·현장 교체 절차는 사람의 언어로 상세히 적혀 있어야 한다. 위험은 자동화로 줄이고, 자동화의 실패는 사람의 훈련으로 줄인다.


다섯 번째 층위는 플랫폼과 데이터다. 통신망은 도로일 뿐이며,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플랫폼이다. 앱스토어의 수수료와 정책, 검색과 지도, 동영상과 광고, 결제와 인증, 클라우드와 데이터 레이크—all of these가 외부 규칙을 따른다면 네트워크 주권은 껍데기다. 데이터의 주권은 서버 위치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어떤 동의로 어떤 용도에 얼마 동안 어떤 모델 버전으로 처리했는지, 삭제·이동·감사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 그리고 이 권리를 강제할 기술적·법적 수단이 있는지가 본질이다. 공공·금융·의료·교육의 핵심 데이터와 모델, 로그와 키, 정책과 감사 체계는 멀티 클라우드·멀티 리전·멀티 벤더의 설계로 ‘교체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 벤더가 흔들릴 때 다른 벤더로 일시 이전 가능한 설계, 특정 국가의 법·제재가 비화할 때도 최소 기능을 유지하는 설계가 협상력의 원천이다. 주권은 자급자족이 아니라 선택권이다.


경제·제도의 층위로 내려오면, CAPEX와 OPEX, 요금과 보조, 규제와 인센티브가 행동을 만든다. 망 투자에 대한 규제회계와 합리적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으면 기지국과 광의 증설은 느려진다. 반대로 무제한 가격 경쟁을 강요하면 품질 투자는 후순위로 밀린다. 망중립성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슬라이싱으로 품질을 보장하는 시대에 중립성의 정신—공정 접근과 차별 금지—을 유지하면서도, 공공안전·원격수술·산업제어 같은 고책임 트래픽에 우선권을 줄 정교한 규칙이 필요하다. 재난망은 상용망과 따로 가서 끊어지는 것보다, 상용망 위에 강력한 우선권과 프리엠션, 하든드 코어와 듀얼 홈을 얹는 방식이 더 현실적일 때가 많다. 농어촌 커버리지는 보조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지리적 신경망을 완성하는 일이다. 공공투자와 공동사용, 로밍과 다중도매, 광 백홀의 개방 접근 같은 설계로 망 외곽의 경제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통신은 제조·물류·방산·조선·철강 같은 한국의 근육과 직접 연결된다. 항만과 조선소, 조립공장과 탄광, 반도체 클린룸과 병원, 발전소와 철도차량기지에서의 프라이빗 5G/6G는 와이파이가 감당하지 못하는 안정성과 지연 보장을 제공한다. 실제 가치는 라디오보다 운영에 있다. 스펙트럼 할당과 면허 절차, 단말·AP·코어의 인증, 보안 정책과 로깅, 산업용 프로토콜과의 게이트웨이, 로컬 브레이크아웃과 중앙 모니터링, 유지보수와 SLA까지, 공장과 항만은 통신사를 작은 국가처럼 취급한다. 이때 오픈랜은 락인을 줄이고 혁신을 부른다. 그러나 부품의 수가 많아질수록 통합·성능·보안의 책임 소재가 흐려진다. 오픈의 이득과 책임의 분산 사이에서, 테스트·인증·통합의 전문 생태계를 키우는 것이 관건이다. 한국이 “공장을 짓는 나라”에서 “공장의 운영체제를 수출하는 나라”로 넘어가려면, 프라이빗 네트워크와 엣지, 데이터·보안·안전의 모듈을 하나의 패키지로 엮어 수출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통신은 그 패키지의 신경계다.


지정학은 이 모든 층위의 배경음이다. 특정 장비·칩셋·운영시스템·암호모듈이 제재나 수출통제의 대상이 되는 순간, 기술은 정치가 된다. 네트워크의 백도어 의혹과 법정의 공방, 국가 간 스파이 법의 적용, 데이터의 역외 이동과 사법권의 충돌은 더 잦아질 것이다. 동맹은 필수지만 종속은 위험하다. 멀티벤더·멀티국가, 상호인증과 공동개발, 조달의 분산과 핵심부품의 선택적 내재화는 보험이다. 모든 것을 만들 수는 없지만 바꿀 수 있게는 설계할 수 있다. 그 설계가 협상력을 만든다.


사람과 조직의 문제로 시선을 내리면, 통신 주권은 인력 주권이기도 하다. RF·안테나·광·반도체·프로토콜·보안·클라우드·분산시스템·데이터·오퍼레이션·정책—이것을 가로지르는 T자형 인재가 부족하다. 대학과 연구소, 통신사와 장비사, 클라우드와 보안기업, 공공과 군이 서로 사람을 빌려 쓰고 교육을 공용으로 설계해야 한다. 현장 오퍼레이터의 암묵지를 코드와 자동화로 끌어올리고, 코드의 오류를 현장의 위기대응 훈련으로 덮는 문화가 필요하다. 인증과 심사, 평가와 감사는 혁신의 반대말이 아니다. 잘 설계된 평가체계는 오히려 혁신의 속도를 높인다. 무엇을 통과해야 하는지 분명하면 시행착오의 비용이 줄기 때문이다.


끝으로, 통신 주권은 비용이 아니라 옵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형 벤더의 가격정책 변화, 특정 국가의 제재, 해저케이블의 파손, 데이터센터 화재,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의 결함, 글로벌 플랫폼의 약관 변경—이 모든 변수가 동시에 흔들릴 때, 내부에 남겨둔 기술과 인력, 절차와 표준은 최소 기능을 유지하게 해주는 보험이 된다. 반대로 내부에 아무것도 없으면, 외풍이 불 때마다 멈춘다. 옵션의 가치는 평소에는 과소평가되지만, 위기 때 국가의 생존 확률을 갈라놓는다.


요컨대 통신은 더 이상 통신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운영체제이며, 산업의 뼈대이고, 문화의 무대다. 한국이 앞으로도 빠르게만이 아니라 오래 버티려면, 보이지 않는 규칙을 스스로 쓰고, 보이지 않는 권한을 스스로 쥐어야 한다. 표준의 문장 속에 자신의 알고리즘을 심고, 스펙트럼과 광의 지도를 사회적 합의로 그리며, 바다와 하늘의 경로를 다중화하고, 보안을 운영의 기본값으로 내재화하고, 데이터의 권리를 계약과 코드로 보장해야 한다. 자립과 고립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동맹과 협력의 지렛대를 최대화하는 영리함, 한 벤더·한 플랫폼·한 경로에 묶이지 않는 교체 가능성, 실패와 수정을 기록하며 제도로 환원하는 근면함—이 세 가지가 통신 주권의 내용이다. 총과 탱크의 시대가 갔다면, 이제는 전파와 프로토콜, 경매 규칙과 암호 키의 시대다. 한국은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빠르게 다루는 훈련이 되어 있다. 그 훈련을 주권의 언어로 정리할 때, 네트워크는 더 이상 위험이 아니라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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