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을 일깨워주는 매개체
장난감을 가지고 논 마지막 기억이 언제였을까.
누군가에겐 인형이었고, 누군가에겐 로봇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장난감을 쥐고 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장난감은 서랍이나 기억의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하지만 장난감과 함께했던 시간의 감각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집중하고, 몰입하고, 깔깔 웃고, 무언가를 향해 쏟아붓던 그 짧지만 선명한 시간들.
한때 종이박스를 잘라 병뚜껑 바퀴를 달고, 볼펜 용수철을 앞면에 붙여 만들어낸 자작 장난감 하나로도 하루가 짧았던 소년이 있었다. 그 아이는 손바닥만 한 로봇을 방 한가득 상상력으로 움직였고, 놀이란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는 행위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소년은 자라 한 고양이의 집사가 되었다. 그 고양이는 낚시장난감을 유난히 좋아했다.
줄 끝에 달린 깃털이 바닥을 스치면, 몸을 낮추고 수염을 살짝 떨며, 꼬리를 수평으로 뻗고 눈을 반짝였다.
남자가 낚시대를 들어 살짝 흔들자 깃털은 허공을 가르며 회전했고, 보리는 타이밍을 재다가 순식간에 점프했다. 짧고 민첩한 움직임, 그 순간의 집중. 고양이는 장난감을 두고 사냥꾼이 되었다가, 무용수처럼 몸을 휘돌렸다.
아내는 단순한 방식으로 놀았다. 깃털을 보리 눈앞에서 휘저었고 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했다.
반면 남자는 온방을 돌았다. 침대 아래로, 소파 위로, 때론 손이 닿지 않는 틈새나 보리가 올라가지 못하는 책장 위로 장난감을 숨겼다. 깃털은 때로 먹잇감이 도망치듯 빨랐고 때로 도발적으로 멈췄다가 다시 휙 하고 날았다. 보리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몸으로 덮쳤으며, 그 모든 시간 동안 사냥을 한 것 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20분쯤 지났을까.
보리는 결국 바닥에 철퍼덕 옆으로 누웠다. 몸이 부풀듯 숨을 들이쉬고 다시 길게 내쉬었다. 작은 혀끝이 살짝 나왔고 이따금 다리를 움찔거리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도 창과 벽을 넘나들던 사냥꾼의 자리는 이제 조용하고 숨 가쁜 고양이 한 마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난감 하나로, 그렇게 웃고, 집중하고,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기했고 조금은 고마웠다. 고양이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놀이는 항상 ‘지금’에 있고, 보리는 지금을 살아낸다. 그 집중력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현재로 끌어당긴다.
사실 장난감이란 단어는 어릴 적을 환기시킨다. 남자의 종이박스 로봇처럼, 그 시절은 비록 부족했지만 상상력과 기쁨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이 지금 보리에게 깃털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다른 종이지만 놀이에서 느끼는 설렘과 몰입은 다르지 않았다. 그 감정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고양이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놀이의 마법이었다.
고양이의 놀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본능을 풀고 에너지를 해소하며,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신뢰를 쌓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은 고양이의 숨결과 움직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손끝으로 전해지는 마음과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가 있었다. 놀이를 마치고 고양이가 몸을 웅크릴 때 방 안의 시간도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춰 있었다.
보리는 아내의 다리 위에서 낮은 숨을 몰아쉬며 잠이 들었다. 부부는 조심스럽게 보리의 등을 쓸었다.
깃털도, 낚시줄도 한쪽에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평화로웠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