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 이야기하라면 한참을 주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스멀스멀 떠오르는 여러 장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어둡고 우울한 장면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장면들은 붙잡지도 못하게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힘들고 괴로웠던 장면들은 두고두고 기억 속에 저장되어 다시 되살아나곤 했다. 그런 장면들을 갑자기 풀어놓기엔 당연히 주저할 수밖에 없다. 좀비 같은 기억들은 접어두고 산뜻한 장면을 하나 골라보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며칠 전 싸이월드의 재오픈 소식을 접하고 확인했다. 컴퓨터로 접속해서 글과 사진들을 확인하며 많지도 않은 인맥관리를 해오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덧 손바닥 안에서 어플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튼 싸이월드를 접한 첫날에는 사진첩이 업로드가 되지 않아 아쉬움이 컸지만 다음 날이 되자 사진만큼은 거의 복구가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훑어보는데 그때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다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의 장면들이 머릿속 필름을 통해 영사되기 시작했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 힘으로 돈 벌어서 사고 싶은 거 사고, 놀러 가고 싶으면 여행 가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사고 싶었던 안경과 털 재킷을 장만할 수 있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여느 학생들처럼 부모님께 용돈 받으며 학교매점이나 편의점에서 군것질하는 것이 낙이었는데 비공식적으로 경제적 독립을 일구어내기 시작했다. 스포츠머리에 1도 꾸밀 줄 모르던 내가 일순간에 확 달라진 모습이 되자 한 친구는 경악(?)하며 찍어 줄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평소엔 관심받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는데 지금의 말마따나 '내 돈 내산'의 첫 일례였기에 딱히 싫지도 않았다.
너도 이렇게 바뀔 수가 있구나~ 다른 사람 같다~
며칠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정말 이 말들을 많이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잠들어 있던 내적 자신감이라는 녀석이 꿈틀거렸다. 겉으로는 별거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깨뽕이 우주까지 승천할 정도로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스스로를 뿌듯하게 생각했던 적이 없어서인지 더욱 그런 감정들이 벅차올랐던 것 같다. 힘들게 일하고 수중에 쥐어지는 몇십만 원이 '나도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준 자체만으로도 인생에 다시없을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한 달 한 달을 살기에 급급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예상치 못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용돈 살 이하고 있을 것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어른의 모습이 훅 치고 올라왔다).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 지출이 줄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 확실히살아내는 게 쉽지 않다. 월급날의 기쁨은 무뎌진지도 오래되었다. 월급통장의 밀물 썰물은 직장인의 전통이자 국룰아니던가.
변화를 찾으려면 쓸모 있는 지출을 해야 하고 변화하지 않는 인생은 스스로를 정체시킨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막상 쓰고 나니 처음엔 산뜻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현실 자각을 하고 있다. 그땐 그랬지 하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날과 지금을 무의식 중에 비교하며 쓰고 있다. 덕분에 잊고 있었던 19살을 회상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이 뒤덮고 있을지라도 정리되지 않은 서랍 속 귀중한 물건은 꼭 하나쯤 발견되듯이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쯤은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씩 앨범을 펼쳐보듯이 기억이 글이 되면 나이가 한참 들어서도 오늘을 펼쳐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