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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스리랑카 Jun 30. 2020

굿바이 메이텍

어느 늙은 통돌이의 고백 ... 반 평생 함께한 세탁기에 바치는 헌사​

1995년 늦가을 캐나다 밴쿠버 서리 가전 매장을 통해 이 집에 팔려왔다. 아니 입양되어 왔다. 햇수로 25년째. 젊은 주인 내외와 사내아이 둘이 전부인 비교적 단출한 가정에 입양된 나를 영어권에서는 '워싱 머신' 또는 브랜드명 그대로  '메이텍'으로 불렸고 한국에서는 '세탁기' 또는 애칭 '통돌이'로 불리는 빨래 기계가 사실은 내 본적이다. 다행인 것은 한날한시 '드라이어' (빨래 건조기)도 같이 입양되어 항상 세트로 일을 나누는 파트너가 있었다. 우린 선배 기계들의 견고한 전통을 이어받아 평생을 잔고장 없이 이 집의 온갖 세탁물을 빨고 말리고 하면서 가사에 일조를 해 왔다. 특히 안주인의 각별한 총애가 우리의 사기를 고무시켜 어떨 땐 연속 5~6회의 과중한 주문에도 끄떡 없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 젊은 날 회상은 지금도 자랑이다. 물론 내 두뇌인 강력 모터가 벌겋게 달아 한참을 식혀야 했지만 젊은 날 그때는 정말이지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돌리고 또 돌렸다.


우리라고 재난이나 환난이 비껴가지를 않는다. 팔자 사나운 물건들을 보면 이리저리 팔리고 굴러다니다 급기야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형체도 없이 갈가리 찢겨 생을 마치는 경우도 허다한 이곳 세계이다 보니, 나야 한 집안에서 대우받으며 평생을 보낸 범생이 통돌이라고 해도 불안함은 늘 가시질 못한다. 우리에게 일차 환란이 찾아온 것은 주인 내외의 급작스러운 한국으로의 '역이민'이 결정되면서 안락한 터전을 떠나 컨테이너에 실려 망망대해를 건너 한국 땅에 이주를 시작했다. 낯선 땅 코리아는 여러모로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예를 든다면, 니플의 규격이 달라 수도 파이프에  연결 또한 일거리가 되었고, 주기적으로 교체가 필요한 간단한 소모성의 부품도 규격이 틀려 잘 닦고 조여 쓰는 수밖에 없는 궁색함에 시달리긴 했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별다른 실수 없이 스물다섯 해를 버티어 왔다. 아직도 내 자랑이긴 하지만 경쾌하며 역동적인 기계음은 젊은 날에 비교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특별히 안주인은 나의 우렁찬 빨래 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두 번째 환란이 닥친 것은 참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참사를 불러왔다. 즉  주인 내외와의 영원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인만큼이나 나 역시 노쇠한 몸이라 언제 망가져 손을 놓을지 기약하지 못하는 처지라 해도 이별은 예측하지 못하는 시간에 찾아오는 법. 별반 사람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 내외가 사는 곳에 ( 주인 내외의 집은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중소도시 구 도심 달동네에 위치해 있다)  도시가스를 들이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면서 사단이 예고되었다. 나야 가스하고는 무관한 태생이지만 나의 파트너 '빨래건조기'는 가스를 먹고 일하는 처지이다 보니 '가스 안전 공사법'에 의해 검증받지 못하는 제품은 세상 제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도시가스를 밥으로 먹을 수 없는 규정에 묶여 연결이 불허되었다. 주인 내외는 며칠을 궁리 끝에 비장한 결단을 내린다. 


'오늘부로 세탁기와 그의 파트너 빨래 건조기의 동시 명예퇴직을 명함'.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집을 떠나왔다. 결코 나 세탁기와 건조기는 뗄 수 없는 사이라고 판단하여 내린, 권고사직인 셈이다. 떠나기 전날 밤 묵은 빨래들을 마지막으로 그들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피니시 스핀을 돌며 나의 숨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안주인은 내게 나지막이 작별 인사를 건넨다. 메이텍 ~그동안 수고했어~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은 행복했다. 부디 바라건대 아프지 말고 새집에서도 사랑받기를... 고맙다 메이텍이여 안녕..!!       

 나이가 들수록 당신들의 자신의 몸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미래를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새로 입양될 새로운 시골집에서 뒤뜰의 무성한 나무들의 속삭임과 함께 이 풍진세상을 마감하고 싶을 뿐. 




                  1893년도 초창기 모델            사진 Wikipedia

메이텍 코퍼레이션은 1893년 미국 아이오와주 뉴턴에서 Frederick Louis Maytag에 의해 설립되었다. 세계 최초로 전기를 이용한 세탁기를 개발하였다. 그 뒤 세탁기 시장을 평정하고 90년대에는 북미 시장 점유율이 70%에 육박하는 성장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이 느렸는지 급기야 2006년 월풀 코퍼레이션 그룹에 먹혔다. 이제는 그저 그런 회사로 현재를 연명하고 있다. 망한  메이텍 세탁기의 죄가 있다면 그 이유의 첫째는 단언하건대, 무식하리만치 '견고함'이라는 덕목에 발목이 잡혔다는 점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으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에이에스 기사들이 할 일이 없어 실직 대상이 되었다니 망한 이유가 찬란하다. 너무 물건을 잘 만들어도 병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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