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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스리랑카 Apr 03. 2020

다시 한국에서

커피 트라우마

스타벅스 매장이 불과 집하고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허름한 이 동네에 이주한 이 몸은 6년 차 고참이고 스타벅스는 겨우 2년 남짓 신참이다 보니 스타벅스가 나를 따라왔다고나 할까, 번잡한 다운타운을 두고 이곳에 왜, 왜 왔는지 아직도 그 연유를 잘 모른 채 어쨌든 전 세계 넘버원 커피를 곁에 두고 있다. 어제, 늦은 아침을 준비하다 커피가 떨어진 것을 발견, 순식간에 자전거를 밟아, 매장으로 달려간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신선한 원두를 공급받고 있으니 친구 하나는 잘 두었다. 원두를 사들고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로지르면서 까닭 모를 행복감에 젖어 자전거 핸들의 양손을 하늘로 높이 쳐들며 언덕길을 쏜살같이 달려본다. 그러다 곤두박질을 친다 해도 이보다 더 짜릿하고 두려운 커피 맛은 세상 천지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의 커피 이력은 화려하면서 또한 슬프다. 천년 단위가 바뀐다고 작은 난리를 치던 2000년의 밀레니엄이 시작하기 수년 전, 이제는 보통 명사가 되어버린 '에스프레소' 커피를 선보이겠다고 스타벅스를 벤치 마킹해 커피 장사를 시작했다. 거창하고 장대하게 시작한 커피 장사는 곧이어 불어닥친 난관에 엎어져 근근이 기사 회생을 꿈꾸며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으며 몸부림을 쳤으나 결국, 단 한 곳의 분점도 출점하지 못한 채 10여 년 만에 매장을 접었다. 한국의 에스프레소 커피 시장은 아직은 시기 상조라고 스스로의 무능한 경영 능력을 감춘 채 커피를 잊고 살았다. 처리하지 못한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원두와 함께 이곳저곳에 멸문한 커피 장치들이 더더욱 커피 맛을 잡치게 만들던 지난 시간들이 나의 애증 어린 커피 트라우마이다. 


 이제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확신을 받았다. 그 이유는 우습게도 그 옛날 커피 장사로부터 시작된 빚이 제로가 되는 순간에 찾아왔다는 점이다. 집을 저당잡아 마련한 채무의 만기상환을 따져보니 아직도 15년이 남았다. 언제까지 이놈의 웬수를 껴안고 살아야 하나.. 다행히 마지막 은행 채무를, 비록 만기가 차지 않은 보험이지만 해약하여 상계하면, 그런대로 제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손에 잡혔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풍진세상을 만나고 보니 빚 없는 세상에서 단 며칠이라 해도 소박하게 살아야겠다는 소심한 일념이 간절하게 다가온 날, 드디어 일을 저지른다.'손해가 많을 텐데..' 하며 연신, 해약을 말리던 보험 상담사에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건넨 해약의 변은 이러했다." 맛있는 커피가 그리워서요.."




   

오랫동안 볼모로 잡혀있던 안쓰러운 소유권이 되돌아오고, 명목상 빚이라는 부담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세상에 진 묵은 빚은 그대로이다. 더 열심히 사랑하지 못한 빚, 더 열심히 함께 하지 못했던 빚, 더 열심히 관심을 갖지 못했던 소외된 벗들에게 진 빚, 그리고 무엇보다도 징징거리며 원망을 늘어놓던 지난날에게 진 빚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 지긋한 전쟁도 언젠가는 끝이 보일 것이다. 환란이 깊어 갈수록 스스로에게 인색했던 위로와 격려를 위해 격렬하게 세상 빚을 갚아야 할 차례가 왔다. 벗들의 건투를 빈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신비의 보드카를 챙겨왔다. 이 보드카는 술맛이 기가 막혀 몇 잔만 들어가면 저도 모르게  취기가 사뿐히 올라 말주변 없는 자가 말문이 트여 허장성세가 산을 찌르고, 용맹 없는 자가 장마철 물꼬가 터진 듯 허풍이 세지는 술이다. 이 술과 함께한다면 몽골에서의 무용담도 진짜처럼 둔갑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물 건너 가고 말았다. 이 코로나와의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한 약속,  '조만간 한잔하자' '곧 좋아지겠지 그때 보세' '수선화 피면 ..' 기약은 허망하게 흘러가고 무심한 수선화는 꽃을 피운지 벌써인데 벗들은 보이질 않는다. 신비의 몽골 보드카마저 맹랑한 마력을 잃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벗들아 이 전쟁에 지지 말고 잘 버텨라. 무슨 일이 있어도 신비의 보드카는 목숨을 걸고 잘 지키고 있겠다. 그때까지 살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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