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 스리랑카 Jan 19. 2021

노가다는 나의 벗

파미르를 꿈꾸며 노가다 현장에서



 노가다 판에 발을 들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선생 찾는 곳은 없고,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노가다 판을 기웃거린 덕에 드디어, 지난해 10월 5일부터 12월 29일까지 장장 3개월여를 산속에서 벌어먹었다. 시청 산림과의 '인화물질 제거반' 모집에 응시하여 서류 심사, 면접, 신체검사를 거친 당당한(?) 출발이었다. 벗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족을 달자면 '인화물질'이라 함은 말 그대로 '불씨'가 될만한 모든 것 중 특별히 산과 100m 근접한 농산물의 잔해, 즉 가지친 과수목, 들깨, 참깨, 고춧대, 콩대, 등등 농업 부산물을 말한다. 또한 '제거'라 함은 산림과 인접한 농업인들이 임의로 소각하지 못하게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대안으로 일당직 잡부들이 친히 농가를 방문, 파쇄기를 돌려, 콩깍지 수준으로 아작을 내어 밭에 뿌려 놓는 일이 그것이다. 임금은 좀 그렇다. 굳이 밝히자면 1일 8시간 기준 68,720원으로 참으로 소박하다.




아침이면 부산히 도시락을 챙기고 소방을 상징하는 주홍색 작업복을 입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굳이 사무실이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시청의 잡부들은  작업 차량 윈도우 브러시에 걸쳐있는 출근부에 날인을 하고 지정된 사륜 차량에 탑승, 작업 장소로 이동을 시작한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든 말든 시월은 좋은 계절. 어디를 가나 따스한 햇살은 눈부시고 산천은 더없이 평화롭다. 이곳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 달콤함은 결코  없다는 듯 달달한 맥심 봉지커피로 하루가 시작된다. 이윽고 작업반장의 시작을 알리는 사인과 함께 요란한  파쇄기의 시동이 걸린다. 파쇄기는 유압으로 육중한 칼날을 돌리며 입구로 들어오는 그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해 치운다. 잠시, 고속으로 돌아가는 칼날의 번뜩이는 섬광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안전을 위하여!' 잡부들은 하이 파이브를 외친다.




그 좋던 가을이 가고 산중에는 겨울이 왔다. 버적버적 얼어버린 들깨단들과 함께 잡부들도 얼어 버린다. 먹물 티 좀 내려고 배낭 속에는 도시락과 함께 읽을거리를 챙겨 다녔는데 웬걸, 바람 불고 눈발 날리는 산중에서 책을 펼치기는 사치스러운 일, 어느새 따근한 한 잔 소주에 먼저 손이 간다. 이제 슬슬 하산할 때가 오는가 보다. 오늘이 며칠 째이던가 남은 날 수를 세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드디어 작업 종료일이 왔다. 코로나의 여파 때문인지 아님, 원래 그렇게 끝나는 것인지 공무원 나리들은 코빼기도 뵈지 않은 채 잡부들끼리 악수만 나눈 채 끝이 났다. 싱겁다면 싱거운 해단식인데 왠지 모르게 먹먹하다. '노가다는 원래 그런 법이여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잡부 동료들은 서로에게 위로의  맞장구를 친다. 갑자기 파미르가 그리워 미치겠다.  





 서둘러 떠났다. 노가다판 해단을 자축하면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유례없는 한파에 범벅이 된 눈발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바다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그럼에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하루 할당량 미니엄 15km를 정해놓고 걷는다. 마치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 걷고 또 걷는다. 한때 눈발이 주춤하면서 잠시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선술집'이 들어설 자리였다고. 쓸쓸한 부둣가 곁, 인생 비관자가 마지막 잔술을 들이켜고 뛰어들기 무섭지 않은 적당한 장소. 역설적이지만 그곳에서 차갑고 맑은 소주를 한 잔 걸치니 힘이 솟는다. 그리고 주유를 마친 자동차처럼  또다시 시동을 걸고, 걷고 또 걷는다. 파미르 쿤자랍 고개를 넘는 상상을 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굿바이 메이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