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희(驪姬)와 진헌공(晉獻公) 이야기
여성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현실에서 여성은 애초에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고 어떤 위상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고대 동아시아의 가치체계는 하늘과 땅의 귀신에 대한 다양한 믿음체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삶에 대한 열망을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신(神)의 모습으로 투영하는 인간화, 정치화의 특징을 지닌다.
신의 인간화, 정치화는 신과 인간이 교감을 위한 매개자로서 무(巫)의 존재를 출현시켰고, 무의 용어 자체가 신성(神聖)의 매개자로서 여성(女性)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고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에토스(Ethos)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어떠한 장애나 편견 없이 고정되었음을 시사한다.
무(巫)의 용어 자체가 신성의 매개자로서 여성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미 삶의 출발에서부터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독립적으로 존재했고 신의(神意)의 해석능력이 아니라 삶의 패턴을 파악할 수 있는 합리성(合理性)에 기인했음을 주의해야 한다.
상기한 동아시아의 에토스는 역사과정에서 하·은·주 삼대의 정치를 겪으면서 주례(周禮)로 정합되었고, 주의 종법질서에서 종주(宗主)를 근간으로 하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질서의 형성을 찾을 수 있으며, 춘추(春秋)시대로 전개되면서 공자(孔子)에 의해 『春秋』의 편찬과 원형적인 유가적 가치체계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인식도 이에 포섭되는 과정을 보인다.
예를 들어 『尙書』「牧書」에 소개되는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정벌하기 위해 목야에서 제후들에게 “옛사람 말에 암탉은 아침을 알리지 못한다, 암탉이 아침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고. 지금 상나라 임금 수는 오직 여인의 말만을 듣고 있소”라고 은나라 주왕이 달기의 미모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죄를 응징할 것을 합리화하는 대목은 왜곡된 여성 폄하의 출발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하나는 여성을 암탉에 비유해서 암탉의 본래적 속성이 울지 않으며 우는 암탉의 존재는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은나라 주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는 책무이행의 나태함을 응징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주 무왕의 혁명은 여성의 역할과는 무관하게 통치자의 태만과 책무불이행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행된 것일 뿐이다.
상기한 해석이 타당한 것일까? 오히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가적 가치체계는 공자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 유가적 가치체계가 아닌 원형적인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자가 편찬한 『春秋』는 그 안에 역사 속의 인간의 모습을 원형적인 모습 그대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여성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서도 본래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春秋』의 해석서인 『春秋左氏傳』은 항상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존재와 그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실제 생각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가적 가치로 재단된 여성상이 아니라 적극성, 진취성, 개별성을 지닌 행위자로 소개하는 동시에 소극성, 수동성, 피해자의 양상을 교차시키고 있다.
이후 동아시아의 고정된 전통적인 여성상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는 수동적 존재로 고착시키기 위해 여성의 차별화를 정당화하고 여성의 순종적 태도와 덕목을 강조하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체계를 완성하여 여성의 존재와 기능을 하위질서로 인식하게끔 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소개할 시대를 돌파한 남자의 여자들에서는 보다 진취적이었고, 적극적이었으며, 자신의 확고한 신념 하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냉정하게 판단함으로써 주체적인 존재로서 등장하는 여성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것도 로맨틱한 남녀 관계에 놓여 있으면서도
먼저 각성하고 행동했던 여성들이다.
춘추시대를 주름잡았던 패자 제환공의 시대에 이어 진문공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바로 그 주인공인 진문공을 만든 결정적인 인물은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바로 진문공의 아내들이다.
물론 여기에서 아내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문공의 기나긴 망명생활 중에 인연을 맺은 여성들, 그리고 혼인관계에 있었던 여성들을 지칭하는데, 춘추시대의 풍속이나 왕족들의 혼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규범이나 관례와 약간 결이 다르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진문공은 30여년의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여 모국의 왕이 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정말 짧고 굵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문공에 대한 평가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단 진문공이 왜 오랜 망명생활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진문공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참담한 망명생활을 출발한 근본적인 원인제공은 그 아버지인 진헌공이었다. 원래 진나라는 주 왕실의 북방지역을 담당하는 번병국가의 역할을 했다. 진나라와 주왕실 사이에 우나라와 괵나라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훗날 순망치한의 고사를 만들어 낸 주인공들로, 간단히 말해 주 왕실의 북방지역을 최전방에서 진나라, 중간이 우나라, 최후방이 괵나라로 삼겹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천자가 머무는 주 왕실의 신임도 괵나라-우나라-진나라 순이었다. 제환공 시절에 진나라의 군주는 진헌공인데, 이 인물이 훗날 춘추시대의 운명을 결정한 진문공의 아버지이고 진문공이라는 패자를 등장시킨 원인제공자이다.
진나라가 북방 최전방을 막고 있던 나라이지만, 그 지역이 태행산맥이라는 산악지대였기에 국가의 규모가 크지 않고 확장을 하기가 어려운 위치였다. 좌우로 뻗어나갈 수 없으니 위아래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는 셈이고 그러면 자기가 모시고 있는 주 왕실을 향할 수밖에 없으니 원천적으로 강대국이 되기에 한계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제환공이 규구의 회맹을 가질 당시 진헌공 역시 조금씩 자신의 야심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진나라와 헌공은 절대 패자인 제환공과 대적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제환공이 규구의 회맹을 개최해서 각 지역의 제후들이 여기에 참석하는데 진헌공도 역시 참석하려고 길을 나서는 상황에서, 진헌공이 늑장을 부렸던 것인지 아니면 산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는지 결국 회맹이 다 끝나고 제후들이 각자 해산하는 도중에 만나게 된다. 회맹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진헌공이 내친김에 잘됐다 싶게 다시 진나라로 돌아가는데, 내키지 않은 회맹참석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패자에 대한 복종의 태도도 의심받지 않았으니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여기서 진헌공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볼 수 있는데, 개성이 강하면서도 자신의 심중을 드러내지 않는 교활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아버지의 무공의 아내로 제환공의 딸인 제강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이 사람과 내통해서 결국 아들을 하나 낳는다. 태자 신생인데 그 뒤로도 융족의 호희에게서 중이를 낳고 자생에게서 이오를 낳는다. 물론 정비인 가나라 출신 공녀와 사이에는 소생이 없다는 점을 앞으로 주목해야 한다.
진헌공의 복잡한 사생활과 정치적 야심 사이의 관계는 나중에 비극을 가져오고 그 최종결과는 바로 진문공의 등장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진헌공은 북쪽지역의 영토확장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여융이라는 주변지역을 정벌하고 여융의 남작이 화친의 표시로 두 딸을 바쳤는데 언니가 해제라는 아들을 낳고 동생이 탁자라는 딸을 낳는다. 이 과정을 주목해보자.
왠지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우선 이미 얻은 세 아들들, 신생, 이오, 중이는 모두 장성한 아들들이고 신생을 태자로 삼았다. 그런데 여융에서 여희를 얻게 되어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진헌공의 행동을 신하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오히려 신하들이 극력 반대한다. 그 이유가 뭘까? 기록을 보면 진헌공이 여희를 부인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반대하자 결국 신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점을 쳤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거북점을 치니까 불길했고 산가지 점을 치니 길했다고 한다. 진헌공이 산가지로 친 점을 따르겠다고 하자 거북점이 잘 맞으니 이를 따르니만 못하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지만, 결국 진헌공은 복인을 죽이고 뜻을 관철한다.
왕의 혼인이라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이 발생하는데 한편으로 왕이 그러겠다고 하면 과연 말릴 수 있었을까? 점까지 쳐가면서 왕과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네 마네 하는 장면은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사실 코미디의 요소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엄청난 긴장과 비극을 안고 있는 코미디인 셈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신하들이 반대했던 것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미 태자가 책봉되어 있고 장성한 아들들이 줄줄이 있는데도 진헌공이 데려간다는 여희는 북쪽 오랑캐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이미 미래권력 구도가 잡혀 있는데 정치적으로도 별다른 힘이 없는 변방국가 출신의 새로운 부인이 들어와 아들이라도 낳을 경우 후계구도가 완전히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왕이 하겠다는데 노골적으로 반대할 순 없으니까 점을 쳐서 신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진헌공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을 이용한 것이었고, 진헌공의 노림수가 훨씬 고단수라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굳이 아들을 얻기 위해 새로운 부인을 얻거나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력국가와 혼인을 맺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하들과 대립해가면서 여희를 데려가려고 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심찬 군주로서 진헌공 입장에서 이미 후계구도가 만들어진 상황을 타개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이미 후계구도에 따라 정열되어 있었다면 진헌공 입장에서는 권력누수가 발생하고 있었을 것인데, 만약 새부인을 얻어 거기에서 아들을 낳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경우 신하들의 견고한 권력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물론 진헌공은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의도를 간파한 신하들 입장에서도 새로운 여희의 등장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로 작용하기에 일단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양자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동의한 것은 신의 뜻이고 여기에서도 신의 뜻이 진헌공을 비켜가지만 진헌공이 자신의 의지로 신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신하들에게 보여준 셈이다.
진헌공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럼 여희는 궁궐로 들어와서 아들을 낳았으니 일단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게 하려면 한참 늦은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 모종의 음모라도 꾸며야 할 판인데 어떻게 했을까? 보통 궁중사극에서 나오는 시기, 질투, 음모, 협박, 누명 등 전형적인 스토리가 준비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의 기획은 사실 진헌공이 꾸미고 여희가 조연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역사기록에서는 여희가 들어와서 장성한 세 아들들을 결국 쫓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것은 냉정하게 보면 여희 혼자만의 기획과 실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변방출신인 여희가 아무리 궁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궁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기란 정말 어려웠을 것이고, 게다가 장성한 세 아들들과 권력투쟁을 한다는 것은 한명도 버거울 판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간 신경전을 생각해 보면 결국 장성한 왕자를 이겨내기 어렵고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여희를 편들어 줬을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장성한 세 명의 왕자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왕 진헌공이다.
진헌공이 여희와 함께 자신의 아들들을 쫓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진헌공은 세 아들들을 변방지역에 포진시켜 국방을 담당시킨다. 물론 당시 진나라의 국력으로 보면 크게 2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데, 1군을 진헌공이 갖고 2군을 태자 신생이 갖고 곡옥이라는 자신들의 조기지지에 주둔시킨다. 태자 신생은 일대의 기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르는 무리도 많고 진헌공 입장에서 미래권력에 대한 열등감까지 가졌던 것 같다.
결국 태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을 꾸미게 되는데 적인들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주고 좌우색깔이 다른 옷 한 벌을 내려주고 금으로 된 결을 하나 하사한다. 사실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는데 그 뜻은 태자에게 네가 잘해도 죽고 못해도 죽고. 난 너에 대한 생각이 차갑다는 의미라고 한다. 신생은 죽거나 살거나 하는 심정으로 적인들을 소탕한다. 이렇게 나라를 위한 큰 공적이 있는 이상 태자를 몰아세워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 된다. 그래도 진헌공은 태자를 궁지에 몰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여희가 태자에게 임금께서 꿈에 제강을 만났다고 하니까 네(태자 신생) 어머니가 뭔가 불편한지 모르니 빨리 제사지내라고 독촉한다. 이 대목에서 진헌공은 슬그머니 빠지고 사냥을 나간다. 그리고 태자가 제사를 지내고 제사음식을 궁으로 보내는데, 6일 동안 보관했다가 돌아온 진헌공에게 독을 타서 주자 헌공이 이 음식을 땅에 제사 지내려고 뿌리니까 땅이 끓고 개에게 주니 개가 먹고 죽어버렸으며 시중드는 신하에게 주니 신하 또한 넘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진헌공이 크게 노하고 태자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자 주변 측근들의 망명 조언에도 불구하고 태자 신생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서 망명하면 정말 자신이 음모를 꾸민 셈이 되고 불효하게 된 셈이라 고개를 들 수 없고 아버지에게 억울하다고 하자니 이미 길길이 날뛰고 있는 아버지의 분노에 의해 죽음을 당할 운명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결국 신생은 목을 매어 죽는다.
태자 신생의 자살과 함께 나머지 두 왕자, 중이와 이오의 운명은? 여희가 진헌공에게 두 공자도 이미 태자의 역모를 알고 있었다고 참소를 했고 이 둘은 소환명령을 받는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형처럼 죽을 운명이 되어 버렸는데 형은 그렇게 죽었지만 이 두 왕자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결국 두 왕자는 진나라를 탈출해서 망명길에 오른다. 처음 망명길에 오를 때는 아버지의 오해가 풀리거나 돌아가시면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길이 그렇게 오랫동안 돌고 도는 길일 줄은 훗날 진문공이 되는 중이 입장에서는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