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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달 Mar 05. 2021

큰놈이 잘되야 집안이 잘되는겨

어머님이 입버릇처럼 내게 되뇌었던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집안의 큰놈이다. 어머니의 확고하고 헌신적인 후원 덕에 나는 집안의 운명을 좌우할 특별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소한 부모님이 보시기에 그랬다.  


어릴 적 사진 속의 나는 광대뼈가 도드라진 아이였다. 물론 지금의 나는 간신히 만져지는 꼬리뼈 만큼이나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때는 가난했다. 아니 가난했다는 표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벽돌공이셨던 아버지는 타고난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나 배움이 짧았던 어머니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분이셨지만 역시 별스럽지 않은 수입이었다. 먹고 입는 것들이 늘 서운했던 시절. 하지만 큰놈에게 만큼은, 그 녀석의 공부를 위해서 만큼은 아낌이 없으셨던 두분 이었고 특히 어머니가 더 그런 분이셨다.      



초등학교 재수생

어머니의 교육열은 유난했다. 그때 그 시절 학구열이 유별난 어머니들이 행했던 패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유치원에 보내는 것과 또 하나는 자녀의 조기입학이었다.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나를 유치원(더 정확히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에는 성공하셨다. 그리고 그곳을 자주 드나드는 열혈 학부모가 되셨다. 계획이 다 있으셨던 어머니는 내가 7살을 맞이하던 해에 조기입학을 위한 초등학교 입학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3월 이전 생에게 한한 조기입학은 3월생인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담당 공무원을 향한 애절한 청탁에도 불구. 나는 초등학교 재수생이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이미 한글을 깨우쳤던 내게 초등학교 재수생활은 우월감과 드높은 자존감을 맛보게 해준 한해였다. 


한발앞선 선행학습

우수한 성적을 초등학교에 입학.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돋보이는 수재였다. 1번부터 20번까지 쓰여있는 길쭉한 가로길이의 받아쓰기장. 선생님이 부르는 낱말과 짧은 문장을 적어 나가는 아이들. 그 속에서 나는 매일 '100'점을 맞아가는 수재였다. 빨강 사인펜의 일관된 동그라미만 존재하는 받아쓰기장. 그 모습에 어머니는 매번 기뻐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 다음해 초등학교 2학년을 맞이한 나를 보습학원에 보내셨고 여는 아이들보다 한발 앞서 덧셈과 뺄셈, 그리고 구구단을 외우는 수재가 되어 있었다. 수수한 통신표를 자랑스럽게 들이미는 아이, 남모르게 부모의 도장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아이가 되었다.      

집안의 큰놈을 큰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어머니는 또 하나의 큰일을 해냈다. 어머님은 지인과 함께 칼국수집을 시작하고 그 집은 맛집이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낸 어머님은 드디어 당신이 주인 된 식당을 차렸다. 기찻길 옆 작은 공간에 차려진 '논산기사식당'. 지금은 하나의 명사가 된 '기사식당'을 그 당시 고향땅에서 일빠로 차리신 것이다. 부모님은 식당의 주방 한 켠에 연탄보일러를 깐 들마루 하나 놓고 짧은 쪽잠만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반응은 폭발젹이었다. 넘쳐나는 손님 덕에 우리 가족의 먹고 입는 것도 금새 달라졌고 어느 순간 나의 광대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나는 뚱보가 되었고 우린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도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네 꿈을 펼쳐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와 남동생은 학교를 파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지만 식당에는 부모님과 맛난 음식이 있었다. 밀려드는 손님에도 종업원을 둘 여력이 없었던 부모님은 작은 손이나마 우리 형제의 잔심부름은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나에게는 그 심부름 중에 솔솔한 부수입이 하나 있었다. 담배 심부름. 지금은 징역 갈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 담배심부름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 당시 가장 많이 팔리던 담배가 ‘솔’이었다. 가격은 450원. 대부분의 어른들은 5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며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두 눈을 반짝 거리며 담배를 사들고 온 나는 담뱃값 위에 50원짜리 동전을 얹어 공손히 건넨다. 그럼 열에 다섯은 거스름 돈은 내게 건넨다. 하지만 그것도 해가 긴 여름철 한때만 누릴 수 있는 특수였다. 해지기 전에 우리는 집으로 가야 했다.      

우리 형제는 그날도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엄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매번 식당에서 자고 싶다 졸라대는 우리를 집으로 내몰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것을 허락했다. 덕분에 그날의 담배 심부름 부수입도 배가 되었다. 좁다란 들마루 위에 가구라고는 3단짜리 자개장이 전부였던 식당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나와 남동생이 함께 잠들던 밤이었다. 하지만 늦어지는 식당 정리에 우리 형제는 그냥 잠든 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잠결에 흔들어 깨우는 기척에 눈을 떳다. 어머니는 나를 일으켜 앉히고 조용히 3단 서랍장을 열어 보이셨다 그곳에는 노란 고무줄로 댕겨진 지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오백원짜리부터 만원짜리까지 손때 짙은 지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제 우리 부자다. 너는 공부만 하면 돼. 큰놈이 잘되야 집안이 잘되는겨."

어머니는 한 무더기의 지폐 다발을 건네주며 만져보게 하셨다. 결기 어린 어머니와, 눈물 지며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 그리고 여전히 잠들어 있던 동생. 그 뒤로 밤 기차의 줄달음 소리가 내 심장의 고동 소리와 함께했다. 그 후 나는 더욱 큰놈이 되어갔다. 기가 살아 숨 쉬는 큰놈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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