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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2. 2022

러브크래프트적 메타영화?

<놉> 조던 필 2022

*스포일러 포함


 할리우드에서 대대로 말 조련사로 살아온 OJ(다니엘 칼루야)는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에 의해 죽은 아버지를 뒤이어 말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고, 동생 에메랄드(케케 파머)도 큰 도움이 되진 못한다. 그러던 와중 OJ와 에메랄드는 하늘에서 무언가를 목격하고, 전자기기 상점에서 일하는 엔젤(브랜든 페레아)의 도움으로 하늘을 향한 CCTV를 설치한다. 그러던 중 왕년의 아역 스타 주프(스티븐 연)가 운영하는 농장 근처의 작은 테마파크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조던 필의 세 번째 장편영화 <놉>은 그의 취향으로 가득하다.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와 <우주전쟁>부터 샤말란의 영화들이 지닌 미스터리적인 요소, 조던 필 스스로가 리부트했던 <환상특급>의 분위기, <에반게리온>이나 <아키라> 같은 서브컬처부터 80~90년대 미국 시트콤과 SNL 등 코미디에 대한 애정까지, 조던 필의 커리어를 만들어온 많은 레퍼런스들을 <놉>을 관람하는 내내 목격할 수 있다. 

 <놉>은 흥미롭게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달리는 말 사진에서 출발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말에 타고 있던 기수는 흑인이었으며, OJ와 에메랄드가 그의 후손으로써 할리우드에서 필요로 하는 말을 조련한다는 설정을 영화는 보여준다. 아니,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머이브리지의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머이브리지의 말 사진에서 말에 타 있던 기수가 실제로 흑인인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초기 영화사에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기록되지 않는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사진 속 인물을 흑인으로 추정하는 영화사가 의견도 여럿 존재한다. 물론 그 기수의 후손이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말 조련사로 일한다는 것은 조던 필의 상상이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그 기수는 최초로 영화 카메라 앞에 선 스턴트맨이자 배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존재다. 카메라 앞에 서 있지만 카메라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혹은 카메라를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사람들. 영화 초반 OJ와 에메랄드의 안전 브리핑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이 마음대로 말을 대하고, 말이 발길질을 하자 CG로 대체되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영화의 역사에서 흑인은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 알리스 기 블라쉐 등의 몇몇 백인 감독이 흑인을 주인공 삼아 영화를 만들었고, 흑인이 직접 흑인을 주인공 삼은 영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영화사 안에 편입되는 과정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진행되고 있다. 

 예고편을 본 이들이 추측하듯이 <놉>은 갑작스레 등장한 외계생명체와의 접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UFO처럼 생긴 것의 정체는 비행선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 자체이며, 그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생명체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OJ와 에메랄드, 엔젤은 그것을 촬영해 돈을 벌려한다. 그들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 엔젤이 “이건 지구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돈을 벌 수 있는 “머니샷”을 찍기 위해 외계생명체를 촬영하려 한다. 이는 어쩐지 영화의 주인공들과 대륙 반대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래퍼 나스(Nas)는 이런 가사를 쓴 적이 있다. 남은 것은 농구장에서의 꿈과 농구 토너먼트뿐/벤치에 앉아있는 thug 코치, 그게 아니면 랩(Nothing left for us but hoop dreams and hood tournaments/Thug coaches with subs sittin on the bench; either that or rap) 미국에서 흑인이 ‘합법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농구와 랩뿐이라는 것이다. OJ와 에메랄드는 할리우드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또 하나의 활로를 찾았고, 때문에 그들은 정체모를 외계생명체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자 한다. 그와 더불어,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자 영화계에 남을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인 농장의 말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존재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와 같은 너절한 말은 백인인 엔젤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 무려 자체제작한 수동 IMAX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백인 촬영감독 홀스트(마이클 윈콧)는 기꺼이 경탄을 자아내는 외계생명체를 보고자 하는 욕망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이다. 


 UFO를 닮은 외계생명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구름으로 위장해 있다. 평원의 푸른 하늘에서 많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동안 정지상태를 유지하는 한 구름이 그것이다. 그 외계생명체는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OJ는 6개월이 지난 이후에야 그것을 알아차린다. 심지어 그것이 뱉어낸 먹이의 소지품이 안구를 관통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목격했음에도 말이다. 외계생명체는 한번 인식하면 시야에 항상 들어오지만, 충분한 관찰 없이는 그저 없는 존재에 가깝다. 그러한 외계생명체는 사실 ‘비행접시’라기보단 거대한 렌즈를 닮아 있다. 렌즈의 모양을 한 그것엔 필시 조리개, 인간으로 치면 홍채와 같은 부위가 있어야 한다. 밑에서 본 외계생명체의 모습은 바닥에 구멍이 뚫린 익숙한 비행접시의 모습과도 같지만, 동시에 그것은 거대한 안구이자 거대한 렌즈와도 같다. 그것은 자신과 시선을 교환한 것들을 빨아들인다. 마치 카메라가 렌즈 앞에 놓인 것들을 방부처리된 이미지로 만드는 것처럼, 혹은 포악한 응시가 관객을 견딜 수 없는 광기로 이끄는 것처럼, 그것은 모든 것을 포악하게 집어삼킨다. 더 나아가, 마치 극장 스크린과 같은 색을 가진 외계생명체의 외피는 천으로 된 것처럼 바람에 펄럭이기도 한다. 그것이 모습을 바꾸어 <에반게리온>의 사도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신하였을 때, 그것의 눈이자 입이었던 하단부의 구멍은 오래된 사진관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때문에 외계생명체 자체를 카메라의 구조를 갖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정지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카메라 기능을, 일종의 러브크래프트적인 거대괴수로 뒤바꾼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조던 필은 러브크래프티안이다. 흑인들의 신체를 탐내는 백인들이 흑인들의 정신을 가두던 <겟 아웃>의 ‘빈 공간’이라던가, 인간의 도플갱어들이 현실을 복제한 공간에서 살아가던 <어스>의 지하공간 같은 것을 떠올려보자면 말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러브크래프트적인 <환상특급> 리부트의 제작과 호스트를 맡았고, 아예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라는 TV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크툴루를 비롯한 거대한 무언가, 혹은 ‘우주에서 온 색채’처럼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무언가와 마주하는, 상대적으로 미물에 불과한 인간의 광란을 담아온 러브크래프트는 오랜 시간 수많은 창작자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왔다. 무엇보다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였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거듭된 재해석을 거쳐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작동하기에 이르렀다. 기예르모 델 토로나 닐 게이먼부터,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변용한 국내 장르소설가들의 [프로젝트 LC RC]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러브크래프트는 재해석되고 전복되었다. <겟 아웃>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조던 필은 언제나 같은 것을 반복해왔다. 


 그러한 관점에서 <놉>의 이야기는 지극히 러브크래프트적이며 지극히 메타영화(혹은 영상문화 전반)적이다. 이번 영화에서 조던 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이 꾸준히 추구해온 두 가지의 혼합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직접 영화화하는 작품(리처드 스탠리의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나, 크툴루 신화를 직접 차용하는 작품(윌리엄 유뱅크의 <언더 워터>, 게임 <오브라 딘 호의 귀환>) 등이 종종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 지닌 결을 옮겨오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 러브크래프트를 전유하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놉>의 지향점이라 한다면, 조던 필이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영화, 시트콤, TV드라마, 코미디 쇼 등 영상문화 전반이 지닌 파괴력을 러브크래프트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OJ와 에메랄드의 ‘머니 샷’에 대한 집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인종주의적이며 계급적으로 구성된 영상문화 전반의 자본주의적 프로젝트의 전복이다. <겟 아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의제로 귀환하는 여정이었고, <어스>는 인종주의-제국주의에 맞서는 초역사적 연대를 꿈꾸었다. 그렇다면 <놉>은?

 <놉>은 영화사의 시작점에 있었으며 여전히 영화계에 존재하지만 카메라에 담기지도, 카메라를 잡지도 못해온 이들이 마침내 카메라를 길들이는 이야기다. 이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이야기이다. 인종주의적으로, 계급적으로 영화의 두 주인공을 배제해온 영상문화 속에서 외계생명체는 일종의 기회다. 모든 것을 ‘영끌’하여 꼬라박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나 마찬가지다. 영화 후반부 30여분 동안 이어지는 OJ 일당과 외계생명체 사이의 대결(?)에서, OJ 일당은 자신들의 생존과 안위를 우선적으로 챙기지 않는다. 생존이 목적이었다면 그들은 영화 중반부 탈출한 뒤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한다. 전자기기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외계생명체 앞에서 그들은 수동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고, 더 나아가 주프의 테마파크에 있는 거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동원한다. 그들의 목적은 외계생명체를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카메라로 포착해 증거를 남기는 것이다. 그 증거는 ‘머니 샷’이자 오프라 쇼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오프라 샷’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합법적으로’ 영상문화 속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카메라로 포착된 외계생명체의 이미지는 그들을 죽일 수 없다. 정지상태의 이미지에 포획된 그것은 더 이상 살생을 저지르는 ‘저주받은 카메라’가 아니다. 외계생명체의 길들여진 이미지는 교환가치만을 지닌 상품으로 변모한다. 


 다시 영화 초반에 언급된 머이브리지로 돌아와 보자. 머이브리지는 말이 달리는 모습을 해부하듯 관찰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이는 무엇보다 인간의 시각이 접근하지 못하던 영역을 열어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머이브리지의 말 사진에서 할리우드의 말 조련사인 OJ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 조련사는 말이 영화적 이미지가 될 수 있도록 그것을 훈련시킨다. 인간은 “카메라에 촬영될 권리”를 가지지만, 인간이 아닌 동물이 영화적 이미지가 되기 위해선 길들여져야 한다. 이 지점에서 주프의 존재는 흥미롭다. 어린이 모험극의 출연하여 스타가 된 그는 90년대에 아역으로 출연한 가상의 시트콤 <고디의 집>에서 큰 사고를 겪었다. 가족의 일원으로 출연하던 한 침팬지가 폭주해 출연진에게 상해를 입혔고, 책상 아래 숨어있던 어린 주프의 눈앞에서 사살당한 사건이다. 영화는 이 순간의 사운드를 유니버셜과 몽키포 프로덕션의 로고가 나오는 영화의 도입부에 배치했다. 사건의 전말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 러닝타임이 흐른 뒤다. 주프는 서부개척시대를 연상시키는 컨셉의 테마파크를 운영한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꾸며져 있다. 더 나아가 주프는 자신의 사무실의 숨겨진 방에 <고디의 집>과 연관된 물건들을 전시해 두었다. 주프는 길들여지지 않은 침팬지에 의해 얻은 트라우마를, 그 당시의 이미지를 길들이는 방식으로 극복해온 인물이다. 테마파크도, 숨겨진 전시실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외계생명체를 목격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서프라이즈 쇼’라는 명목으로 동물들을 외계생명체의 먹이로 주는 쇼를 매주 같은 시간마다 리허설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쇼를 오픈하던 순간, 그는 자신이 길들였다고 생각한 외계생명체에 의해 가족 및 관객, 그리고 <고디의 집>에 함께 출연했던 동료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길들일 수 없는 것을 길들이려 한 대가이자, 길들일 수 있는 모든 대상, 다시 말해 동물과 이미지 모두를 착취한 대가에 가깝다. <놉>이 흐트러지는 것은 이러한 주프의 존재 때문이다. ‘길들이기’에 관한 OJ와 주프의 태도는 상반된다. OJ는 전통적인 서부극 속 카우보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말을 매물로 내놓지만, 동시에 말에게 밥을 주기 위해 외계생명체의 존재에도 농장에 남는 것을 택한다. 말이 길들여진 영화적 스펙터클로만 남길 바라고, 그것이 달성되지 못하면 즉시 CG로 대체해버리는 업계의 관행 속에서 그는 길들여진 말들과 함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와 대비되는 방식으로 비인간 존재의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주프가 실패하는 것은, 두 사람의 대비를 두고 보았을 때 당연한 귀결이다. 영화는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주프의 과거를 보여준다. 심지어 연도를 알려주는 자막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OJ와 주프의 대비는 실패한다. OJ는 외계생명체의 습성을 파악한 뒤 계획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 함께한 에메랄드는 어린 시절 자신 대신 ‘진 재킷’이라는 이름의 말을 길들였던 OJ를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OJ는 자신이 물려받은 ‘길들이기’의 가업을 영화의 마지막 순간 에메랄드에게 넘겨준다. 영화 속에서 누구도 해를 입지 않는 명시적인 시선의 교환은 두 사람의 것이다. 


 <놉>의 결말은 그 결과로써 제시된다. 외계생명체는 길들여진 상품이 되었고, 심지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결이 끝난 뒤 숨을 고르던 에메랄드의 옆에는 인화가 완료된 대형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고, 그 뒤엔 상품의 냄새를 맡고 달려온 기자들이 있다. 서부극의 카우보이 영웅처럼 (재)등장한 OJ의 모습은 자신을 배제해온 문화에 늠름함으로 카운터를 날리려 하는 것만 같다. <데이곤>과 같은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몇몇 전통을 따르듯, “영화 귀족”의 혈통을 지닌 이 남매는 마침내 거대한 카메라를 자신들의 카메라로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길들임은 결국 그들이 주프와 유사한 길을, 자연을 길들여 온 서부극이 맞이한 몰락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라이카트와 같은 몇몇 감독들에 의해 (마치 러브크래프트가 그러했듯) 재해석/전복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놉>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러브크래프트적인 메타영화라는 조던 필의 새로운 기획은, 그의 두 전작처럼 절반의 성공에 머무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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