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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8. 2022

꽉 찬 시간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2021

 쥘리(로르 칼라미)는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파리 교외의 소도시에서 파리 중심가의 5성급 호텔로 출퇴근하는 그에게 교통 파업이라는 상황이 들이닥친다. 장거리 출퇴근은 어려움을 겪고, 동시에 새로운 직장을 얻으려는 그의 노력 또한 어려워진다. <풀타임>은 그러한 상황을 담아낸다. 전체관람가가 무색하게 관객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처럼 달려 나가는 이 영화는 마치 샤프디 형제가 <미안해요, 리키>와 <내일을 위한 시간>을 뒤섞어 찍은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이 서로 반목하게끔 만드는 시스템을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풀타임>은 그저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싱글맘이 마주하는 일상을, 그 일상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것에 속도를 맞춰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쥘리가 일상을 유지하는 것에는 광범위한 선의의 작동이 포함된다. 교통파업으로 인해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출근해야 하는 쥘리의 두 아이를 맡아주는 이웃집 할머니라던가, 카풀을 통해 서로의 이동을 돕는 사람들, 이직을 위해 면접을 봐야 하는 쥘리의 사정을 이해하고 근무시간을 교대해주는 동료 등 많은 이들의 선의가 쥘리의 삶을 가능케 한다. 동시에 쥘리만큼 숨 가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선의를 베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하다. 누군가의 업무상 실책은 다른 이의 해고사유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파업은 누군가의 생활을 지옥 같은 속도로 달리게끔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부자들의 똥을 닦아야” 돈을 번다고 말하는 5성급 호텔의 중간관리자의 잘못인가? 국가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며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의 잘못인가? 쥘리의 아이를 맡아주던 할머니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며 아이를 맡지 말라고 한 것은 잘못인가? 

 영화 속에서 쥘리는 여러 차례 근무지인 호텔의 근무규정을 어긴다. 살수기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때 청소를 끝낼 수 없는 청소에 살수기를 동원하고, 빡빡한 근무조건에서 벗어나 육아 이전의 직업과 같은 직군의 회사에 면접을 보기 위해 몰래 일터를 빠져나오고, 대중교통이 운영하지 않자 호텔의 택시 서비스를 몰래 이용하기도 한다. 이는 쥘리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쥘리의 삶은 그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끔 쥘리를 끌고 간다. 쥘리의 일상은 한계치까지 가속화되어 있고, 파업을 비롯한 몇몇 조건들은 그 한계를 몇몇 ‘잘못’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게 만든다. 근본적으로 일상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쥘리의 노동조건(여기엔 물론 호텔뿐 아니라 육아와 각종 가사노동이 포함될 것이다)은 그에게서 많은 가능성을 앗아간다. 쥘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초인(원더우먼)이 되어야 한다. 어머니로서 아이를 챙겨야 하고, 직업인으로서 직업에 충실해야 하며, 동료시민으로서 파업에 참여하진 않더라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쥘리의 노동을 둘러싼 다양한 겹들은 오로지 초인만이 견딜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하는 직장인 싱글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가능성의 범위를 줄이는 것, 혹은 ‘잘못’을 통해 초인(처럼 보이는 활동을 선보이며)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풀타임>을 만든 에리크 그라벨은 다르덴 형제나 켄 로치 등의 앞선 노동영화들을 반면교사, 혹은 정면교사 삼아, 표상적인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풀타임>은 그야말로 ‘꽉 찬 시간’을 담아내는, 일상의 한계를 시험하는 쥘리의 노동(들)을 ‘리얼’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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