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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30. 2022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후기

<더 제인스> 티아 레슨, 에마 필더스 2022

2022년 6월 24일, 미국 대법원에 의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무효가 되었다. 미국의 많은 주들은 다시금 1973년 이전으로 되돌아가 임신중절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난 <더 제인스>의 이야기는 시의적절하다. 60년대 말에서 1973년까지, 시카고에서 여성들의 낙태를 돕던 일군의 여성들은 자신을 '제인'이라 불렀다. 당시 불법적인 임신중절 시술은 마피아 등 범죄집단과 연관된 것이었기에, 여성들의 낙태는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 페미니즘운동 등이 전개되던 격변의 60년대, 제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아 안전한 임신중절을 진행한다. 이는 단순히 중절수술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안전한 여성들의 공동체를 꾸리는 일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인해 임신중절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위헌이 되며 끝난다. 역행의 시대에 마주하는 그들의 활동은 놀랍기 그지없다. 다만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담아낼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카고의 과거를 담은 다양한 아카이브 푸티지와 제인들의 과거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인터뷰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몇몇 곁가지들은 제인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을 루즈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를 초과해 흘러나오는 제인들의 놀라운 이야기가 <더 제인스>의 유일한 힘이라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 쥘리아 퀴페르베르그, 클라라 퀴페르베르그 2021

아이다 루피노의 전기 작가, 영화사가, 영화평론가 세 사람이 나와, '영화감독' 아이다 루피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검열이 존재하던 전후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조합의 유일한 여성감독으로 활동하던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놀랍다. <히치하이커>와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외에는 그가 연출한 작품을 본 게 없지만, 그 작품들만으로도 아이다 루피노의 대단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할리우드의 아이다 루피노>는 그러한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문제는 이 다큐멘터리가 알려주는 것은 그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다 루피노의 활동과 작품세계를 해설해주는 세 사람이 '영화'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 앞에는 '할리우드'라는 단어가 괄호쳐진 채 생략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남성 영화사가가 반복해서 '여자 영화' 같은 워딩을 내뱉을 때는 불쾌감 마저 풍겨온다. 더불어 아이다 루피노가 전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사실상 유일한 여성 감독은 맞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다 루피노 이전에 활동했던 여성들을 없던 것으로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도로시 아즈너가 4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물론 20년대 말 스튜디오 시스템이 정착하며 영화계의 여성 감독/제작자/각본가/편집자들이 사실상 쫓겨났다는 언급을 하긴 하지만, 이 영화의 단정적인 화법은 또한 무언가를 지워내고 있다. 그러한 부분들은 이 영화를 블루레이 서플먼트처럼 느껴지게끔 만든다.



<큰소리로 같이> 안미영, 정유진 2021

<어쩌다, 10년> 이순학, 정나라 2019

각각 대구여성영화제와 광주여성영화제의 1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작품들이다. 다소 짧은 러닝타임으로 10년을 압축한 <큰소리로 같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지만, 두 영화 모두 지역여성영화제, 더 나아가 지역영화제가 지역공동체 내에서 어떠한 쓸모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작품들이다. 무엇보다 두 영화제는 모두 관 주도의 집행부를 지닌 여러 지역영화제들과 다르게, 지역 내 여성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장소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두 영화 속에서, 그리고 두 영화가 상영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각 지역의 여성영화제들이 서로 연대하고 경험을 교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10년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는 듯한 두 편의 영화에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샤를로트에 의한 제인> 샤를로트 갱스부르 2021

배우이자 가수인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어머니 또한 배우이자 가수인 제인 버킨이다. 샤를로트의 첫 연출작인 이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가 제인 버킨을 찍은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에서 제목을 따왔다. 바르다의 영화가 스타 배우이자 가수인 제인 버킨의 현재에 집중했다면, 샤를로트의 영화 또한 제인 버킨의 또 다른 현재에 주목한다. 여기엔 제인 버킨의 딸이자 자신 또한 딸을 둔 어머니로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자연스레 포괄된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 영화는 모녀관계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들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모녀관계는,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이라는 거대한 두 이름 앞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된다. 그것은 한없이 사적임과 동시에 두 이름을 둘러싼 가쉽들에서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샤를로트에 의한 제인>은 홈무비이면서 예술가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 되고, 모녀의 대화를 담은 영화일기이면서 셀럽에 삶을 담아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그것을 적절하게 분배하고 운용하는 연출가는 아녔다. 이 영화의 산만함 자체가 두 인물의 현재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삶에 접근할 수 없는 관객에 입장에서 그 산만함은 익숙한 따분함으로 변하기도 한다.


<삼비장가> 사라 말도로르 1972

2020년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앙골라의 선구적인 영화감독 사라 말도로르의 데뷔작으로, 2021년 복원된 판본으로 상영되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 경찰에 의해 체포된 남편을 찾기 위해 노동자들의 마을 삼비장가에서 수도 루안다의 중심으로 향하는 여성 마리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아프리카 반식민 운동에 참여한 여러 활동가가 출연한 이 영화는 끌어오르는 혁명을 다루는 대신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옮겨 붙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어찌 보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피지배계급의 활동과 연대, 애도를 담아낸 익숙한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비장가>는 어린 아기를 짊어 안고 루안다 곳곳 누비며 자신이 존재하는 곳을 투쟁현장으로 만들어내는 한 여성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영화다. 그 이미지는 강렬한 혁명의 이미지로써 관객의 뇌리에 남는다.

<두 소녀가 사랑에 빠진 믿을 수 없는 진짜 이야기> 마리아 마젠티 1995

노동계급 레즈비언 가정에서 살아가는 오픈리 레즈비언 백인 소녀와, 부유한 이혼가정의 외동딸이자 '인싸'인 흑인 소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서로 상충되는 배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의 수많은 '다름'을 넘어 함께하는 과정을 익숙한 하이틴 로맨스의 문법 안에서 풀어낸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비롯한 현재의 퀴어-하이틴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의 게이 친구 묘사는, 성격과 외모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넷플릭스 시리즈 속 조연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며 이 영화보다 늦게 제작된 수많은 퀴어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을 따라한 비퀴어 하이틴 로맨스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에요>처럼 어떤 의제에 관한 강력한 반발심을 기반으로 하기보단,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이 많은 것을 넘어 함께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전자의 방법도 즐겁고 흥미롭지만, 이 영화의 방법론은 더 많은 것을 가늠하게끔 만든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사랑은 서로 다른 세계들이 공생관계에 놓이게끔 만든다는 것을, 이 긴 제목의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가단빌라> 이효진 2022

영화의 주인공인 감독 본인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년 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단빌라>는 감독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가는 청량리의 한 빌라다. 이 집에서 20여년을 살아온 감독은 그러한 불행 속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왔는지 궁금해하며, 카메라로 할머니를 담기 시작한다. 감독은 그 불행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되진 않는다. 독박육아, 부동산, 돈에 대한 욕망 등이 불행의 원인으로 제시되지만, 그중 어느 것이 원인이라고 규명되지 않는다. 아니, 어떤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것은 얽혀 있다. 영화는 그것을 공백으로 남겨 둔다. 감독은 자신과 할머니, 가족을 둘러싼 불행의 원인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불행은 저화질에 지직거리는 홈비디오 영상처럼 보이긴 하지만 선명하진 않은 무언가일 뿐이다. 대신 그 불행을 눈 앞에 두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 <가단빌라>의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에 서성인다. 물론 그 질문에 관한 답 또한 불가능하다. 과거는 불투명할지라도 마주할 수 있지만, 미래와 마주하는 것은 반복해서 유예된다. <가단빌라>의 어떤 공백들, 가령 음소거된 감독의 말,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말싸움, 불행의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가족의 남성 구성원들 등은, 감독이 내리지 못한 답을 관객들이 채워주길 바라며 마련한 자리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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