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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3. 2023

완전한 허구로서 시대를 전달해보기

<유령> 이해영 2023

*스포일러 포함


 1933년 경성, 신임 조선총독 가즈시게(고인범)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경호대장 다카하라(박해수)는 이를 항일지하조직 흑색단 소속 스파이 ‘유령’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총독부의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설경구), 통신과 직원 박차경(이하늬)과 백호(김동희), 암호해독 담당 천 계장(서현우),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 등 다섯 명을 용의자로 체포한다. 다카하라는 외딴 바닷가 호텔에 이들을 감금하고 누가 유령인지 색출하기 시작한다. 일제의 침략이라는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는 중국의 소설가 마이지아의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으로, 중국에서는 <바람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영화의 홍보용 시놉시스를 보면 누가 유령인지 인물들도 관객도 알지 못한 채 벌어지는, 일종의 마피아 게임을 연상시키는 추리극인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누가 유령인지 영화의 도입부에서 순순히 밝힌 채 시작된다. 유령은 박차경이다. 다만 다소 산만한 영화의 초반부, 총독부에 전달된 암호문이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의 손을 거쳐 조선인이 운영하는 한 극장에 도달해 지령이 되는 장면을 통해 그 이외의 인물이 존재함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건조하고 냉철한 심리극이나 논리적인 추리극을 기대했다면 이 영화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유령>은 그러한 영화가 아니다. 더 나아가 <암살>처럼 실제인물을 바탕으로 장르 컨벤션을 도입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발산하는 영화도, <봉오동 전투>나 <영웅>처럼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국뽕’ 서사를 노리는 영화도 아니다. <유령>의 주요 인물 중 실제인물은 신임 총독인 가즈시게뿐이며, 그마저도 실제 역사에서 1931년 부임한 총독을 1933년의 새로 부임한 것으로 뒤바꾼다. 흑색단이라는 이름의 조선인 한일지하조직도 당연히 없으며, 딱히 레퍼런스 삼았을 조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박찬욱의 <아가씨>나 이해영의 전작 <경상학교: 사라진 소녀들>처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되 실제 역사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작 소설 또한 실제 역사를 재구성한, 소위 ‘팩션’이라 불리는 작품이 아니었던 만큼, <유령> 또한 비슷한 노선을 취한다. <유령>이 원작과 다른 점이라면, 원작은 ‘유령’의 색출을 중심에 둔 심리극이자 추리극이었지만, <유령>은 <경성학교>처럼 중반부 장르가 전환되는 영화다. 

 <유령>의 캐릭터들은 확실하다. 조선인 어머니를 둔 것이 부끄러워 유령 체포로 공을 세우려는 군인 무라야마, 몇몇 전작과 비슷하게 “썅년” 캐릭터를 이어가는 박소담의 유리코, 결벽증을 지닌 소심한 천 계장,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박차경 등등,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어디선가 봐 온 것만 같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나이브스 아웃> 같은 작품에서나 볼 수 있을 군상극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각 캐릭터의 목적과 행동방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도 부족하다. 유리코가 자신이 또 다른 유령임을 밝히며 다카하라를 공격하는 중반부 전환점 또한 갑작스러운 반전이라거나 예상 못한 변화구라기엔 힌트가 많다. 대신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 이후의 쾌감이다. <경성학교>가 외딴 학교에서 갇혀있다시피 살아가는 소녀들이 경험하는 무서운 일들을 보여주는 호러로 시작해, 실은 그곳에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주인공이 각성하여 그곳을 때려 부수는 것으로 극단적인 장르전환을 보여주는 것과 유사하다. 

 유리코가 정체를 드러낸 이후의 영화는 더 이상 추리극이 아니다. <유령>의 중반 이후는 익숙한 액션영화의 틀을 따라간다. 박차경과 유리코는 힘을 합쳐 호텔을 탈출하고, 일제 경찰의 함정에 빠지게 된 다른 흑색단 멤버들을 구하러 떠난다. 이 과정은 몇몇 변종 서부극, 이를테면 한국의 만주극이나 로버트 로드리게즈 등이 멕시코에서 만들었던 B급 서부극을 연상시킨다. 박차경과 유리코 일행은 의문의 수녀를 만나 도움을 받고, 수녀가 건네준 판초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고 경성으로 향한다. 다카하라의 경호대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흑색단이 총독을 암살하고자 했던, 하지만 무라야마에 의해 일본 경무대의 함정이 된 곳에 그들이 도착한다. 이 장면에서 이들이 선보이는 액션은 <암살>의 안옥윤과 피스톨이 선보였던 것과 다르다. 판초 같은 옷을 입고 쌍권총을 휘두르는 유리코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로드리게즈의 ‘엘 마리아치’ 삼부작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더 나아가 영화의 에필로그, 박차경의 연인인 난영(이솜)이 성공하지 못한 총독 암살을 위해 그와 유리코가 슈트에 페도라를 쓰고 단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자면 <흑협>이나 견자단의 진진이 일본인들과 싸웠던 <정무문: 100대 1의 전설> 같은 홍콩영화, 혹은 단기관총 난사가 종종 등장했던 B급 갱스터 영화에 가깝다. 

 그렇다고 <유령>을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같은 대체역사물이라 부르기엔 어려울 것이다. 아무래도 <유령>은, 타란티노의 영화와 다르게 실제 역사에서 참조해 오는 것이 없다. 다만 종종 등장하곤 하는, 실제 역사를 배경 삼아 벌어지는 장르영화일 뿐이다. 작년 개봉했던 <늑대사냥>의 리뷰(https://blog.naver.com/dsp9596/222881798562)에서 나는 <늑대사냥>이 “만주군은 나치처럼 장르화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 적었다. 이와 비슷하게 <유령>은 항일무장조직이 장르화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물론 답은 있다. 순수한 코미디이자 만주물을 흥미롭게 계승하는 류승완의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케이퍼 무비 장르를 끌어온 <암살>이라던가, 아예 뮤지컬로 가버린 <영웅>을 떠올려보면 <유령>은 불가능한 영화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들이 어디까지나 실제 사건이나 역사에 천착하며 고증과 역사왜곡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유령>이나 <늑대사냥> 같은 작품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신이 하려던 바를 시도한다. 이 시도는 역사를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러내려 하지만 동시에 장르의 외피로 자신을 은폐하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르다. 이를테면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는 독립군을 딱히 긍정적 집단으로 묘사하지 않고, 이는 그것을 계승하고자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라기보단 인물과 사건들이 속해 있던 ‘시대’라는 이름의 무대다. 정확한 역사가 궁금하다면 수많은 자료들을 참고하면 된다. 다만 <늑대사냥>과 <유령>은 그것들을 직접 재현하는 대신 그것들이 있었음을 다른 방식으로 각인시킬 뿐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유령>에서 재밌는 방식으로 고증된 1933년의 경성 속 극장이다. 영화 초반 박차경이 가져온 암호문이 전달되는 곳은 독특하게도 경성에서 조선인이 운영 중인 극장이다. 무라야마와 다카하라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극장이기 때문에 그곳을 의심하게 된다. 박차경은 그곳에서 조셉 폰 스턴버그의 <상하이 익스프레스>를 보고, 그가 전달한 암호는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큐라> 포스터에 적혀 전달된다. 각각 1932년, 1931년 제작된 두 영화는 1933년의 경성에서 실제로 개봉했던 영화들이다.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얼핏 역사적 인물/사건과 관련 없는 사실들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령>은 (영화)극장에서 시작해 (연극)극장에서 끝난다. 허구들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종류의 두 극장에 도달하기 위해 움직인다. (영화)극장은 비밀과 이념이 전달되는 곳이었다면, 사람이 직접 무대에 올라야하는 (연극)극장은 물질적인 실체로서 비밀이 드러나고 이념이 실천되는 공간이다. <유령>은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게끔 하는 많은 영화들이 택하는 방식 대신 흥미로운 우회로를 택한다. 이 우회로는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 시대의 재현을 택한다.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가 만주군/관동군이 자행한 만행을 독특한 방식으로 고발하는, 가상의 스파이활동을 창조해낸 뒤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던 시대를 그려내며 역사를 반추하게끔 하는 구조를 채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늑대사냥>과) <유령>이 그 영화처럼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어쨌거나 역사극으로서 <유령>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혹은 기능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을 때, 나는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단 완전한 허구로서 시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에 조금 더 마음이 갈 뿐이다. 물론, <독전> 같은 조잡한 리메이크를 뒤로 하고 재밌는 영화를 들고 돌아온 이해영에 대한 반가움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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