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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4. 2023

발과 손의 방향

<희망의 요소> 이원영 2021

 이 영화는 발에서 시작한다. 구두를 신고 다니기에 새끼발가락이 까져 밴드를 붙인 듯한 아내(박서은)의 발이 등장하고, 남편(이승훈)이 그 발을 잡으려 한다. 발마사지를 해주려고 한 것이지만 거절당한다. 이내 아내는 불륜남과 통화를 하고, 남편은 그것을 얼핏 들은 것만 같다. 아내는 남편의 된장찌개를 먹지 않은 채 출근하고, 직장도 벌이도 없는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한다. 무능력한 남편과 바람피우는 아내의 이야기, <희망의 요소>의 이야기는 얼핏 옛 것처럼 느껴진다. 흑백 화면 속 느릿한 움직임들도, 취미로 단편소설을 써 신춘문예에 내어보는 남편의 모습도, 마침내 재결합하는 두 사람의 모습도. 

 <희망의 요소>는 몇 가지 반복되는 숏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부부가 사는 집의 현관을 찍은 숏이 그렇다. 남편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신발, 출근을 위해 구두들을 꺼내는 아내와 남편의 허름한 운동화와 슬리퍼, 술에 취한 아내의 발걸음과 대충 벗어둔 신발, 낯선 신발을 남편보다 먼저 발견하는 관객의 눈과 낡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 현관을 잡은 숏 외에도 이 영화는 유독 두 사람의 발과 손을 많이 담아낸다. 일반적인 대화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의 요소>는 두 사람의 얼굴보다 발과 손을 담아내는 것에 더 많은 숏을 할애한다. 손과 발에는 표정이 없다. 다만 그것들이 움직이는 방향, 방식, 속도가 있다. 똑같이 된장찌개를 끓이는 장면일지라도, 요리를 하는 손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 영화 초반 빨래를 널고 개던 남편의 손짓에서 느껴지는 무력감과 불륜을 목격한 이후 이불 빨래를 하는 남편의 발길질에 가까운 행위는 모두 “빨래”를 하는 것이지만 다르다. 

 이승훈, 박서은 두 주연배우가 똑같이 주연을 맡았고, 이 영화의 PD인 임정은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워 미드나잇>의 두 주인공은 한없이 걸어 다녔다. 밤을 새워 서울 곳곳을 걷는 것이 그 영화를 성립시키고 두 인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유일한 구성이었다. <희망의 요소>는 더욱 단출한 구성으로 두 인물의 관계를 담아낸다. 영화가 시작할 때는 하나의 발, 아내의 두 발 중 하나의 발만이 등장한다.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남편의 손을 격렬하게 거절하는 아내의 발, 영화 내내 요리와 청소를 하며 아내에게 ‘기여’하는 남편의 손, 그리고 아내를 떠나는 남편의 발. 손과 발은 두 사람의 표정과 내면을 대리하여 움직인다.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남편은 강원도 고성으로 떠난다. “1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다소 긴 에필로그를 보여준다. 두 사람은 다시 결합했다. 아내와 남편은 손을 잡고, 두 사람의 발은 해변의 모래 위에 나란히 서 있다. 좁은 화면비에는 두 사람의 발이 모두 담길 수 없었다는 것처럼, 에필로그의 넓어진 화면비는 두 사람의 손, 발, 몸을 나란히 담아낸다. 좁은 화면 속에서 불화하던 두 사람의 발이 같은 방향성을 보이는 순간, 기울어져 있던 애정은 본래의 기울기를 되찾는다. 이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이 도래하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자 한 이들을 찍고자 했으며, 기다리는 마음을 이 영화는 담아내려 한다. 이 영화의 무수한 발과 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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