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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9. 2022

세헤라자드가 되지 못한

<3000년의 기다림> 조지 밀러 2022

*스포일러 포함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은 강연을 위해 튀르키예를 찾는다. 동료와 골동품점을 방문한 그는 오래 된 유리병을 발견한다. 호텔에서 병을 살펴보던 중, 뚜껑이 열리고 봉인되어 있던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튀어나온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3개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말하고, 알리테아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야기”가 모두 불행히 끝났음을 떠올리며 지니가 병에 봉인된 과정을 이야기해주길 부탁한다. <3000년의 기다림>은 병 속의 지니가 알리테아를 만나기까지 3000년의 시간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시바 왕국의 여왕 곁에 있었던 시간부터 오스만 제국을 거쳐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는 지니의 이야기와, 이를 보여주는 거대한 플래시백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7년 만에 복귀한 조지 밀러는 맹렬한 액션 대신 역사와 판타지가 뒤섞인 이야기를 가져왔다. 영국 소설가 A. S. 바이어트의 단편소설 [The Djinn in The Nightingale's Eyes]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알리테아(Alithea)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진실의 여신 Aletheia의 이름에서 따왔다. Alithea라는 이름 자체도 고대 그리스어로 ‘진실한’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신화나 고대 그리스어 외에도 하이데거의 탈은폐와도 연관된다. 하이데거는 Aletheia가 망각 혹은 은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letthe의 반의어로서,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 즉 진리가 ‘탈은폐’되며 드러나는 것을 ‘Aletheia’라 불렀다. <3000년의 기다림>은 결론적으로 알리테아가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는 계기로써 지니를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이야기다. 지니는 3000년에 걸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름다움 그 자체였던 시바 여왕의 사랑을 솔로몬 왕에게 빼았기고 작은 병에 2500년 동안 갇히게 된 이야기, 우연히 자신을 발견한 노예 소녀가 왕자의 사랑을 소원으로 빌었다가 몰락한 이야기, 탈출의 기회를 노리며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왕의 생애를 쫓던 이야기, 지니 자신이 사랑하게 된 어느 천재 소녀의 이야기. 그간 조지 밀러의 영화들은 선형적으로 돌진하는 것들이었다. <매드 맥스> 시리즈는 물론, <꼬마돼지 베이브 2>나 <해피 피트> 등의 아동영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도 A에서 B로 향하는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끝없는 사막이나 얼어붙은 남극대륙, 동물의 시점에서 본 도시 등 넓게 펼쳐진 공간을 여정의 무대로 삼아왔다. <3000년의 기다림>은 그러한 지점에서 조지 밀러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예외적이다.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20,000 피트의 악몽>에서 한 차례 폐쇄된 공간을 다루긴 했지만, 그것은 공간 자체가 움직인다는 점에서 아주 예외적이진 않다. 이번 영화의 대부분은 튀르키예의 호텔 방에서 벌어진다. 알리테아와 지니의 대화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썼다는 호텔방에서 벌어지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광활한 플래시백으로 제공될 뿐이다.

 여기서 이동하는 것은 알리테아도 지니도 아니다. 이야기만이 이동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솔로몬에 의해 봉인되어 2,500년을 떠돌던 지니의 여정을 보여주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야기를 풀어내는 지니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처럼 깔리고, 지니가 봉인된 작은 병이 깊은 바닷속에서 오스만 제국의 성벽에 이르는 여정을 하게 된다. 이 병은 ‘지니’라는 인물이라기보다 잠재적으로 이야기인 사물이다. 이 사물의 쓰임이 드러날 때, 이 병을 우연히 습득한 노예 소녀가 그것을 열어 지니를 만나게 될 때가 되어서야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리가 되지 못한다. 서사학자인 알리테아는 수많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연구하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쓸모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세계 곳곳의 신화들이 유사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들이 되었다고 강연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전파과정이지 이야기가 은폐하던 것의 탈은폐가 아니다.

 사실 ‘지니의 이야기’라는, 알리테아가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구입한 유리병이 은폐하고 있던 진리는 ‘사랑’이라는 익숙한 내용물을 담고 있다. 지니는 시바 여왕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기에 봉인되었고, 노예 소녀는 사랑을 통해 어리석어져 목숨을 잃었으며, 사랑을 배우지 못한 제국의 왕자는 지니를 발견조차 하지 못했고, 필멸자를 사랑하게 된 불멸자 지니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시 봉인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뜬금없게도 알리테아가 지니에게 요구하는 소원은 “사랑해줄 것”이다. 알리테아는 이 소원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질 것임을 무수한 이야기의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지니 또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둘은 알리테아의 집이 있는 런던으로 향한다. 신체가 전자기파로 구성된 지니는 수많은 전파를 직접 보고 듣기에 런던의 밀도를 견딜 수 없어한다. 둘은 서로 떨어져 살다가 다시금 만나길 반복한다. 3,000년의 시간을 통해 지니가 얻은 이야기들은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임을, 이 영화의 후반부는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의 교훈은 다소 뻔하다. 혐오의 시대에 사랑을 이야기하기, 사랑이라는 관념을 모든 이야기의 최종 심급으로 제시하기. 사막과 설원 대신 광활한 유사-역사 속을 떠돌던 이야기는 익숙한 이야기를 싣고 이동하다 멈춘다. 이야기가 멈춤과 함께 이 영화의 교훈도 지니처럼 사라질 뿐이다. 조지 밀러는 세헤라자드가 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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