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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8. 2023

전작의 반복과 번복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2022

*스포일러 포함


 <스즈메의 문단속>을 신카이 마코토의 두 전작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와 함께 “재난 3부작” 같은 이름으로 묶어 부르고 싶은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금까지도 쏟아지고 있는 일본의 무수한 ‘포스트 3.11 영화’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작품들 중, 신카이 마코토의 세 영화는 안노 히데아키와 히구치 신지의 <신 고지라>와 함께 가장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작품들은 지진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련의 다큐멘터리 – <바다의 소리> 연작, <더블 레이어드 타운>,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 등 – 혹은 현실의 배경 속에서 재난상황을 담아낸 극영화 – <두더지>, <아사코> 등 – 을 떠올려보자면, 일본영화의 전통적인 장르물인 세카이계 애니메이션과 거대괴수물을 각각 따온 이들 작품의 흥행은 사뭇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국내에서도 간접적으로 사건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간간히 있어왔을 뿐 세월호를 극의 직접적인 소재로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2019년에야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떠올려본다면, 일본에서 3.11을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의 대부분이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혹은 <후쿠시마 50> 같은 극우파들의 프로파간다 같은 극영화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이러한 설명이 들어맞지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는 혜성 충돌과 홍수라는 다른 재난으로 대지진에 관해 우회적 묘사를 해왔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3.11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재난 당시의 이미지를 꽤나 직접적으로 끌어오기도 한다. 주인공 스즈메(하라 나노카) 또한 지진으로 어머니를 잃었으며 그에 관한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물론 여기서의 지진은 어떤 자연현상이라기보단 미미즈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일본 열도 밑에 잠들어 있으며, 주기적으로 깨어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소타(마츠무라 후쿠토) 가문이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문을 닫는 이 라는 뜻)’라는 역할을 맡아 요석(妖石)으로 그것을 봉인해 왔다는 설정이 들어간다. 때문에 주제의식 자체는 신카이의 두 전작과 유사하다. 막을 수 있었던 재난이 일어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하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어떤 일이 두 주인공에게 벌어진다. 세계의 운명, 혹은 세계 자체의 변화는 두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다. 일본 무속신앙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설정들도 전작들과 유사하다. 다만 전작들이 직접적으로 ‘무녀’나 ‘신사’의 이미지를 끌어왔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무당’이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소한 설정 상의 차이들은 중대한 차이를 지닌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대지진 당시의 이미지를 그대로 끌어온 ‘저세상’의 이미지는 참혹함 대신 어딘가 아름다워 보이는 방식으로 재난을 그려냈던 두 전작과 다르다. 다시 말해, 재난을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대신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세밀한 작화로 담아내었다. 두 전작이 재난을 없던 것으로 만들거나 되돌리는 방식을 택했다면, 이번 영화 속 재난은 이미 벌어진 것으로 지워낼 수 없는 상흔이다. 소타는 폐허들을 찾아다니고 그곳에 놓인 ‘뒷문’을 닫으러 다니는 사람이다. 물론 이 폐허들이 언제나 지진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온천마을이나 놀이동산처럼, 오히려 단순히 버려진 곳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야자키현에서 이와테현까지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여정에서 목격되는 폐허들은, 대지진과 같은 재난은 아닐지라도 일본인들이 언제나 시야를 돌리면 재난의 흔적과 같은 것을 목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반복하여 울리는 스마트폰 재난 경보, 요석이었던 고양이 요괴 다이진(야마네 안)의 목격담을 SNS에 올리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재난을 둘러싼 일본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스즈메의 문단속>의 또 다른 목표인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문단속’이라는 행위는 재난을 겪은 개개인이 트라우마를 넘어서 마침내 마음 편하게 애도할 수 있는 상황을 암시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 소타와 스즈메는 뒷문을 ‘문단속’하는 순간 그 폐허에 머물렀던 이들의 행복한 과거를 떠올린다. 폐허 위에는 존재할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을, 더 이상 행복함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 땅을 ‘문단속’해버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와 함께 살아가는 일본인’과 함께 ‘재난의 기억을 문단속하는 일본인’을 동시에 제시한다. 문단속이라는 소재는 어떤 면에서 모순적이게 되어버리는 두 가지 형식의 일본을 공존시킨다. 문은 본래 이 공간과 저 공간 사이에 있는 것으로 문의 존재는 서로 다른 두 공간의 공존을 의미한다. 그것을 닫아버리는 행위는, 이 영화에서 마치 슈퍼히어로의 초능력이나 마법처럼 스펙터클하게 묘사되며, 저 세상과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재난을 단절시킨다.

 하지만 ‘미미즈’로 표상되는 재난은 악이나 적이 아니다. <신 고지라>의 고지라처럼 무찌를 수 있는 대상도,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규정되어 되돌려져야 하는 <너의 이름은.>이나 <날씨의 아이> 속 재난 같지도 않다. 재난은 오로지 재난 그 자체로서만 이 영화 안에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두 전작이 해왔던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번복한다. 재난은 보이지 않아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뒷문이 열리는 순간 다시금 벌어질 것이다. 이 지점은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에 관해 온전한 추모를 마침내 마무리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에 가깝다. 이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공허해지기도 한다. 이 영화 속에서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몸짓은 벌어지고 있는 재난 속에서가 아닌 언젠가 반복될 재난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수행된다. 그 몸짓은 신카이의 두 전작에서와 시각적으로 유사하지만 질적으로 다르다. 궁극적인 애도로 향하는 한 소녀의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이 영화와 유사한 스와 노부히로의 <바람의 목소리>을 떠올려보자. <바람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향하는 곳은 일본 사회 내에 존재하는 유사한 재난의 피해자들, 재난의 트라우마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거쳐 감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속 스즈메가 지나간 길에는 오로지 스즈메의 안전한 여정을 바라며 순수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이들뿐이다. 물론 이러한 조연들이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모두의 동일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대지진이라는 공통적이면서도 한없이 개별적인 기억을 오로지 공통의 기억일 뿐이라 말하는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세카이계의 문법을 끌어오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 영화의 후반으로 향할수록, 스즈메와 소타 사이의 관계는 관객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세카이계의 핵심은 그것 아니었는가? 신카이 마코토는 그것을 버린 채 모두에게 동일한 기억, 동일한 방식의 애도, 동일한 방식의 극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것만 같다. 물론 여기엔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의 애도가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의 몸짓들에 비해 공허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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