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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5. 2023

뭔가 다른 기차여행의 낭만

<6번 칸> 유호 쿠오스마넨 2021

 모스크바로 유학 온 핀란드 학생 라우라(세이디 하를라)는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러시아 북쪽의 항구도시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함께 오기로 했던 연인이 급한 사정으로 오지 못하게 되고, 비좁은 2등실 객차에는 낯선 남자 료하(유리 보리소프)가 타고 있었다. 무르만스크에는 일하러 간다는 남자 료하는 객차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주정을 부린다. 라우라는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가려 하지만, 연인과의 통화 이후 다시 기차로 돌아간다. 그렇게 며칠 간의 기차여행을 함께하게 되며,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익숙한 기차여행의 여정과 낭만을 담아낼 것만 같은 이야기를 품은 영화 <6번 칸>은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핀란드 작가 로사 릭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

 <6번 칸>의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서로 다른 국적, 성별, 계층의 사람이 우연히 일정 기간을 함께하게 되며 서로를 알아가고 우정과 사랑을 쌓아가는 이야기는 무수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6번 칸>은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게 된 사람들이 갈등을 겪고, 싸우고, 서로를 탐색하고, 화해하고, 첫인상과는 다른 대상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익숙한 감흥을 넘어서는 순간들이 있다. 며칠 간의 여행을 담아내는 이야기지만 일탈과 같은 키워드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기차의 모습은 멀끔한 특등칸이 아니다. 라우라와 료하의 2등칸은 비좁고, 침대를 깔기 위해서는 짐 전체를 정리해야 하며, 이따금씩 다른 승객에게 침범(?)을 당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머무는 곳은 <설국열차>의 꼬리칸을 방불케 하는 3등칸에 비하면 다른 승객들과 분리된, 나름대로 편안한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6번 칸’을 보며 편안함 같은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라우라와 마찬가지로, 관객이 처음 목격하는 기차의 인상은 비좁은 6번 칸과 무뚝뚝한 승무원, 승무원이 나가자 곧바로 술과 담배를 꺼내는 료하 등등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익숙한 낭만의 순간을 보여준다. 기차가 쉬어가는 지역에서 하룻밤 보낼 곳이 없는 라우라는, 갑자기 차를 끌고 나타난 료하와 함께 그의 어머니 집으로 가 시간을 보낸다. 기차여행에서 자동차여행으로, 갑작스럽지만 따스한 새로운 만남의 순간으로, 영화는 라우라와 관객을 이끌어 간다. 라우라는 기차표를 잘못 끊은 것인지 승무원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핀란드인 여행객을 자신의 칸에 몰래 태워주기도 한다. 기타를 가지고 다니는 그는 마치 이것이 기차여행의 낭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밤새 기타를 연주하기도 한다. 잠시 기타가 정차하는 순간 라우라는 그 여행객과 역 근처를 둘러보며 친절한 러시아인들에게 술을 얻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낭만을 빠르게 박살 낸다. 라우라가 어떤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잠시나마 가졌던 낭만은 무너진다. 라우라가 데려온 여행객으로 인해 료하는 묘한 불편감을 표하고, 그 여행객은 연인의 모습을 찍은 라우라의 캠코더를 훔쳐간다. 이와 같은 방식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이는 마침내 무르만스크에 도착한 이후 라우라가 경험하는 상황에서도 이어진다.

 그러한 영화 속 상황들을 염두에 두었을 때, 라우라의 여행은 실패한 것처럼 다가온다. 여행이 시작하기 직전 연인이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고, 연인이 사용했어야 할 기차 칸에는 낯설고 거친 남자가 있으며, 낭만의 순간들은 바로 직후에 무너졌고, 무르만스크를 찾은 목적은 매서운 겨울 날씨의 방해를 받았다. <6번 칸>은 그러한 여행의 실패 속에서 섬광처럼 다가온 낭만의 순간들을, ‘기차여행’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형태의 방식이 아니라, 익숙한 낭만의 순간이 깨진 이후 눈앞에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을 성실하게 담아낸다. 비록 라우라는 캠코더를 잃어버렸지만, 그가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들은 남아있을 것이다. 때문에 <6번 칸>이 전달하려는 낭만의 방식은 이런 것이다. 여행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대신, 목격하고 기억하라. 기록은 여행 이후를 위한 것이다. 기록이 눈으로 목격한 것을 저장하는 과정이라면, 기억은 찰나의 낭만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실 이 여행에서 라우라가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없다. 기록은 그가 료하와 교환한, 서로의 얼굴을 그린 어설픈 그림이면 족하다. 일만 년 전의 암각화를 보러 가려던 라우라와 지금의 생활을 위해 기차에 탄 료하 사이의 간극이 마침내 사라지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그렇게 뭔가 다른 기차여행의 낭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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