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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0. 2023

소년 스필버그

<파벨만스> 스티븐 스필버그 2022

*스포일러 포함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 자신이 투영된 캐릭터 새미(가브리엘 라벨)가 영화 만들기를 멈추는 사건과 다시 시작하는 사건이 등장한다. 하나는 새미가 엄마 미치(미셸 윌리암스)와 아빠 버트(폴 다노), 아빠의 직장동료 베니(세스 로건), 그리고 세 여동생과 떠난 캠프를 찍은 ‘캠프 영화’다. 캠프에서 돌아온 새미는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해하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너의 ‘취미’를 동원해 영화를 만들라”는 아빠의 요청에 따라 영화를 만든다. 홈 무비이자 일종의 다큐멘터리일 수 있는 이 영화를 편집하던 새미는 엄마가 베니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이 함께 관람할 ‘캠프 영화’는 그러한 순간들이 빠진 채 완성되고, 영화를 본 미치는 “나를 정말로 볼 줄 아는구나”라며 새미의 영화에 감탄한다. 이후 미치와 베니를 무시하듯 며칠 간을 보낸 새미는 미치와의 말다툼 끝에 그를 방으로 데려온다. 자신의 벽장 안에 작게 꾸며진 시사실에서, 새미는 캠핑의 기록에서 삭제된 부분을 엄마에게 보여준다.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살아가던 파벨만 가족은 캘리포니아 북부로 이사를 떠나게 된다. 영화 만들기를 중단하고자 결심한 새미는 8mm 카메라를 팔기 위해 상점을 찾지만, 때마침 상점에 들른 베니는 그에게 훨씬 고가의 카메라를 억지로 선물한다. 파벨만 가족은 베니와 작별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새미가 다시금 카메라를 든 것은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에서 상영될 ‘땡땡이의 날’ 기록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그는 여자친구 모니카(클로에 이스트)의 아버지에게 빌린 아리플렉스 16mm 카메라를 들고 신나게 동급생들을 촬영한다. 졸업 무도회 당일, 모니카에게 생뚱맞게 청혼을 했다 보기 좋게 차인 새미는 모든 것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화를 튼다. 새미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운동회를 <의지의 승리> 뺨치는 웅장한 기록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상영이 끝나자, 새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놀리던 로건(샘 레크너)이 그를 찾아온다. 그는 새미의 영화 속에서 위대한 영웅처럼 묘사되었고, 자신이 바람피운 사실을 새미가 이실직고해 헤어졌던 여자친구는 새미의 영화를 보고 난 뒤 로건을 찾아와 키스했다. 로건은 그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낸다. 새미의 영화에 담긴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신 그대로 담겼기에 새미를 찾아온 채드(오크스 페글리)와는 정 반대의 이유다. 새미는 로건이라는 인물을 왜곡할 의도가 아니라 단지 좋은, 멋진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말하지만 로건은 그의 말을 기각한다. 

 <파벨만스>에는 새미의 손을 거친 무수한 영화들이 등장한다. 어린 새미는 부모님과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난 후,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의 폭력적인 매혹을 견뎌내고자 아버지의 카메라와 장난감 기차로 작은 영화를 만든다. 여동생들과 함께 케첩과 옥수수를 동원하여 B급 괴기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 하기도 하고, 뉴저지에서 피닉스로 이사 가는 과정을 담은 홈 비디오를 만들기도 한다. 10대가 된 새미는 보이스카웃 친구들과 전갈을 잡고 연구소에 팔아 필름 값을 벌어 영화를 찍는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본 그와 친구들은 그것을 패러디한 서부극을 찍는다. 앞서 언급한 ‘캠핑영화’와 ‘땡땡이의 날’ 영화를 제외하면, <파벨만스> 속에서 새미가 찍은 영화의 대부분은 괴기영화, 서부극, 액션영화, 전쟁영화 등의 장르영화이자 극영화이다.

 이를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새미의 영화 경력에서 전환점이 된 두 영화가 극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헌데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새미에게 작용한다. ‘캠핑영화’는 새미로 하여금 영화의 자동기록적인 성질, 카메라 렌즈 앞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록한다는 지점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공포스럽다. 어린 새미는 <지상 최대의 쇼> 속 기차 충돌 장면이 연출된 것이며, 실제로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영화를 찍으며 배운다. 극영화가 지닌 공포의 매혹은 부모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극복된다. 허나 캠핑영화라는 다큐멘터리 푸티지에 담긴 불륜 현장은 가공되지 않은 사실이기에 완전한 진실된 공포로 다가온다. 캠핑 장면에서 새미는 얇은 슬립을 입고 춤추는 미치를 찍는다. 버트는 미치를 지켜볼 뿐이고, 베니는 엄마의 춤이 더욱 잘 보이게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켠다. 옷이 얇기 때문에 미치의 몸 실루엣은 마치 그림자극처럼 생생하게 비쳐 보인다. 새미의 첫째 여동생 레지(줄리아 버터스)가 엄마를 가로막아보지만, 세 남성과 미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감상하고 춤을 춘다. 레지 또한 결국 자리로 돌아가 춤추는 엄마를 바라보고 결국 미소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이 시점에서 새미는 이미 영화 카메라가 지닌 외설성을 즉각적으로 알고 있다. 영화는 무언가를 엿보고 기록한다. 그렇게 때문에 영화는 공포스러우며, 진실을 품게 된다. 새미는 자신이 애써 무시하던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캠핑 이후 새미는 친구들과 촬영한 2차 대전 배경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친구에게 연기 디렉팅을 한다. 새미는 그에게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전우가 전멸한 상황에서 멍하니 걸어가는 연기를 요청하고, 그 장면을 촬영하던 중 친구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컷을 외쳐야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새미는 컷을 외치지만, 새미의 연기 디렉팅을 받아 몰입 중인 주인공은 친구들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계속 걸어간다. 연출된 것, 진실된 것, 카메라에 담긴 것, 편집기를 통해 조작된 것, 연기되는 것, 실제로 벌어지는 것, 이 모든 것은 새미의 영화(들) 속에서 끊임없이 뒤섞인다.

 ‘땡땡이의 날’ 영화는 기록영화이자 연출된 픽션이다. 새미는 모니카와 함께 해변에 누워있던 친구들을 찍는다. 새미가 하늘에 날아가는 갈매기를 찍다가 빠르게 친구의 얼굴로 카메라를 돌리면, 모니카가 친구의 얼굴에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떨어트려 새똥을 맞은 것처럼 연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출된 것은 아니다. 마치 <탑 건>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배구하는 장면처럼 로건과 친구들을 찍는다든가, 림보 경기에서 홀로 성공한 뒤 환호하는 로건과 그의 전 여자친구 클라우디아를 한 숏에 담는다든가, 이러한 방식은 새미의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는 누군가에게 연기를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가 캠핑영화에서 배운 것은 카메라의 외설성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더불어 로건의 남성적이며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숏들과 초라한 채드의 모습을 담은 숏들을 편집의 힘으로 교차함으로써, 새미가 만든 ‘땡땡이의 날’은 로건을 주인공 삼은 영웅 영화가 된다.

 여기 까지만 놓고 본다면 <파벨만스>는 영화소년 새미가 영화에 매혹되고,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영화가 지닌 성질을 깨우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The Fabelmans>다. 영화의 제목은 <Sammy>도 <Fabelman>도 아니라 ‘파벨만 가족’을 지칭하고 있다. 새미가 캠피영화를 편집하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피아니스트였던 미치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거실 테이블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던 버트는 마치 지휘를 하듯 펜을 휘두르고 있다. 숏-리버스 숏으로 부모님의 모습이 교차된 뒤, 2층 자신의 방에서 편집하는 새미의 모습이 등장한다. <파벨만스>에서 새미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은 채 다른 가족들이 독단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새미의 주된 촬영대상은 가족이었고,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갑작스레 찾아온 미치의 외삼촌 보리스(주드 허쉬)는 새미가 평생 가족과 예술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될 것이라 예언하듯 말한다. 그 예언은 너무나도 빠르게, 새미가 미치와 베니 사이의 관계를 필름으로 목격하게 되며 실현된다. 유년기 내내 이어지는, 새미가 영화라는 매체를 습득하는 과정은 가족과 강력하게 결부된다.

 새미에게 영화는 연출할 수 있는, 일종의 통제 대상이다. 새미가 촬영하고, 직접 고안한 특수효과를 도입하고, 연기를 디렉팅하고, 직접 편집하고, 상영까지 하는 모든 과정에는 새미의 손이 개입된다. 새미의 카메라 앞에서 새미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가족이다. 가족은 종종 새미의 통제에 따라 연출된 촬영의 대상이 되어주지만, 캠핑영화의 사례처럼 언제나 통제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은 발견의 대상이다. 영화는 새미가 가족을,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으나 카메라가 대리하여 목격한 가족의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게끔 해준다. 때문에 캠핑영화를 본 미치가 새미에게 건넨 말, “나를 정말로 볼 줄 아는구나”은 다층적인 의미로 새미에게 충격을 건넨다. 베니와의 관계가 캠핑영화의 시선(과 편집)에 녹아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한때 예술가였던 미치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의미인가? 화목한 파벨만 가족(과 베니)의 모습을 가장 진실되게 담아냈다는 의미인가? 새미는 카메라의 외설성을 견디지 못하고 카메라를 팔아버리지만, 카메라는 외설의 대상인 베니를 통해 강제적으로 되돌아온다. 새미에게 카메라는 일종의 분출구였으나, 어느새 진실을 폭로하고 왜곡할 수 있는 장치로서 되돌아온다. 때문에 새미는 가족이 아닌 베니를 통해 카메라를 돌려받는다. 피아노 치는 미치와 펜을 흔드는 버트의 숏들 이후 새미가 편집하는 장면이 나열된 것은 새미-영화-가족이라는 독특한 삼각구도의 몽타주다. 이 구도 속에서 새미의 콤플렉스는 해소되지 못한다. 새미는 <파벨만스>의 마지막까지 영화소년일 뿐이다. 어머니의 불륜, 아버지의 이직으로 인한 잦은 이사, 부모의 이혼. <파벨만스>는 영화소년이 어떻게 영화의 신이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신이라고 불리지만 언제까지나 소년이고 싶은 노장 감독의 이상한 욕망이 결부된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성인이 된 새미는 CBS에 면접을 보러 간다. 면접 담당자는 TV보단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새미의 편지를 읽고 옆방에 있는 최고의 영화감독과 만나게 해주겠다 말한다. 그는 존 포드(데이빗 린치)다. 새미가 여동생과 부모와 친구를 대동해 서부극을 찍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다. 얼떨떨하게 앉아 <역마차>부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이르는 포스터를 보던 새미는 포드의 방에 들어간다. 시가를 뻑뻑 피우던 린치는 새미에게 벽에 걸린 그림 앞으로 가 그림을 설명해보라 한다. “말에 탄 두 사람이 있고~”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려던 새미에게 존 포드는 지평선이 어디 있는지 보라고 한다. 그림에서 지평선은 화면 바닥에 있고, 포드는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대상이 크게 보인다 말한다. 다음 그림, 지평선은 화면 위에 있고, 인물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고 포드는 말한다.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로운 것이야. 지평선이 위에 있으면, 흥미로운 것이야. 지평선이 중간에 있으면, 뭣같이 지루하지. 그럼, 행운을 빈다. 이제 내 사무실에서 꺼져!”

 존 포드를 연기한 것이 하필이면 데이빗 린치라는 지점을 한참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넘어가자. 포드의 말을 듣고 감사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간 새미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스튜디오 사이를 걸어간다. <파벨만스> 포스터에 쓰인 그 장면이다. 지평선이 중간에 있던 와중에, 마치 촬영자가 카메라 렌즈를 억지로 위로 올리는 듯한 움직임과 함께 지평선을 화면 아래에 맞춘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이 장면은 <파벨만스> 전체를 통틀어 <파벨만스>의 카메라, 다시 말해 <파벨만스>를 찍고 있는 화면 바깥의 카메라가 가장 강렬하게 감지되는 장면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새미와 그의 시선을 경유하여 등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벨만스>의 모든 장면은 새미-스필버그의 통제 하에 있다. <파벨만스>의 카메라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파벨만스>라는 영화 내부의 정합성을 벗어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소년 시절을 옮겨온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사건, 심지어 엄마가 죽은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는 꿈을 꾼 뒤 보리스 삼촌이 찾아온 일화라던가, ‘땡땡이의 날’ 영화 상영 이후 동급생이 찾아온 일 등등은 스필버그가 실제 경험한 일이다. 스필버그는, 마치 영화 속 새미의 영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는 스필버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근작들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더 포스트>, <레디 플레이어 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보여주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숏 설계를 보고 있자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파벨만스>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숏은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정확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연출되고 촬영되고 편집되었다. 단 하나, 영화 외부에서의 조작이 개입하는 마지막 숏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는 두 편의 논픽션 영화를 제작한 경험과 존 포드와의 만남을 통해, 새미가 영화소년기를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스필버그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영화, 즉 의도치 않게 촬영된 이미지를 발견하거나 의도치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두 영화를 통해 새미가 영화의 성질을 깨우치는 과정을 담아냈다. 이 과정은 스필버그의 완벽한 통제 속에서 영화화됐다. 스필버그는 자신을 영화화한다. 이 속에서 새미는 영웅도, 성인(聖人)도, 성인(成人)도 아니다. 그는 그저 영화 만들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이 소년은 성정과정 속에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새미의 카메라 앞에서 촬영되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새미를 놓는다. 새미는 가브리엘 라벨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어린 스필버그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이 배우가 맡은 역할은 소년 스필버그이며,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소년일 뿐이다. 이 소년은 영화의 외설성, 관음증적인 면모, 기적이자 흑마술인 편집을 배운다. 마침내 자신의 우상인 존 포드를 만나는 순간에도, 만남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순간에도 그는 소년이다. 오로지 영화의 마지막 순간만이 새미의 형상이 감추고 있던 스필버그의 존재를 드러낸다. 때문에 <파벨만스>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노장의 노스탤지어 가득한 영화라든가, 영화(혹은 할리우드)에 관한 애정(혹은 애증)을 듬뿍 담은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새미 같은 소년이고 싶은 사람임과 동시에 자신이 영화에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애교 섞인 장난처럼 보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리어 <죠스>나 <우주전쟁>만큼이나 무섭고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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