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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05. 2023

본다는 것

<물안에서> 홍상수 2023

 이미 알려진 사실대로, <물안에서>의 모든 장면은 아웃포커싱 되어있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장면의 포커스는 맞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에 바셀린을 바르거나 스타킹을 씌우는 등 몇몇 감독들이 실험적으로 도입한 촬영수단들과 이 영화의 아웃포커싱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어쨌든 대상을, 그것이 배우이건 건물이건 풍경이건 그 표면을 선명하게 포착한다는 목적을 잃지 않았다. <물안에서>는? 이 영화의 전부를 보았지만 배우들의 얼굴, 특히 홍상수 영화에 처음 등장한 김승윤 배우의 얼굴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배우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포커싱조차도 제공하지 않는다. 선명한 서체의 타이틀 크레딧과 다르게,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마저 흐릿하게 처리해두었다. 영화에서 아웃포커싱은 그리 새롭지 않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61분의 러닝타임을 모두 아웃포커싱된 흐릿한 화면으로 제작한 영화는 처음 보고 듣는다. 물론 실험영화에 과문한지라 그러한 영화가 또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영화는 성모(신석호)가 대학 동문인 친구 상국(하성국), 후배 남희(김승윤)와 제주도에 머무르며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떤 영화를 찍을지 모른 채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탈탈 털어 제주도로 온 성모는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촬영지를 물색하기 위해 돌아다닌다. 성모는 우연히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동네 주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촬영을 시작한다. 근작 <소설가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익숙한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물안에서>는 홍상수 영화 특유의 선문답 같은 이야기도, 뜬금없이 폭소를 터트리게 만드는 지리멸렬한 대사도 없다. 저 흐릿한 화면 속 세계는 관객이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마치 저 세계와 관객석 사이에 극장 스크린 이상의 희뿌연 장막이 쳐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모가 대본을 준비하는 사이 산책을 다온 상국과 남희는 귀신을 믿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남희의 물음에 상국은 차라리 귀신을 한 번 봤으면 좋겠다며, 그렇다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해진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상국의 말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음을 안다. 보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그의 말은 귀신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그의 말은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선언이다 다름없다. 

 그렇다면 마치 귀신의 시선처럼, 희뿌연 막 뒤에 서서 흐릿한 화면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관객은 그들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가? 귀신이 상국과 시선을 교환하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물안에서>는 마치 귀신처럼 흐릿한 시야로 인물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객의 눈앞에서만 성립되는 그러한 영화라는 이야기인가? <물안에서>의 흐릿한 이미지들은 홍상수가 오랫동안 흠모해 온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닮았다. 세잔의 대한 홍상수의 애정을 알고 있다면, <물안에서>를 보며 인상주의 회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상주의는 대상이 우리 눈에 들어와 닿는 그대로를 포착하고자, “자연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만나는 현상 그 자체를 포착”(메를로-퐁티)하고자 하였다. 물론 홍상수가 인상주의 회화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일견 귀신의 시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영화의 흐릿한 이미지들을 보고 있자면, 홍상수가 제주도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물안에서>를 복기할수록 시사회 도중 영사기 포커스가 나간 것 아니냐며 동행자와 대화하다 극장 밖으로 나간 사람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전정보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 대부분의 반응이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남다은 평론가는 필로 31호에 실은 글에서 영화 초반부를 보며 “안경을 제대로 닦지 않아 스크린이 살짝 뿌옇게 보인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물안에서>의 이미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는 “정신 차려!”라는 누군가의 외침은 영화 바깥의 객석에서 날아온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물안에서>의 이미지는 이례적인 선명하지 못함 때문에 발생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 정확히는 죽음충동이 아른거리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아웃포커싱의 흐릿함으로 인해 죽음으로 향하는 듯한, 소멸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바닷속으로, 물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성모의 모습은 <물안에서>의 마지막 장면이자 ‘성모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카메라의 ‘자동적인 눈’이 홍상수의 시선을 인상주의 회화의 그것처럼 대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답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뿐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관객들의 질문엔,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맞다”는 홍상수식 선문답을 남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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