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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02. 2023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후기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노경무 2023

오랜 시간 시험관 임신에 실패한 부부가 남성임신을 택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블랙코미디. 익숙하고 단순한 방식의 미러링을 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 이후에 겪게 되는 여러가지 일들, 가령 체형의 변화, 경력단절, 육아의 고통, 세상의 시선 등을 남성이 고스란히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단순한 설정을 개성 있는 작화와 목소리 연기로 밀어 붙이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부부가 모두 임신하게되는 후반부의 장면을 보며 떠올린 것은 동시에 임신한 트랜스젠더 부부의 사진이다. 영화 속 부부가 동시에 임신하고, 요가원에서 동시에 양수가 터지는 등의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영화 전체가 담아낸 임신 이후의 경험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영화는 임신이라는 경험 혹은 상황을 젠더에서 분리해내 보편적 경험으로 다루려고 하려는 것만 같다. 물론 이는 영화에 대한 적극적인 오독이다. 하지만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이 보여주는, 그리고 연상시키는 어떤 이미지들은 임신이라는 경험이 일종의 보편으로 다가올 때에야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만 같다.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 스테피 니더촐 2023

한국어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원제는 <테헤란에서의 일곱 겨울(Sieben Winter in Teheran)>이다. 2007년 19살이었던 레이하네 자바리가 자신을 강간하려던 남성을 살해하게 되고, 그 이후 7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어 보낸 시간을 다룬다. 남성은 이란 정보부 인사였으며, 그렇기에 사법당국은 이 사건을 레이하네의 '계획 살인'으로 몰아가려 한다. 영화는 레이하네와 그의 가족이 경험한 7년 동안의 시간을 통해 성차별적인 이란의 사회와 사법체계, '피의 복수'라는 야만적인 방식의 사형제도 등을 고발한다. 레이하네와 가족 사이의 통화, 다른 이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레이하네의 편지,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홈비디오와 가족의 투쟁기 등은 2014년 레이하네의 처형으로 일단락된 이 사건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한다. 미니어처로 재현된 감옥과 재판장의 텅 빈 모습은 그 공간에서 일곱 번의 겨울을 살아냈을 레이하네의 시간을 상상하게끔 한다. 동시에 레이하네는 감옥에서 만난 자신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처지의 여성들과 연대할 뿐 아니라 그들의 용기를 복돋아주는 존재가 되고, 감옥 바깥 레이하네의 가족(특히 어머니)은 인권운동가로 거듭난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이란의 '히잡시위'까지 이어지는 이란의 여성인권 운동사 중 중요한 대목 중 하나인 사건을 충실히 설명한다.

<알렌스워스> 제임스 베닝 2022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알렌스워스는 1908년 미국 최초로 흑인이 설립 및 통치한 마을이다. 베닝은 이 마을의 풍경을 월 별로 담아낸다. 이파리도 피지 않은 황량한 나무를 비추는 1월의 풍경에서 시작해 알렌스워스의 주택, 상점, 교회, 학교, 무덤 등을 담아낸다. 단 12개의 숏과 한 개의 사진, 두 곡의 노래와 한 편의 시 낭송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베닝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카메라 앞에 선 풍경에 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곳의 시간을 관객과 나누고, 관객이 그곳을 찾아보고프게끔 유도한다. 언제나 미국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베닝의 영화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국의 한 단면을 카메라로 도려내 스크린에 영사한다. 작년 전주에서 <미국> 상영이 그랬던 것처럼 <알렌스워스>도 작품 속 간자막과 노래의 한국어 자막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대신 종이에 프린트해 관객에게 나누어주었다. 미국 바깥의 관객에게 영화의 구성 전체가 담긴 종이를 공유하는 이 방식은, 영화 내에서는 크게 설명해주지 않으나 영화 바깥에서 영화의 대상을 탐구하게끔 유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킴스 비디오> 데이비드 레드먼, 애슐리 새이빈 2023

21살의 나이로 뉴욕에 이민 온 김용만은 운영하던 세탁소에서 작게 비디오 대여를 시작한다. 비디오 대여가 세탁소 수입을 앞지르자, 1987년 그는 '킴스 비디오'라는 이름의 비디오 대여점을 차린다. 블록버스터와 같은 거대 체인 대여점과 달리, 킴스 비디오의 주력 상품은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나 유럽 영화가 아니라, 감독들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영화들, 극장에 정식개봉하지 못한 영화들이었다. 김용만은 직원들을 전 세계 영화제에 보내 영화를 수급해오게끔 하기에 이른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알렉스 로스 페리 등 유명 감독들 또한 그곳의 직원이었다. 하지만 해적판을 대여했기에 FBI의 표적이 되었고, 2008년 결국 문을 닫는다. 5만 5천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이 넘어간 곳은 대학도 도서관도 시네마테크도 아닌 이탈리아 시칠리의 살레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당시 살레미 시장은 킴스 비디오 컬렉션을 잘 보관하여 대중에게 개방하고 디지털화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컬렉션이 방치되기에 이른다. 감독인 데이비드 레드먼은 킴스 비디오의 회원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어느 날 자취를 감춘 킴스 비디오의 행방을 찾고자 살레미까지 날아간다. 그곳의 상황을 알게 된 그는 김용만을 만나고, 방치된 컬렉션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오고자 한다. 이 영화는 영화를 물리매체로만 접할 수 있던 시기의 해적왕이 쌓아둔 방대한 영화적 보물을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후대 해적의 이야기다. 마테리알에 연재된 한민수의 글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이 온라인 시대의 해적질에 관한 이야기라면, <킴스 비디오>는 '원본'과 물리적 '사본'이 존재하는 시기의 해적질에 관한 것이다. 이 해적질은 무수한 시네마테크나 도서관이 이룩하지 못한 컬렉션을 만들어냈다. 감독은 영화 속에 "소유권보다 영화지식의 공유가 중요"하다는 킴스 비디오 직원의 말을 삽입하고, 도둑질에 관한 짐 자무쉬의 말과 저작권에 관한 고다르의 말을 덧붙인다. 이 영화 자체도 공정이용 제도를 통해 무수한 영화의 장면을 '도용'해온다. '도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실제 영화의 장면 속 대사를 감독의 말로 종종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독은 살레미에 있는 컬렉션을 해적질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하기에 이른다. 가짜 하이스트 영화를 촬영하겠다고 당국의 허가를 받은 그는 가짜 영화 속 장면의 촬영을 위해 컬렉션을 포장하고, 훔친다. 감독이 <아르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이 기상천외한 작전은 단순한 절도행위라기보단, 자본/기관/정부 등에 의해 문자 그대로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는 영화를 구조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킴스 비디오 컬렉션의 많은 영화들을 온라인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담아낸 이야기는 영화-해적질의 근본적인 목적과 성취를, 그것이 온라인상의 해적질로 옮겨간 지금에도 일정부분 가치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셀룰로이드 페티쉬> 가네코 유 2023

일본의 실험영화 감독 오쿠야마 준이치의 작업을 기록한 작품. 준이치의 작업은 8mm와 16mm 필름, 혹은 9.5mm 필름이 기반이 된다.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거나, 9.5mm 필름을 16mm 필름 위에 인화한다던가, 필름을 표백제에 담궈 유화제가 떨어져 나간 상태를 영사하는 등의 작업을 보여준다. 혹은 고장난 영사기에 필름을 넣어 발생하는 소리로 퍼포먼스를 벌이거나, 두 개의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며 영사기 앞에서 부채를 움직이며 사람의 움직임으로 '플리커' 효과를 만드는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선보인다. 다만 이 영화는 오쿠야마 준이치의 작업을 인터뷰나 내레이션으로 직접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 그의 작업을 '영화 해체 시기'부터 '영화 발굴 시기' 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한 뒤 그가 해온 작업의 일부분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디지털로 촬영된 영화이기에 오쿠야마의 작업이 보여주는 실험적이며 물질성이 강조되는 형태를 <셀룰로이드 페티쉬>라는 작품 자체가 보여주지는 않는다. 고장난 영사기, 필름 퍼포먼스 등 오쿠야마의 작업 대부분이 일회적 혹은 소모적 성격을 보이기에, 이 영화는 종종 오쿠야마의 작업에 관한 다큐멘트 영상에 가깝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오쿠야마의 작업에 관한 친절한 소개나 진지한 비평으로 이어지진 못한다. 다만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영화 필름에 강렬하게 매혹된 오쿠야마라는 작가의 존재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 정도는 성공한다.

<이 거리는 어디에 있나요?>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 주앙 후이 게라 다 마타 2022

포르투갈 시네마 누보의 기수 파울루 호샤의 <녹색의 해>(1963)에 관한 오마주이자 리메이크이다. 두 감독은 리스본을 산책하는 영화였던 <녹색의 해>가 담아낸 공간을 그대로 찾아가 그대로 담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담아낸 리스본은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이 한창인 시기였다는 점이다. 공공장소의 스피커에서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에 대한 안내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배달을 업으로 삼는 노동자들의 새그웨이나 오토바이 등이 종종 카메라에 포착될 뿐이다. 텅 빈 거리를 과거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찍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롭지 못할 뿐더러, (프로그램 노트에 적힌 것처럼) 리스본에 관한 명상 혹은 시적 경의가 되는지도 알 수 없다. 서울을 <오발탄>과 같은 방식으로 찍은 지현재의 영화를 보게된다면 이 영화를 이해할 할수 있을까? 이 영화는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관객에게 소개하거나 각인시키는 대신, 그곳을 어느정도 이미 알고 있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삼는 것만 같다.

<레볼루션+1> 아다치 마사오 2022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피살된다. 아다치 마사오는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의 이야기를 극화한 영화를 만든다. 실명 대신 카와카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를 주인공 삼는 이 영화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아베를 암살하기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의 시간을 빠르게 담아낸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카와카미의 삶은 불운 그 자체다. 적군파 친구를 두었던 아버지는 자살했고, 어머니는 통일교에 전 재산을 헌금한다. 형은 소아암으로 인해 한쪽 눈을 실명하고 끝내 자살한다. 카와카미는 자신의 삶을 망친 주범으로 통일교를 지목하고, 통일교와 내통해온 아베를 암살하고자 결심한다. 사건이 벌어진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2022년 9월 50분 가량의 편집본으로 일본에서 소규모 개봉한 바 있는 <레볼루션+1>은, 제작기간이 엄청나게 짧은만큼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 살인마를 다룬 아다치 마사오의 전작, 특히 <약칭 연쇄살인마> 같은 작품이 사건과 인물의 직접적 재현을 피하는 일종의 풍경영화였음을 떠올려보면, 아베 신조의 피습 직전 모습과 그를 겨냥하는 카와카미의 모습을 몽타주하는 후반부의 장면은 한없이 정치적이다. 한없이 열악한 촬영, 연기, 세트 등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카와카미의 삶은 실제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의 삶을 그대로 가져왔고, 아베가 피습당한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인근의 장소에서 촬영하기도 하였다. 만듦새는 열악할지언정, 사건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영화의 구성은 꽤나 선명하다. 덧붙여 이 영화는 일본영화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는, 살인마를 주인공 삼은 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대부분 차용해온다. 사건을 빠르게 재현한 뒤 영화를 배급하는 아다치 마사오의 실행력과 더불어, 재현의 방식과 장르적 특성을 함께 떠올려보자. <레볼루션+1>은 이 영화가 제작되고 개봉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정치의 뒤안길로 물러간 사건을 가능한 빠르게 복기하고 논쟁의 물꼬를 터 보려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사적인 영화> 자나이나 나가타 2022

감독은 16mm 영사기를 테스트하기 위해 중고 필름을 구매한다. '사적인 영화'라는 제목의 필름은 한 백인 가족의 여행을 담은 홈 무비이며, 이미 한 차례 편집된 영상이다. 감독은 자막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설명한 뒤 19분 분량의 영상 전체를 보여준다. 국립공원의 야생동물, 휴양도시의 풍경, 원주민 부족 마을, 백인들의 파티 등이 스쳐 지나간다. '사적인 영화'를 한 차례 보여준 감독은 영화의 세부를 하나하나 구글링하기 시작한다. 구글번역과 텍스트를 읽어주는 시스템은 훌륭한 영화적 도구가 된다. 데스크탑 필름의 형식으로 영상의 탐구과정 전체를 담아내는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영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한다. 다만 1960년대 백인 가족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여행하며 촬영한 이 영상이, 당대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작동하던 정치적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음이 점차 드러난다. 탐사과정 중 발견한 유튜브 영상의 댓글은 인종 격리 정책이 폐지된 지금에도 아파르트헤이트는 지속적인 문제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공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댓글들, '아파르트헤이트의 설계자' 헨드릭 베르부르트가 유명 주술사와 맺었던 관계 등이 19분의 짧은 영상 속에서 추출된 이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어떠한 경로로 60년대 남아공의 영상이 2022년의 브라질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적인 영화'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작은 영상은 구글 시대의 고고학적 대상이며, 온라인상의 무수한 서비스들은 스크린이라는 발굴현장 위에서 만족스러운 발굴도구로 기능한다. 발견된 사실을 흥미롭게 배열하는 익숙한 '파운드 푸티지'의 방식을 넘어, <사적인 영화>는 푸티지의 세부를 발굴해낸다.

<영시네마> 이브 마리 마헤 2023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프랑스 예르에서 열렸던 영화제 '영시네마국제영화제'를 다룬 작품. 아카이빙 된 당시의 영상들을 편집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당시 프랑스 영화의 '주류'를 차지하던 칸국제영화제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는 신인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고자 시작된 이 영화제는 고다르, 샤브롤 등 스타 감독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고, 샹탈 아커만, 레오 까락스, 필립 가렐 등이 커리어 초기작을 선보였던 곳이며, 뒤라스가 '대안 영화'라 불리는 섹션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시네마>는 이 영화제의 흥망성쇠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수많은 분량의 아카이브 푸티지 위에 자막으로 무수한 이름들을 보여주며 영화제의 성공을 자랑하다가도, 영화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다가도, 관객과 감독과 심사위원이 맹렬히 논쟁을 벌이는 현장을 보여주다가도, 그것들이 모두 불가능해진 영화제 내외부의 요인을 드러낸다. 20회를 채우지 못한 이 영화제가 겪은 풍랑은 최근 국내 영화제들의 상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영화 산업 혹은 제도의 변화를 논쟁적으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영화제의 한계, 지자체와 결합되어 있기에 지자체장이나 의원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 과거와 같은 관심을 이어가지 못하고 동력을 잃어버리는 상황 등은 최근 1~2년 사이의 영화제들에서 목격된 것이다. 때문에 <영시네마>는 영화제의 생애주기라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인간 육체의 꽃> 헬레나 위트만 2022

다섯 남자 선원과 항해하는 선장 이다는 알제리에 주둔했던 외인부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발해 지중해를 건너 알제리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인간 육체의 꽃>은 이 여정을 천천히 쫓아간다. 전작 <표류>에서 한없이 바다를 응시했던 헬레나 위트만은 이제 그곳을 가로지른다. 지구는 둥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멀어지면 다른 곳에 가까워진다며 집 없는 이에게 지구가 최고의 집이라는 선원의 말처럼, 이들의 여정은 머무를 수 있는 다른 어떤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 <아름다운 직업>에서 프랑스 외인부대로 출연했던 드니 라방이 이번 영화에서는 알제리에 머무는 전직 군인으로 영화의 에필로그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클레르 드니의 영화에 관한 헬레나 위트만의 응답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느릿하게 알제리로 향하는 배와 그곳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의 모습, 식사를 하거나 이발하거나 잠을 청하는 모습 등이 배와 함께 흔들리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이 곳에서 저 곳으로 흘러가는 육체의 시공간을 담아낸다. 

<미로 시퀀스> 블레이크 윌리엄스 2023

바르셀로나의 라베린트 도르타 공원은 에로스 조각상을 중심에 둔 미로 구조다. 영화는 이 미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을 3D로 담아낸다. 3D라는 기술이 재차 사장된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3D 작업을 이어가는 블레이크 윌리엄스는 미로를 구성하는 평면들이 3D의 깊이감을 다채롭게 부여할 수 있는 요소라 여기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의 평면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것만 같다. 이 영화의 3D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것보다 과장되어 영화의 화면이 스크린 바깥까지 끌려 나와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기존의 영화가 스크린을 경계로 그 안에 속한 화면만을 다루는 것이라면, <미로 시퀀스>는 스크린 바깥과 내부를 아우르는 입방체로서의 영화를 실험해본다. 영화의 전반부가 미로를 비롯한 공원의 풍경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는 미로가 배경이 되는 흑백영화를 3D로 컨버팅 하여 보여준다. 관객과 함께 미로에 던져진듯한 배우는 그곳을 헤매고, <미로 시퀀스>는 (마치 감독의 전작 <프로토타입>이 그랬던 것처럼) 3D를 가능케하는 레이어들을 헤집어 놓듯이 번쩍이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감독이 꾸준히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영화 또한 강력한 영화적 환영으로서의 3D가 지닌 매력과 임계점을 함께 실험한다. 

<마지막 것들> 데보라 스트라트맨 2023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멸종한 이후에, 혹은 지구가 박살난 이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데보라 스트라트맨의 신작 장편영화는 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흥미롭게도 그 답을 '마지막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기원에서 찾는다. 지구에 떨어진 운석, 지구를 비롯한 행성의 내핵을 구성하는 물질, 과포화된 산소 속에서 탄생한 미토콘드리아와 미생물들, 다윈의 '진화 나무'에서 해러웨이의 이론에 이르는 다양한 진화에 관한 논의들. '마지막'을 다룬 여러 영화들이 인간이 사라진 지구, 혹은 지구가 멸망하는 과정 등을 그려낸다면, 스트라트맨은 그러한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광석과 미생물의 현미경 영상부터 광범위한 계통의 진화를 설명하는 이미지까지 객관적이며 대상이 명확한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주며, 기원부터 마지막까지 동일한 것으로 존재할 것들, 이를테면 원자, 전자, 광석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이는 과학적인 증명이라기보단, 객관적 과학으로서의 지질학(혹은 진화생물학)과 시적 영화의 만남이다. 거대한 시공간 속에서 미미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기보단 그 모든 것이 있었고 있을 것이기에 인간 또한 존재한다고 역설하듯, 길거리에서 춤추는 이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그 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H>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 2022

1967년, 감독의 삼촌은 산 페르민 축제의 황소몰이 행사 중 쇠뿔에 찔려 즉사한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하룻밤 동안의 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감독은 삼촌의 죽음에 연관된 미스테리를 조사하고자 한다. 다만 <H>는 익숙한 추리극이나 수사극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축제 현장을 찾는다. 밤새워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이들 사이를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닌다. <H>는 그러한 축제의 이미지, 축제의 분위기 자체를 즉각적으로 담아내보고자 하는 이미지를 통해 삼촌의 행적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 시도는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무수한 인파가 똑같이 흰색 옷을 입은 채 돌아다니는 축제 현장에서 홀로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삼촌을 따라 청자켓을 입은 이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삼촌이 경험했을 시간을 50여년이 흐른 뒤 재현하려 한다. 다만 이 재현은, 앞서 익숙한 추리극, 수사극, 추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이 아니라 말했던 것처럼, 한없이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향연만으로 구성된다. 이미지는 정보가 아닌 감각만을 전달할 뿐이다. 이 감각은 관객으로 하여금 산 페르민 축제와 삼촌의 죽음에 관해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바깥으로 관객을 밀어낸다. 나는 이 영화 바깥으로 튕겨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활동가> 박마리솔 2023

오랜 시간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이윤정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교회를 그만둔다.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 현장에서 활동해온 그는 어느 이주민 인권단체에서 비상근 활동가로 일하게 된다. 이윤정의 딸인 박마리솔 감독은 자신의 직업을 주부와 활동가라 말하는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어머니의 일상과 모녀관계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적 다큐멘터리라 부를 수 있지만, 동시에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어머니의 공적인 모습을 동시에 담아낸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이윤정이 "어쩌다 활동가"가 된 과정을 담아내려 한다. 신실한 교인으로서 교회에서 다양한 봉사를 해온 이윤정의 심성이 세월호 참사를 분기점 삼아 다양한 사회문제에 연대하는 것으로 향하고,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방식의 봉사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딸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박마리솔 감독뿐 아니라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종종 받는 것 없이 일하는 이윤정의 활동에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답답해하기도 한다. 결국 감독 또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영화의 후반부를 보고 있자면 한 사람의 활동이 주변인을 변화시키는 모습에 감명받게 된다. 다만 <어쩌다 활동가>는 무수한 단점 또한 갖고 있다. 이윤정의 여러 활동들을 보여주지만 활동 혹은 활동단체 등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고, 활동의 의미가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 주인공은 이윤정이지만 감독인 박마리솔의 시선을 따라가는 방식이기에, 교회에서 인권 활동가로 변화한 이윤정의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가 담기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봉사했던 것과 지금의 활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양하고 강도높은 활동 속에서 내적인 부침을 겪지는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답이 영화에 담기지 못했다. 영화의 출발점이 어머니이자 활동가인 이윤정인지, 감독 자신인지 명확하게 설정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클로린도 테스타> 마리아노 지나스 2022

마리아노 지나스는 자신의 아버지 훌리오 지나스가 아르헨티나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클로린도 테스타에 관해 쓴 책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지인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훌리오 지나스인지, 클로린도 테스타인지, [클로린도 테스타]라는 제목의 책인지, 혹은 마리아노 지나스 자신인지 헷갈려한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책 [클로린도 테스타]에 관한 것인데, 마리아노 지나스는 자꾸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가로막는다. 훌리오던 클로린도던 책이던 영화는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와 정보를 풀어내다가도, 자꾸만 마리아노가 편집자와 함께 있는 편집실로 되돌아온다. 마리아노는 내레이션과 지인들의 반응을 통해 반복해서 이야기의 진행을 가로막는다. 그의 전작 <라 플로르>가 포스터의 그림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도 되돌아오기도 하였던 것처럼,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무수한 변주와 순환을 만들어내며 내러티브의 실험을 반복한다.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스크린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리아노 지나스 본인의 말재간과 유머가 답답함을 해소해준다. 감독이 오래된 사진을 꺼내들며 가족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마리아노의 말은 그대로 실천된다. 다만 단순히 그러한 다큐멘터리들의 경향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마음껏 뒤튼다. "가지고 논다"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한 명의 이야기꾼으로서 마리아노 지나스가 품은 역량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것을 확인하기에 <라 플로르>는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면, <클로린도 테스타>는 흥미로운 대답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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