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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8. 2023

실패한 농담 속에서 허덕이기

<보 이즈 어프레이드> 아리 애스터 2023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는 실패한 농담이다. 아리 애스터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두고 “유대인 반지원정대 같지만 그냥 집에 갈 뿐인 영화”, “유대인 어머니에 관한 농담”이라 말했다. 이 영화는 강한 편집증이 있는 중년 남성 보(호아킨 피닉스)가 엄마 모나(패티 루폰)의 집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몇 달 만에 집에 찾기로 한 보는 출발 직전 집 열쇠를 도둑맞아 비행기를 놓친다. 모나는 전화로 실망감을 보이고, 단지 집에 가면 끝인 보의 여정은 꼬이기 시작한다. 모나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는 보의 시점으로 시작한 영화는 뒤이어 치안이 망가진 보의 동네를 보여준다. 길거리에선 싸움이 일어나고, 살인도 벌어지고, 경찰은 여자 꼬시는 데에 전념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와중에 춤을 추고 있다. 보의 아파트에는 추잡한 낙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에게 세상이 적대적 자극으로 가득한 것처럼, 중년이 된 보에게도 세상은 적대적이다. 노숙자도, 거지도, 경찰도, 편의점 주인도, 집주인도, 엄마마저도.      

 아리 애스터가 던지는 농담은 여기서 시작한다. 코미디는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신을 내려놓고 허점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모습에서 슬랩스틱이, 부조리한 상황 속에 주인공이 자신을 투신하는 것에서 블랙코미디가 발생한다. 카프카의 소설이 실존주의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블랙코미디인 것처럼 말이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추구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보를 모나의 집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죄책감이다, 자신에게 “산을 옮길 만큼 사랑을 퍼준” 엄마를 자주 찾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보는 집에 가겠다는 단순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죄책감에서 출발한 보의 여정은 그의 삶 전체를 되짚는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는 아빠는, 모나의 말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심장이 약해 보가 임신된 날 사정하는 순간 죽었다고 한다. 모나는 심장 유전병이 보에게도 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 알린다. 동시에 모나는 보에게 무언가 진실을 숨기고 있으며, 그 진실은 다락방에 감춰져 있다. 보의 여정은 그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여정이 <반지원정대>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반지원정대>는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동료들과 모르도르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심장 유전병)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모나의 집으로 향한다. 파괴가 아니라 확인의 여정, 죄책감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한 여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나의 꾀임이었음이 드러난다. 비행기를 놓친 보는 다음 날 모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은 보의 죄책감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의 편집증을 강화하고 그 속에서도 보가 모나의 집으로 향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모나의 집으로 향한 보는 결국 그곳에 도착한다. 모나의 장례식을 찾은 일레인을 만난 보는 그와 섹스하면서 사정과 동시에 죽을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복상사한 것은 도리어 일레인이었다. 죽은 모나는 자신의 죽음이 꾸며진 것을 밝히며 나타난다. 영화 중간중간 꿈, 플래시백, 환상 등의 형식을 빌려 등장한 보의 과거들, 이를테면 일레인과의 만남, 모나의 정서적 학대, 아빠가 죽은 방식 등이 모나의 집에서 뒤집힌다. 일레인은 보에게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모나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아빠는 죽은 게 아니라 거대한 자지 괴물이 되어 다락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심지어 보의 심리상담사는 모든 상담내용을 녹음해 모나에게 공유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 영화가 보여준 보의 죄책감은 자신이 쥐어짜 내어준 사랑을 회수하지 못한 엄마의 복수나 다름없었다.     

 이 이야기를 농담으로 만드려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이다. 모나의 집을 떠난 보는 모터보트를 타고 어떤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불이 켜지며 그곳이 거대한 경기장 같은 구조물임이 드러난다. 그곳에선 재판이 열리고 있으며, 보는 재판의 피고인이다. 모나는 검사(로 보이는 이)와 함께 서 있다. 검사는 보가 엄마의 애정을 거부한 순간이 기록된 영상을 보여주며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읊는다. 반대편에서 보의 ‘무료국선변호사’가 변호를 시도하지만, 그는 괴한에 의해 던져져 추락사한다. 재판 끝에 보의 모터보트가 폭발하고, 보가 익사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거대한 농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보를 수렁 속으로 빠트린 블랙코미디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모나는 보가 익사하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보의 편집증과 죄책감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물이지만, 모순적이게도 모나는 유일하게 그의 죽음에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보의 꿈 장면으로 구별되는 영화의 3막 구조, 일종의 감정적 승화를 유도하는 마지막 등은 그리스 비극의 구조를 떠올리게끔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뼈대로 삼고 있는 모티프들을 끌어와 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다소 지겨운 프로이트적 시각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테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실패한 농담인 것은 농담의 주체여야 할 보가 농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아리 애스터 본인의 말과 다르게 “유대인 엄마에 관한 농담”이 아니라 “유대인 엄마가 건네는 고약한 농담”이다. 자신의 죽음을 꾸며낸 모나의 행위는 자기 자신을 농담의 주체이자 소재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보로 하여금 자신을 혐오하게끔 한다. 이 혐오는 죄책감을 건드린다. 모나는 유전병이라는 거짓말을 통해 보에게 편집증과 죄책감을 안겨주었고, 보의 세계는 그의 편집증이 상상해낸 위협들로 가득하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한 이 영화에서 보가 목격한 살인마, 문신한 거지 등이 모두 실재하지는 않아 보인다. 음악소리에 항의하는 윗집 주민, 보의 말에 이상하게 반응하는 편의점 주인이나 경찰 등을 떠올려보자. 보가 보는 세계는 왜곡된 세계다. 아리 애스터의 두 전작은 주인공의 시선에서 왜곡된 세계를 담아냈다. <유전>은 여동생/딸의 죽음 이후 오컬트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된 이들의 이야기였다. <미드소마>는 가족의 죽음 이후 남자친구의 가스라이팅으로 자신과 주변을 온전히 보지 못하던 주인공의 이야기다. 우연찮게도 두 영화의 주인공 피터와 대니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 컬트 집단의 왕/여왕으로 추대된다. 그 세계를 받아들인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 그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보는 그와 반대된다. 보의 눈에 세상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 보는 엄마라는 컬트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엄마는 절대 초현실적이거나 초인적인 존재가 아니지만, 그가 보에게 끼치는 영향은 초현실적이다. 그러한 면에서 보는 컬트의 외부인이 아니다. 그는 이미 컬트에 잔뜩 절여져 평범한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보는 단지 두려움에 떠는 소년일 뿐이다. 영화는 그 소년을 잔뜩 조롱한다. 있을 수 없는 모험담을 연극과 애니메이션을 뒤섞어 선사한 뒤, 그것에 동일시하고 있는 보에게 “너에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야”라고 속삭인다. 보 자신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그의 생각인 것처럼 말한다. 심지어 영화는 그의 미래를 스포일러 한다. 갑작스레 등장한 미래를 보여주는 CCTV는 CCTV 카메라의 시야를 넘어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보여준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생쥐를 집어넣고, 그가 가까스로 출구를 찾으면 쥐약을 먹이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유전>과 <미드소마>에서도 채택된 방법이지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극 중 인물뿐 아니라 관객 또한 생쥐의 처지로 데려간다. 영화의 홍보용 비하인드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7uzVaasp7Sw)에서 아리 애스터는 관객이 “루저가 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는 모나와 같은 위치에서 관객을 구경한다. 혹은 자신의 실패한 남성성을 보라는 인물로 빚어낸 뒤 저주인형처럼 다룬다. 아리 애스터는 보가 죄책감의 끝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 허덕이다 죽어버리길 바란다. 이 시점에서 그는 마치 실패한 농담을 던지며 관객에게 웃으라 윽박지르는 코미디언 같다. <아네트>의 헨리 맥헨리 같은 인물처럼 말이다. 다만 알파메일인 헨리 맥헨리는 마이크를 무기로 사용했지만, 아리 애스터는 보를 일종의 고기방패처럼 쓰고 있다. 보의 여정을 둘러싼 초현실적인 상황은 “소년은 두려워한다(Boy Is Afraid)”는 표어 아래 실패한 농담에 덕지덕지 붙은 부연설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농담을 설명하는 상황을 두고 실패한 농담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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