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들의 후기를 적기 전에 간단한 단상 하나. 올해 부천영화제 트레일러는 최악이다. 그동안 부천영화제는 여러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고어, 슬래셔, SF, 메타버스 등 여러 장르를 선보여왔다. 부산영화제가 하나의 트레일러를 장기간 재활용하는 것과 달리, 부천영화제의 트레일러는 매년 보는 맛이 있었다. 포스터와 함께 부천영화제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선보여 온 홍보수단이었다고 해야할까. 올해의 트레일러는 영화제가 아니라 부천시 홍보영상이나 다름없다. "부천 50년 영화를 더하다"라는 촌스러운 슬로건,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신대철, 카메라를 보고 어색하게 웃는 부천 시민들, 어떻게든 영화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넣은 영화과 학생과 장애인 시네필의 모습... 2021년부터 유지해온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슬로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간 부천이 내세웠던 VR/XR 섹션과 연계를 짐작케 했던 "영화+"라는 단어의 정체는 어처구니 없게도 "부천 50년 영화를 더하다"였다. 정작 영화제의 XR섹션인 'Beyond Reality'는 만화박물관 일대에서 진행된 작년과 달리 영화제 동선과 멀찍이 떨어진 부천아트벙커에서 진행되고, 이전과 달리 제대로 홍보되지도 못했다. "영화+"라는 문구를 여기저기에 붙여둔 이유는 오로지 부천시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함일 뿐이다. 전주영화제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집행위원장이 선임되었고, 부산영화제는 영화제의 존폐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비교적 큰 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만 같았던 부천영화제가 이번에 보여주는 모습은, 영화제와 지자체가 협력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가 지자체에 완전히 굴복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연출한다. 이것이 팬데믹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는, "한국에서 영화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관한 부천영화제의 답일까? 그렇다면 정말 실망스러울 것이다.
<사탄의 피부> 피어스 해가드 1971
<위커맨>, <심판>과 함께 영국 포크호러 장르의 시초처럼 여겨지는 작품. 물론 이 세 작품이 첫 포크호러는 아니다. 포크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단일한 규정을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사탄의 피부>는 언급한 두 영화와 함께 포크호러 장르의 문법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일조한 작품이다. 우연히 발견된 무언가에서 시작된 한 마을의 비극이라는 이야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무수한 포크호러에서 반복되고 있다. 기독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믿음이 파멸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낸 영미권 포크호러의 어떤 전범을 추출해낼 수 있다. 다소 조악하게 느껴지는 카메라무빙과 연기 등이 흠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배우들의 대사 톤과 같은 부분은 도리어 과거 영국 시골의 모습과 닮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무수한 오컬트 기반 포크호러를 봐온 21세기 관객에게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영화일지라도, 한 장르의 대표작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고립된 남자> 바실리스 카추피스 2023
미술품 전문 도둑인 니모는 보안장치 오작동으로 인해 뉴욕의 펜트하우스에 갇힌다. 에곤 쉴레의 그림부터 마우리치오 카틀란의 작업들까지 다양한 미술품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수도가 끊기고 냉난방이 제멋대로인 펜트하우스에서 생존을 위한 물품은 거의 없다. 영화는 그곳을 탈출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니모를 105분 동안 담아낸다. 점차 미쳐가는 니모를 연기한 윌렘 대포의 열연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그는 생존을 위해 텃밭 살수장치의 물을 모으거나 어항의 열대어로 경단을 만드는 한편, 점차 정신을 놓은 듯 목탄으로 벽화를 그린다. 고장난 TV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나오는 CCTV 화면을 보며 청소부인 재스민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망가지는 모습 속에서 펜트하우스를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팬데믹 기간의 우리를 연상시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팬데믹 기간 동안 실내, 특히 집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고립으로 인한 공간의 재창조, <고립된 남자>가 그러내려 한 풍경은 그러한 것이다. 단지 여기에 예술이라는 양념을 쳤을 뿐이다. 헌데 이 양념은 영화를 한없이 지루하게 만든다. "고양이는 죽고, 음악은 잊혀지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니모의 중얼거림은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팬데믹 동안의 고립을 소재로 한 무수한 영화들이 보여줬던 허무함을, 이 영화는 엔데믹을 맞이한 지금 시점에서 한없이 지루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품은 결국 생존에 아무런 쓸모가 되지 못한다? 한없이 지루한 와중에도 니모는 벽화를 그리고 CCTV 속 사람들을 스케치했으니 예술의 영원성 생존 위에 놓인다? <고립된 남자>는 윌렘 대포라는 훌륭한 재료를 두고 선문답을 이어나갈 뿐이다. 이 영화는 결국 예술에 관해서도, 고립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코멘트를 남기지 못했다.
<이블 데드 라이즈> 리 크로닌 2023
페데 알바레즈의 리메이크가 나온 것이 꼬박 10년 전이다. 샘 레이미가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애쉬 VS 이블 데드>도 그 사이에 완결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블 데드>는 다시 한번 원작과 관계 없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LA의 한 아파트 지하에서 우연히 네크로노미콘이 발견되고, 대니라는 소년이 이를 집으로 가져온다. 함께 가져온 LP 속 목소리가 주문을 외우고, 대니의 가족은 악령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오프닝만 놓고 보면 이전작들처럼 외딴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같지만, 독특하게도 이 영화의 배경은 철거 직전의 아파트다. 지진으로 인해 고립된 이들이 악령 들린 엄마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도망갈 곳 없는 공간에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었던 이들에게 무기를 들이대야 한다. 배경만 오두막에서 아파트로 바뀐 것이 아니다. 주로 20대 청년 무리가 주인공이었던 이전작들과 다르게, <이블 데드 라이즈>의 주인공은 가족이다. 그렇다고 악령을 퇴치하며 과거 서로 주고받은 상처를 잊고 새출발하는 해피엔딩 같은 것을 선사하지 않는다. <이블 데드 라이즈>는 <이블 데드>다. 페데 알바레즈의 영화가 기초적인 설정만 가져와 고어영화를 만들었다면, 리 크로닌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샘 레이미의 시리즈를 재출범시킨다. 악령 들린 이들이 주절거리는 더러운 말들, 충분히 많은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스플래터 장르 특유의 과장된 고어함, 점프스케어를 자제하면서도 공포스럽게, 동시에 중간중간 실실 웃음이 나는 포인트를 남겨두는 방식 등, 이번 영화는 애쉬의 부재가 주는 아쉬움이 무색하게 샘 레이미의 전성기 시절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적어도 아파트에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의 오프닝이다. 외딴 오두막이라는 지겨운 설정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듯 영화의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리는 자막은 오프닝의 인물들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인물들을 느닷없이 등장시킨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그 연결고리가 밝혀지지만, 아무래도 사족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프닝이 사족처럼 느껴지는 희안한 영화다. 또한 뜬금없이 등장한 <샤이닝>의 오마주는, 이야기에 썩 어울리긴 했다만 다소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 폴 모리세이 1973
"Andy Warhol Present"라는 자막과 함께 제목이 등장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 관해 앤디 워홀이 한 일은 없다. 최근의 폴 모리세이는 앤디 워홀이 이 영화에 관여한 것이 없다며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제목을 쓰는 것에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다. 어쨌든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이 영화는 무수히 영화화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다. 미친 과학자가 시체들을 붙이고 전기를 가해 자신만의 피조물을 만들어낸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영화가 다른 프랑켄슈타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라면, 섹스에 관한 강조, 무수한 누드, 그리고 3D라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영화는 사실상 코미디에 가깝다. 우도 키에르가 연기한 남작이 시체를 되살리려는 이유는 자신처럼 완벽한 인간을 우생학에 기반하여 만들겠다는 광기어린 집착이다. 그의 누이이자 아내는 남작이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누이가 자신의 몸종(?)으로 새로 들어온 하인이, 마침 남작이 "완벽한 코"라며 머리통을 잘라온 이의 친구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남작의 실험이 위기를 맞이한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밋밋한 패러디 포르노처럼 전개되던 영화는 어느 순간 내장을 든 손을 관객의 눈 앞으로 뻗고, 실험체의 쓸개를 만지며 시체를 범하는 남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당황스러운 순간을 연달아 보여준다. 영화는 비윤리적인 실험부터 네크로필리아까지 문제적인 소재들을 B급 3D영화의 기술 쇼케이스처럼 선보인다. 이 영화의 3D는 고어와 누드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것보다 그러한 당황스러운 순간을 어떻게는 관객에 가까이 접근시키려는 시도에 가까워보인다. 앤디 워홀과의 협업을 통해 여러 실험영화를 연출해온 폴 모리세이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드라큐라를 위한 피(Blood for Dracula)>, <바스커빌 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같은 장르영화를 몇 차례 더 선보인다. 이 기괴한 코미디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폴 모리세이에 관한 공부가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당황스러운 웃음을 선사하는 3D를 즐긴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인피니티 풀> 브랜든 크로넨버그 2023
작가 제임스는 아내 엠과 함께 리톨카라는 섬나라의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낸다. 영감을 얻기 위해 리조트에 온 그는 그곳에서 만난 개비, 알반 부부와 함께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떠난다. 늦은 밤 중 리조트로 돌아오던 중 차를 운전하던 제임스는 인명사고를 내고, 다음 날 경찰에 체포된다. 형사는 의도치 않았더라도 살인에는 사형이라는 리톨카의 법을 읊어줌과 동시에, 리톨카와 미국의 관광외교협약을 통해 돈을 내면 대역을 만들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대역은 제임스를 그대로 본따 만든 클론이었다. 위기를 넘긴 제임스는 개비와 알반 부부의 모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난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세번째 장편영화인 <인피니티 풀>의 표면적 주제의식은 전작 <포제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체를 갈아끼울 수 있거나 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진짜 나", 혹은 "원본인 나"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하지만 <인피니티 풀>은 순식간에 그 질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바닥히 훤히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피니티 풀'처럼, 돈만 있다면 대역을 무수히 생산할 수 있음을 깨달은 백인 부자들에게 가상의 섬 리톨카는 끝없이 놀이감, 즉 자신들의 클론을 제공하는 놀이터다. 이곳의 보수적(이라 쓰고 여성혐오적, 동성애혐오적, 계급차별적)인 문화와 관계없이, 그들은 총을 쏘고 술과 마약을 즐기며 집단섹스의 쾌락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어느 순간 그들의 놀이가 도가 지나치다 생각하는 제임스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개비 일행은 제임스를 붙잡아 온다. <인피니티 풀>은 자본계급의 한없는 타락을 브랜든 크로넨버그 특유의 스타일로 풀어낸다. 화려하고 환각적인 영상미, 바디호러를 연상케 하는 고어한 이미지 등등. 다만 그의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이 얼핏 징그럽고 난잡해보이는 이미지들 속에서 급진적이고 세련된 이야기를 향해 나아갔다면, 브랜든 크로넨버그는 자신이 만들어낸(만들어 낼) 이미지에 경도되어 그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미지의 외피를 벗겨내고 본다면, <인피니티 풀>은 빈약하고 직설적인 계급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카니발 군도 2> 다리오 제르마니 2022
<그림 리퍼>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조 다마토의 1980년작 <카니발 군도(Anthropophagous)>의 리메이크이자 속편. 핵전쟁에 대비한 벙커를 체험하기 위해 방문한 대학교수 노라와 7명의 학생이 식인종과 마주쳐 사투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이지만 대사는 영어로 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어대사와 배우들의 입모양이 거의 일치함에도, 의도적으로 붕 뜬 느낌의 후시녹음을 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더빙은 조 다마토의 영화를 비롯해 과거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지알로 등 이탈리아 장르영화가 미국으로 수출될 당시 원래의 대사를 무시한 채 완전히 엉뚱한 대사로 채워진 영어더빙으로 구성되었음을 연상시킨다. 문제는 이 영화가 각본단계부터 그러한 엉터리 대사들로 구성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벙커에서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다니고, 식인종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에도 이들은 각자 행동하다 하나씩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를 포함해 총 9번 식인종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만 같다. 그 사이를 채우는 이야기들은, 심야상영의 관객들이 한마음으로 영화를 비웃게 될 정도였다.
<포크 호러의 황홀한 역사> 키에르-라 재니스 2021
포크 호러의 역사, 컨벤션, 의미, 흐름 등을 담아낸, 무려 19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위커맨>, <심판>, <사탄의 피부>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영국 포크 호러 전통에서 출발해, 미국, 호주,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는 포크 호러의 대한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총집합한다. 영화 속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지만, 포크 호러를 무엇 하나로 정의내리긴 어렵다. 영화에 언급되는 무수한 영화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린 하나의 공통점은, 오컬트도, 종교도, 시골이라는 배경도 아니다. 민담/전설/설화/의례/제의/도시전설 등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어떤 영적/주술적 행위가 이 영화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소재다. 이 소재는 각국에서 흥미로운 창조와 변형을 거치지만, 무엇보다 공통적으로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결부된다는 분석을 이 영화는 내놓는다. 이를테면 미국의 원주민-이주민 관계, 한때 식민지였던 국가(브라질, 호주, 한국 등)들에서 제작된 포크 호러들에서 어떤 일관성이 등장한다는 지점이다. 모든 영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포크 호러는 대개 외부인인 주인공이 어느 공동체의 공간에 입장하며 시작된다. 그는 그곳의 문화와 의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제물이 되거나 실수로 재앙을 불러온다. 반대로 우연찮게 발견된 영적 재앙이 한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다는 이야기 또한 여럿 존재한다. 어쨌거나 포크 호러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그 외부존재의 관계다. 무수한 포크 호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에 대한 비평을 내놓는다. 탈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반인종주의 등 인간 집단에 관한 무수한 이념들이 이들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반면 침략당한 경험이 부재하다시피 한 영국에서 포크 호러가 발흥했다는 점은 <포크 호러의 황홀한 역사>가 제시하는 흥미로운 시사점 중 하나다. 지배자였던 이들은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호러 장르는 공포의 대상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사회에 관한 논평을 선보여 왔다. 이 방대한 다큐멘터리는 포크 호러가 무엇을 해왔는지 성실하게 전달한다.
<열화청춘> 담가명 1982
장국영의 실질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허안화, 서극 등과 홍콩 뉴웨이브 감독으로 불리는 담가명의 영화로, 루이와 토마토, 캐시와 퐁 커플을 통해 당시 홍콩 청년세대의 모습을 그려낸다. '노마드'라는 이름의 아버지의 배를 타고 친구들과 아라비아로 떠나길 바라는 루이는 문자 그대로 상처받은 영혼이다. 한때 라디오 DJ였던 죽은 엄마의 녹음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고, 데이빗 보위에 심취해 있다. 그를 둘러싼 다른 세 명의 인물들도 크게 다르다. 두 커플은 각자의 상대방을 생존의 이유로 꼽는다. 생존? 이들이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는 않다. 저택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집에 사는 루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생계는 그들의 일순위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삶의 동력 자체를 상실한 채 홍콩을 떠돌고 있다. 홍콩 반환을 앞두고 허망함과 무력감을 내비치던 90년대 홍콩영화들과는 또 다른 결의 무기력함을 이들은 보여준다. 아라비아로의 항해라는 루이의 목표는 그러한 무기력을 어떤 식으로든 파훼해보려는 이상에 가깝다. 이들이 살아있는 시간은 사랑의 시간 뿐이다. 일본적군에 가담했다가 탈퇴 후 홍콩으로 피신 온 캐시의 전남친 신스케의 존재는 갑작스레 그 시간에 균열을 낸다. 단순히 옛사랑이 되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두 커플은 무기력의 수렁 속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올 기회를 잃는다. 다소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열화청춘>의 장면들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린다. 정지상태에서 마무리된 영화는 '노마드'가 항해를 이어갈 것이라는 자막과 함께 끝나지만, 정작 엔드크레딧 직전의 프리즈 프레임은 배를 멈춰세운다. 담가명이 찍으려던 1982년의 홍콩은 그런 이미지였나보다.
<운명> 소이 청 2023
점쟁이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려 시도하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의식은 실패하고, 결국 점쟁이를 찾아왔던 성노동자는 사주대로 그날 사망한다. 성노동자를 죽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를 쫓는 형사가 있고, 점쟁이와 함께 우연히 살인현장을 목격한 사이코패스가 있다. 점쟁이는 사이코패스의 운명이 좋지 않냐며 사주를 봐주고는 운명을 바꿔주겠다고 한다. 두기봉이 제작하고 그의 조감독 출신인 소이 청이 연출한 <운명>은 <Mad Fate>라는 영제 때문인지 두기봉의 <매드 디텍티브>를 연상시킨다. 살인과 폭력에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고 주인공이 그것을 뒤쫓거나 벗어나려 한다는 누아르적 세팅을 이어가지만, 두 영화 모두 독특한 방식으로 심리를 묘사한다. 두기봉의 영화에서 그것은 유사-초능력과 같은 것이었다면, <운명>의 독특한 소재는 사주를 비롯한 전통적인 점괘다. 모두의 운명이 정해져 있으며 사주나 관상 등으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익숙한 이야기는 살인마로 각성하기 직전인 사이코패스를 구원하려는 점쟁이의 시도에서 출발한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 혹은 극복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운명이 자신의 선택으로 구성된 것처럼 꾸며져 있다는 것인지, 이 영화는 두기봉의 제작사 밀키웨이가 선보여온 스타일리쉬한 화면의 도움을 받아 운명과 선택을 저울질해보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한다. 누아르, 스릴러, 액션, 판타지 블록버스터 등 다양한 장르를 연출해온 소이 청은 수작과 범작을 번갈아 만들어왔다. <운명>은 아무래도 범작에 속하는 영화다. 연쇄살인마의 존재와 사이코패스 주인공이 각기 존재하는 이야기는 잘 맞물린다기보단 전자가 후자를 필요할 때 슬그머니 소환된다. 짧게 등장하는 점쟁이의 과거는 그가 읽어낸 운명이 틀린 사례이지만 그 사실은 영화 내내 간과된다. 아니, 시시각각 변화하는 점쟁이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운명을 어떠한 방식으로 소화해내려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다. 홍콩 누아르의 지나간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몇몇 장면만이 인상적일 뿐이다.
<둠 제너레이션> 그렉 아라키 1995
그렉 아라키의 'The Teenage Apocalypse'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인 <둠 제너레이션>은 "그렉 아라키의 이성애 영화"라는 기막힌 자막에서 시작된다. 90년대 뉴 퀴어 시네마의 대표 감독 중 하나인 그는 <둠 제너레이션>을 비롯한 삼부작에서 이성애자들을 등장시킨다. 얼핏 <보니 앤 클라이드>의 쓰리썸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영화에서 이성애자 십대들은 익숙한 청춘 로드무비의 방황과 혼란을 겪다가도 다양한 요인으로 소수자-되기를 경험한다.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의 다른 이들은 그들이 지닌 주류 정체성, 가령 이성애자, 백인, 청년 등과 반대된다. 가게 점원은 베트남계이며 펍에서는 자신이 에이미의 전 여자친구라 주장하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기묘하게도 세상은 방황하는 이성애자 청년에게 적대적이다. 익숙한 청춘 로드무비의 공식을 따르다가도, 그들이 이성애자임을 여러 차례 못박고 있음에도, 그렉 아라키의 카메라는 종종 그들 사이의 거리감을 퀴어하게 포착해낸다. <둠 제너레이션>이 그려내는 이들의 방황은 펑크들의 대안 공동체와도, 청춘영화의 방랑자들과도 기묘하게 다른 방식의 이미지가 된다. 영화를 보며 윤아랑의 글 "애매한 어둠 속에 살며"(https://brunch.co.kr/@jesaluemary047/114)를 떠올렸다. 영화와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이소룡-들> 데이비드 그레고리 2023
이소룡이 생전에 남긴 주연작은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그리고 <용쟁호투>. 그의 사후 완성된 <사망유희>는 실제 장례식 장면을 삽입하고 퀄리티 낮은 대역을 사용하는 등의 문제로 혹평받았다. 서구권에 처음으로 쿵푸영화를 전파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홍콩 영화계는 물론 미국과 유럽의 배급업자와 영화제작자까지 앞다투어 다음 이소룡을 찾아 나섰다. 거룡, 여소룡, 브루스 Li, 브루스 Lai, 브루스 Lo 등 홍콩, 대만, 남한, 미얀마, 일본 아시아 각국에서 이소룡의 모방자들이 등장했다. 더 나아가 이소룡과 협업했던 여배우가 '여자 이소룡'으로 등장하거나, 생전에 그와 짧은 인연이 있는 흑인 무도가가 흑룡(Black Drag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적과 인종, 젠더를 가리지 않고 이소룡의 클론을 자처한 이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이소룡 영화의 비공식적 속편, 프리퀄, 외전, 전기영화에 출연했다. 여러 편의 <당산대형2>와 <정무문2>가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단순한 모방을 넘어 이들의 출연작은 이소룡을 마치 드라큐라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픽션 캐릭터로 만들어버린다. 복수의 이소룡이 등장하는 영화부터 드라큐라나 고릴라, 심지어 스파이더맨과 싸우는 이소룡이 등장한다. 브루스플로테이션(bruceplotation)이라 불리는 하위장르는 이렇게 탄생했다. 픽션 캐릭터를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화해온 영화의 역사는 자신의 레퍼런스 캐릭터 목록에 이소룡을 추가한다. <이소룡-들>은 당시 이소룡의 모방배우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소룡은 그들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으며, 최고의 배우이자 무도가였다. 후일담에 가까운 이 영화는 이소룡과 브루스플로테이션 영화들의 영향력보단 유사-이소룡을 연기했던 모방배우들의 한때를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이소룡을 필두로 삼은 쿵푸영화가 세계 곳곳의 하위문화에 끼친 영향은 다큐멘터리 <쇼 브라더스의 쿵푸 신드롬(Iron Fists and Kung Fu Kicks)>에서 더욱 깊게 다뤄지며, 브루스플로테이션의 의의에 관한 것은 이영재 영화연구가의 글(https://www.kmdb.or.kr/story/419/6131)을 참고하면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최근 한 장르, 배우, 감독의 역사를 정리하는 다큐멘터리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연출과 편집방식이 점점 지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터나 스틸컷에서 떼어온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이라던가, 과거의 영화나 인터뷰 클립을 '재치 있게' 삽입하는 방식이 여러 영화에서 반복되다보니, <이소룡-들> 또한 익숙한 만듦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방배우들의 현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작품이지만, 브루스플로테이션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크게 새로울 이야기는 없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사탄의 부름> 숀 홀러, 스티브 J. 애덤스 2023
『미셸은 기억한다(Michelle Remembers)』는 1980년대 미국에 '사탄 공황(satanic panic)'을 불러왔다. 사탄을 숭배하는 비밀결사에게 어린시절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미셸과 그의 상담의 로런스가 공저한 이 책은 미셸과 로런스의 상담 녹취록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대 트라우마로 인해 삭제된 기억이 상담을 통해 되돌아왔다고 주장하며 자신도 사탄숭배자들에게 학대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지는 일련의 연속된 상황 속에서 어린이집 교사가 아동학대 혐의로 구속되거나 사회학자가 사탄숭배자로 몰리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이 모든 상황의 시발점인 미셸의 증언은 거짓이었다. 미셸의 주변인들은 그의 증언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영화에 등장한 녹취록은 미셸 또한 자신의 말이 실제 증언인지 상담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것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사탄 공황'을 통해 미디어가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식,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들으며 신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려 한다. 영화 후반부는 큐아넌과 피자게이트 사건을 예시로 들며, 이런 방식의 음모론이 재등장하고 있다는 나름의 '통찰'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통찰'은 썩 유효하지 않다. 아니 그것의 유효성을 따지기보단, 2016년 대선 당시 등장한 가짜뉴스들을 현재적 사건으로 끌어오는 방식 자체가 영화가 보여주는 통찰의 정치적 순진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탈진실이라는 키워드가 언론과 학계의 화두가 된지 이미 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음모론을 정치적, 저널리즘적으로 활용하는 다큐멘터리, 극영화, TV드라마, 시트콤들로 한 달치 재생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사탄의 부름>은 위키피디아에 서술된 사건 내용을, 사건 주변인들과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넣어 영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소재를 지루하게 전달하는, 넷플릭스나 HBO의 뻔한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다.
<악령> 김인수 1974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 90년대의 여러 에로영화 히트작을 내놓았던 김인수의 초기작. 연산군 10년, 수원의 사또들이 불가사의한 일로 사망하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누구도 가려 하지 않던 사또직에 지원한 원석과 그의 아내 김부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수원에 간 원석이 여색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부인은 정신이상과 환각 증세를 보이지만, 실은 자꾸만 죽는 여성들의 사건이 초현실적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것이라 확신한 원석이 그것을 수사하고자 여성들을 가까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원석은 수사 끝에 김부인을 좋아해 자신을 질투한 종 만득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내지만, 예정된 파국으로 영화는 이어진다. 악령이나 귀신 등 초현실적이며 오컬트적인 소재를 끌어오지만 실은 사람의 손으로 저질러진 범죄행각을 다룬다는 점에서, <악령>은 어딘가 김빠지는 결말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70년대 한국영화 중에서도 발군(?)의 잔혹함,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의 촬영(특히 초반에 매질당하는 만득과 섹스하는 김부인을 오가는 교차편집과 촬영은 어설픈듯 보이지만 <악령>의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일조한다) 등은 이 영화만의 고유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한국영상자료원 VOD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흡연하면 기침한다> 캉텡 뒤피유 2022
담배 특공대(Tabacco Force)는 지구를 공격하는 괴수나 외계인들과 맞서 싸운다. 그들은 니코틴, 암모니아, 수은, 메탄올, 벤젠 등 담배에 함유된 발암물질의 힘으로 적을 공격한다. 그들의 보스는 외계인 도바비암의 지구침공 전에 그들의 단합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며, 단결 워크샵을 명령한다. 명령에 따라 외딴 호숫가의 기지로 온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전대물의 패러디처럼 시작한 이 영화는 두 개의 '무서운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는 외딴 별장에서 1930년대 발명된 생각헬멧을 발견한 어느 여성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로 조카가 분쇄기에 빨려들어간 벌목장 현장감독의 이야기다. 각각 슬래셔와 스플래터를 표방하는 두 개의 이야기와 함께, 쥐의 모습을 한 대장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담배 특공대의 무기력함이 인상적이다. <흡연하면 기침한다> 또한 <디어 스킨>이나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등 캉텡 뒤피유의 전작들처럼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다만 피상적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며 갑작스레 영화가 끝나버렸다는 인상을 주었던 전작들과 달리(뒤피유 영화들의 러닝타임은 대개 70~80분대다), 이번 영화는 전대물의 익숙한 패러디 바깥으로 나아간다.
<도어> 타카하시 반메이 1988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 야스코는 반복해서 전화를 걸고 초인종을 누르는 방문판매원들에 질려 있다. 어느 날 방문판매원이 멋대로 문을 열고 소책자를 건네려는 순간, 야스코가 문을 닫아버려 방문판매원이 손을 다친다. 그 날부터 방문판매원은 야스코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수영장, 세탁소 등의 시설이 갖춰진 아파트의 일상적 풍경을 순식간에 스산한 공포가 서린 공간으로 뒤바꾸는 일본 호러영화의 거장 타카하시 반메이의 솜씨가 일품이다. 일본 가족 구성원의 역할(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야스코 가족과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 호황기를 묘사해낸다. 그들의 안온한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과정을 이 영화는 담아낸다. 아파트의 문은 문 안쪽의 안전함을, 외부와의 분리를 담보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러한가? 문은 아파트 바깥의 소음을 막아주지도, 외부에서 찾아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도어>는 곧 우리의 문을 두드릴 불안감이 기어코 문을 뚫고 들어온 상황을 보여준다. 내용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같은 감독의 2편과 구로사와 기요시가 연출한 3편이 있다.
<싱글 에이트> 코나카 카즈야 2022
<스타워즈>를 본 히로시는 자신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스타 디스트로이어가 등장한 영화의 첫 장면만을 가까스로 그럴싸하게 따라 찍었을 뿐이다.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 얼떨결에 문화제에 상영할 영화를 찍게 된 히로시는 자신만의 SF 영화를 찍으려 한다. 고등학교 문화제를 배경으로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 청춘영화의 단골소재다. <싱글 에이트>를 보고 있으면 최근 인기를 끌었던 <썸머 필름을 타고!> 같은 영화를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헤이세이 울트라맨 시리즈부터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등 특촬물과 전대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코나카 카즈야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8mm 필름 영화를 만들었다. 그 중 고등학교 시절 제작한 <터닝 타임>과 <턴포인트 10:40>(이번 부천영화제에서 함께 상영되었다)을 만들었던 이야기가 <싱글 에이트>의 주축이 된다. 필름 역재생, 매트 페인팅, 분할촬영, 미니어처, 필름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수공업적 기술이 동원된다. 일본의 청춘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창작에 대한 열정과 풋풋한 짝사랑의 기억 등이 이야기 속에서 뒤섞인다. 대부분의 배우가 이 영화로 데뷔한 만큼 종종 어색한 순간들이 존재하고, 얼핏 고등학생들이 영화를 찍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마추어적인 순간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코나카 카즈야가실제 학창시절에 촬영한 영화들의 등장으로 인해 그러한 순간들이 무마된다. 카메라를 써보기 위해 학교 캠프 기록영화를 만들었다던가, 컷을 외쳤음에도 이를 듣지 못한 친구가 계속 걸어가는 장면 등은 우연찮게도 같은 해 공개된 <파벨만스>를 떠올리게 한다. 8mm 필름을 통해 처음 영화를 보고 영상을 찍어본 세대의 공통된 경험이랄까? 스필버그의 영향을 받아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는 코나카 카즈야의 영화 속 고백은, 스필버그가 <파벨만스>에서 고백한 것과 10여년 가량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거의 유사한 것처럼 다가온다. 물론 <싱글 에이트>와 <파벨만스>는 아주 다른 영화다. 다만 자신의 방식대로 평생 영화를 상대해온 노년의 감독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들이 주는 즐거움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래의 뼈> 오에 타카마사 2022
두 주인공의 이름을 들은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두 작품을 떠올릴 것이다. 마미야와 아스카, 그러니까 <큐어>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들 말이다. 마미야는 결혼을 준비하던 여자친구가 이별통보를 하자, 데이팅 앱을 통해 아스카를 만난다. 하지만 마미야가 샤워를 하는 사이 아스카가 수면제를 먹고 죽어버리고, 당황한 마미야는 시체를 야산에 묻으려 한다. 하지만 구덩이를 파는 사이 시체가 사라진다. 당황한 마미야는 우연히 아스카카 '미미'라는 위치기반 SNS의 여고생 인플루언서임을 알게 되고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게 되며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고래의 뼈>의 마미야는 얼핏 <큐어>의 마미야처럼 시대의 불안감과 혼돈을 품어낸 캐릭터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의 포지션을 굳이 <큐어>와 비교하자면, 그는 마미야보단 그를 쫓던 형사 타카베에 가깝다. 동시대적인 혼란의 정체를 쫓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 말이다. 물론 그가 탐정이나 형사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찾아 헤매는 아스카라는 인물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스카가 작품 밖 오타쿠들에게 추앙받는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아스카의 '실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미미'라는 SNS에 묻혀 있는 아스카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거기에 기록된 짧은 동영상을 통해 만들어진 아스카라는 상상된 인물이 그들에겐 실제다. 그러니까 <고래의 뼈>는, 마미야라는 불안정한 인물에게 벌어진 미스테리한 사건을 통해 동시대의 불안과 혼란, 더 나아가 실존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큐어> 속 최면술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는 세카이계 장르의 특징은 시대에 내재된 불안과 혼란을 풀어내는 소재였다. <고래의 뼈>는 그것을 SNS로 옮겨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이름이 보여주는 뻔한 레퍼런스처럼 뻔한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다. 주제의식은 선명하지만 그것은 각종 레퍼런스(영화들은 물론 끌어와지는 SNS까지)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 영화 자체의 힘으로 풀어내지 못한다. 차라리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밈이 더욱 간결하고 정확하게 이 영화의 메세지를 전달한다는 생각이 든다.
<투명인간> 김기충 1986
H. G. 웰즈의 소설에서 출발한 '투명인간'이라는 소재는 제임스 웨일의 1933년작 이래로 오랜 시간 호러영화의 단골소재였다. 김수용의 <산불>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감독 김기충의 <투명인간> 또한 제목처럼 투명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니다. 70~80년대 한국의 유사-프랑켄슈타인, 유사-좀비 영화의 주인공들이 과학자였던 것과 달리, <투명인간>의 주인공 오인철은 막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직장인이다. 그는 국민학교 동창의 권유로 인해 연구소에서 논문을 훔치다가 어떤 약물을 뒤집어쓰고 투명인간이 된다. 투명인간이 된 그는 자신에게 사기를 친 동창을 찾아 나선다. 문제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영화가 도통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명인간이 자동차를 날게 하는 능력이 있다던가 환영을 보게 만든다는 등의 요소들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영화는 코미디에도, 특수효과에도, 이야기 전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들을 잔뜩 집어 넣는다. 인철과 미옥 부부는 왜 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인철이 훔쳐온 논문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전혀 알 수 없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5분가량의 동물 서커스 장면(아마도 실제 서커스를 촬영했을)이 차라리 이 영화의 목표에 부합한다. <투명인간>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해 투명인간을 가져왔다기 보단, 투명인간이 좀도둑이나 빚쟁이를 물리치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끄는 모습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서커스에서 전시되는 동물들처럼, 이 영화는 그것을 전시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가장 큰 문제는 전시 대상이 투명인간이라는 점이다.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기충 감독과 각본가들은 그것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쉬리> 강제규 1999
부천영화제 최민식 기획전을 통해 처음 관람했다. 사실 제작사 폐업 이후 판권자가 부재한 상황이라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이 영화를 볼 방법은 도서관 미디어코너를 이용하는 것 뿐이다. 한국 블록버스터의 효시로 불리는 이 작품은 그 이름값(?)에 알맞은 영화다. 당시 한국영화 최대 제작비를 갱신했고, 7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며, 한국의 누구라도 공감할 법한 분단의 아픔을 소재로 가져왔다. 지금이야 한국영화에서 총격전은 흔하게 등장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쉬리>의 물량공세는 대단하게 다가온다. 멜로드라마와 첩보액션을 뒤섞은 플롯은 이후 한국 블록버스터의 원형에 가깝다. 물론 중간중간 어설픈 장면연결도 많고, 소위 말하는 한국 '신파'영화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지닌 장점과 단점은 지금의 한국 블록버스터에서도 꾸준히 이어진다. 송강호와 최민식 등 여전히 한국 상업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것 또한, 한국영화는 여전히 <쉬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화의 마지막 단 한 컷 분량의 단역으로 등장하는 황정민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그가 최근 카메오 출연한 작품들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당시 황정민은 무명의 연극배우였으며 지극히 사후적인 인상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