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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15. 2020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


(아래는 2020년 6월 1일에 출간된 계간《자음과 모음》2020년 여름호(45호)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원문과 비교해 작품 제목 표기 일부와 각주에서 빠진 부분을 수정했다.)





청탁을 위한 전화 통화에서 『자음과모음』 이번 호의 주제 '이것은 퀴어 문학입니다'를 듣자마자 내 머리는 반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전화기로 넘어오는, 요청받은 원고에 대한 설명을 잘 붙잡으려 애썼고, 다른 한쪽은 2016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왜 하필 2016년인가? 그 유명한 <아가씨>가 개봉한 해이기 때문이다. 좀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당신께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아가씨>를 둘러싸고 트위터를 비롯한 여러 ‘퀴어판’에서 논쟁(이라기보다는 주장의 교차 정도에 그친 것)이 오간 적이 있다. 논쟁의 주제는 ‘<아가씨>는 퀴어영화인가 아닌가?’였고, 나는 아니라는 쪽이었다. 퀴어영화가 맞다는 쪽에선 레즈비언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 캐릭터가 기존의 남근적 성애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어떻게 퀴어영화가 아니냐고 말했으며, 개중엔 아예 이렇게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충분히 퀴어영화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퀴어영화가 아니라는 쪽은, 대략적으로만 같은 의견이었고 그 안에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말도 많았으니―가령 ‘레즈비언의 디아스포라를 비약적으로 넘겨버렸다’는 비난은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다―당시의 내 의견만 적자면, 퀴어 캐릭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고 해서 꼭 퀴어영화인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아가씨>에서 레즈비언은 이를테면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에 주로 나오는, 몰락의 에로틱함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된 광폭한 여성상의 변주에 그친다고 말했다. 즉 히데코(김민희)를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신비한 타자’로 승화시키기 위해 레즈비언이란 소재를 적절히 끌어들였을 뿐이라는 게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말들은 제대로 된 논쟁으로 서지 못하고 그저 서로의 견해 차이를 확인하는 결과로 향하는 데서 그쳤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보면, 당시의 내 입장은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아가씨>에 대한 감상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었다는 게 아니다. 나는 자문한다. <아가씨>가 ‘이상적인’ 퀴어영화가 아니라는 판단이 곧장 퀴어영화가 아니라는 단정으로 이어져도 괜찮은 걸까? <아가씨>가 하여튼 간에 ‘퀴어성’이라 할 만한 것을 끌어들여 주요하게 사용한 건 분명하니 말이다. 정전(canon)에 등재될 만큼의 수준을 담보하지 않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은 달리 쓰자면 거대하고 불균질한 세계를 자기 한계에 맞춰 이해하기 위해 ‘도살장’1)을 양산하는 행위이다. 물론 이는 역사 구성에 있어 자연스럽고 불가결한 발로이지만, ‘도살장’이 무자각적으로 무수히 양산될 때 그 행위의 주체는 결국 자신이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범위는 물론 자신이 옹호하는 개념의 의미마저 축소/고착시키는 수구적 엘리트주의로 빠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간단히 ‘성소수자’의 번역어가 아니라 기존 사회 안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유연하게 가로지르는 ‘상상된 공동체’2)로서의 개념인 ‘퀴어’라면 더더욱 그렇다. 범주를 리그 마냥 굴리는 것엔 이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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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anco Moretti, “The Slaughterhouse of Literature”, Modern Language Quarterly 61:1, 2000, pp. 207~227

2) Rosemarie Garland-Thomson and Martha Stoddard Homles, “Introduction”, Journal of Medical Humanities 26:2-3, 2005, pp. 73~77. ]]


여기서 나는 앞서 언급한 ‘퀴어성’에 대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퀴어영화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상기한다. 물론 시스-헤테로는 ‘퀴어적’ 경험과 접점을 갖지 않으리라 단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지나치게 순진하며 나아가선 무책임하기까지 한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미래한국당의 ‘핑크 챌린지’3) 역시 기독교 관계자들에게 ‘퀴어하다’고 비난을 받았으니 퀴어적 퍼포먼스에 포함될 게다. 일정한 분량의 텍스트에 대한 (무제한적인) ‘사용’과 (한정적인) ‘해석’은 서로 다를뿐더러,4) ―인기 소년만화 <하이큐!!>(2012~2020)를 예로 들자면, 극 안에서는 그저 한 번 인사했을 뿐인 쿠로오 테츠오와 사와무라 다이치를 갖고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며 BL 동인지를 만드는 것이 ‘사용’이라면 캐릭터들 간의 관계 속에서 호모에로틱한 기류가 억압된 상태로 떠도는 것을 지적하는 건 ‘해석’이다. 그런데 비평이란 것은 종종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려 들곤 한다― 더군다나 이런 정의는 ‘퀴어’라는 라벨이 라벨로 성립되기 위해 거쳐온 역사적 맥락(개념로서의 게이의 발명, 캠프 문화, HIV/AIDS 위기, 정신질환 목록 내 동성애/트랜스젠더 문항 삭제 투쟁 등)과 그로 인한 정치성을 모조리 소거하고 라벨의 대상을 확장하기만 해, 결국엔 당사자의 발화 조건을 지울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으로도 부주의한 사고다. ‘누구든 퀴어가 될 수 있다’와 ‘누구든 퀴어다’는 전혀 다르다.5) 그렇지만 여기서 가져갈 만한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특정한 형식의 조합이 곧장 ‘퀴어한 것’으로 성립되는 건 아니며 그러기 위해선 수용자라는 항을 매개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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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일훈, 「원유철 ‘핑크가발’ 때아닌 퀴어 논란···황교안 “꼭 써야하나”」, 중앙일보, 2020.04.09.

4) 물론 이 용어를 먼저 제시한 건 움베르토 에코이다.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 속의 독자』,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9, 93~95쪽

5) 여기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레즈비언/에이섹슈얼 정체화는 어떤가? 그들도 퀴어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그들 역시 퀴어라고 할 수 있다,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전략적 의도 속에서 이뤄진 행위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된 생각인가? 퀴어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 그릇된 욕망인가? ‘언어 빼앗기’라든가 ‘퀴어의 고유한 특질’같은 방어적 관점들은 퀴어의 본질성에만 천착함으로써 저들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되지 못하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수준에 머문다. 그들이 퀴어인지 아닌지에 대해 엄밀하게 논하기보다는, 그들 역시 퀴어라고 할 때 ‘퀴어’라는 범주가 가질 모순과 변곡점에 대해 논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 ]]


“퀴어소설의 문제의식은 (……)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한 것’으로 인식하는 이 사회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6)라는 오혜진의 물음은 이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 즉 성 정치적 정상성의 잣대에 의해 모순, 곧 ‘퀴어한 것’으로 호명된7) 일련의 경험과 제스처들을 어떻게 형식화해 의식적으로―작가 개인의 정체화나 커밍아웃에 대한 말이 아니다―배치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며, 만약 퀴어영화, 나아가 퀴어예술이란 게 존재한다면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때 배치는 큰 두 가지 층위의 씨름에 의해 제 뼈대를 갖추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앞서 ‘퀴어’를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개념“이라 부른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90~1991년 사이 당시의 운동가/이론가들이 일련의 투쟁을 통해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혐오적 속어였던 ‘퀴어’를 전유한 이래8) 이 이름은 개별 정체성으로서의 성소수자와, 당대의 정상성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상태로서의 변태를 겹쳐둔 채 아우르는 역할을 해왔으며, 그동안 ‘퀴어’를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리려는 흐름은 둘 중 무엇을 기반으로 인식적 프레임을 짤 것인가의 씨름으로 이루어져 왔다. (동성결혼 법제화를 둘러싼 논쟁들을 떠올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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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한국 퀴어서사의 퀴어 시민권/성원권에 대한 상상과 임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395쪽.

7) 게일 루빈, 「성을 사유하기」, 『일탈』, 임옥희·조혜영·신혜수·허윤 옮김, 현실문화, 2015, 348~350쪽. 아마도 이는 “여성이론의 정교함을 위해선, 내 생각엔 남자들로 충분하다”(Irigaray 1985 : 123)고 말한 뤼스 이리가레이를 ‘반복’한 결과일 것이다.

8) David M. Halperin, “The Normalization of Queer Theory”, Journal of Homosexuality 45, no. 2–4 (September, 2003): pp. 339–344; 허성원, 「한국 퀴어퍼레이드와 정동정치」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1쪽 ]]


예술의 영역 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찢어서 좀 단순하게 성소수자-층위와 변태-층위라고 명명하고 분류해보자. 성소수자인 인물 혹은 그(들)의 문화 코드를 사회 안에서 드러내고 설명/명명하고 실현시키려는, 다양성에의 의지를 중점적으로 내비치는 작품들은 성소수자-층위가 좀 더 두드러진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정상성은 올바른 분배의 대상이다. 한편 당대의 정상성에 어긋나는 형식을 통해 그것을 희롱하고 조소하고 해체하려 하는, 차이에의 의지를 중점적으로 내비치는 작품들은 변태-층위가 더 두드러진 결과일 것이다. 이는 전자보다 (특정 행동이 위치한 시공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유동적이고 복잡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신비한 타자’로 레즈비언을 다루는 <아가씨>나 퀴어(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소수자)를 ‘일반적’인 캐릭터로 묘사하려 애쓰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Sex Education)>(2019~)를 전자에 따라서, 또 ‘구체적’인 성소수자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젠더 이원론의 근간을 뒤흔들려 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친애하는 당신(สุดเสน่หา)>(2002)이나 가쇼이의 소설 『아잘드』(어패류, 2019)를 후자에 따라서 하여튼 퀴어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불균질한 범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말하건대, 나는 작품들을 정확히 나눌 분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며 또한 무엇이 더 윤리적인지 분간해서 한쪽을 기각하기 위해 이 같은 분류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성소수자-층위만 남는다면 ‘퀴어’는 단지 정상성을 분배받은 개성적인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에 불과해질 테고(물론 이를 지향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변태-층위만 남는다면 ‘퀴어’를 굳이 프레카리아트, 서발턴, 몫 없는 자, 다중 등 여타의 정치적 주체화의 모델들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9) ‘퀴어’라는 이름이 존재하는 한 두 층위는 유지되어 끝없이 씨름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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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퀴어퍼포먼스 이론가인 호세 에스테반 무뇨즈(José Esteban Muñoz)처럼 성 정치 이외에도 자본, 인종, 가부장제, 장애 등 정상성을 유지하려는 온갖 구조적 역학의 네트워크에 의해 발생한 소수자 일체를 퀴어로 호명하는 이도 있긴 하나, 이는 퀴어에서 정상성에의 추구를 분리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


앞에서 어느 정도의 큰 동어반복을 통해 강조하려 한 것은 결국 ‘그래야 한다’는 당위이다. 사실 나는 ‘퀴어적 영화’니 ‘퀴어적 소설’이니 하는 말을 보거나 들으면 종종 온몸에 소름이 돋곤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말의 절대 다수는 소수적인 것(이 맥락에서는 변태-층위)을 곧장 ‘바깥’을 향한 전복적 수단으로 삼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런 측면에서 나를 소름 돋게 만든 두 가지 비평적 사례를 떠올리고 있다. 양경언이 지난해 11월 무지개책갈피에서 개최한 퀴어문학 포럼에서 발표한 「시는 퀴어하다」를 읽으면서 든 위화감은 그가 구성적 외부로서의 퀴어의 위치를 정치적 전복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시의 퀴어성(“‘낮설게 하기’라는 요소를 통해 시가 씌어져 왔으므로 ‘시는 이미 퀴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과 퀴어의 보편성(“정체성이 형성되는 (……) 소위 ‘트랜스‘적인 상태의 존재는 지금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현존 상태”)10)을 논하는 데서 왔다. 양경언은 잠재성과 형식을 분간하지 못하고 섣불리 동일시한다. 다시 말하건대 “‘누구든 퀴어가 될 수 있다’와 ‘누구든 퀴어다’는 전혀 다르다.” ‘동성애에의 열망을 억압해야지만 성립되는 (우울증적인) 이성애 구조’라는 (90년대의) 주디스 버틀러의 도식11)을 은연중에 끌어들이면서 정작 그 핵심적 논리, 즉 구성적 외부란 구조에의 특이점이 아니라 이미 항상 ‘내부’에 버무려져 있는 모순임을 간과한 게 이 글의 패착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한때 반동성애 운동을 지지하던, 허나 지금은 (일말의 사과 없이) 게이로 커밍아웃하고서 소위 ‘인스타 게이’들과 파티를 즐기고 다니는 전 공화당 의원 아론 쇼크 역시 공화당 남성 의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있으므로 그 존재 자체로 전복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대관절 우리가 대적해야 할 성 정치적 정상성은 어디에 있는가? (‘호모내셔널리즘’을 논하는 재스비어 푸아르의 작업은 이런 관점에 대한 좋은 교정점이 된다.) 문학 속 퀴어에 대한 기존의 ‘시혜적’ 독법에 “정치적 투쟁의 필요를 소거한 채 이미 존재하는 감각적 분배의 부도덕성만을 윤리적으로 관조하는 것으로 그 몫을 스스로 제한해왔던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게 될는지도 모른다”12)라고 일갈을 날리던 그의 결론이 이런 것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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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경언, 「시는 퀴어하다」, 『2019 무지개 책갈피 퀴어문학 포럼 자료집』, (2019) 32쪽.

11) 주디스 버틀러,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권력의 정신적 삶 - 예속화의 이론들』 (그린비, 2019) 5장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화」 참조.

12) 양경언, 「미래(彌來), 미래(美來), 미래(未來) - 퀴어 비평의 가능성과 조건들」, 『크릿터 1호 : 페미니즘』, 민음사, 2019. 54쪽 ]]


Illustration by Anna Gong/Chronicle.

한편 서동진은 「‘퀴어 문학’이라는 이 씨앗을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라는 글에서 “미적 현실로 이항된 퀴어”, 즉 퀴어가 정상성을 분배받은 개성적인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가 되려 하는 작금의 현상에 맞서 “성 혁명 시대의 자유분방함”13)을 옹호한다. (그가 ’대표적‘ 퀴어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건 일단 차치하자) 그에겐 이러한 ‘변태성’이야말로 정상성이 포용할 수 없는 잉여이며 고로 퀴어의 위치를 정치적 전복성으로 전환하는 주요 형식이다. 그가 이전의 작업에서도 끈질기게 하던 말이고, 또 섹슈얼리티의 자유가 그 자체로 ‘적폐’로 여겨지며 억압되는 현재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게이 클럽과 ‘찜방’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하자 ‘정체성과 행위는 별개다’라고 재빨리 선을 긋던 이들을 떠올려보라― 일차적으로는 맞는 논리이나,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다. 내게는 여기서 “자유분방”한 성적 하위문화에 대한 옹호를 고집하는 그가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퀴어‘라는 이름을 재인간화14)하는 데 있어 꼭 섹슈얼리티의 자유만이 유일한 형식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식의 옹호는 과잉성애화가 퀴어 커뮤니티 내부를 지정 성별/외모/인종/지역의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드는 핵심 이데올로기라는 걸 그냥 지나치진 않는가?15) 퀴어 ‘진정성’의 표지로서의 섹스, 곧 ‘위반의 규칙화’(리타 펠스키).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자유가 어떤 격차를 기반으로 성립되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주의하고 비판해야 한다. 요컨대 양경언이 정체성을 (보편성이란 명목으로) 지나치게 경시한다면 서동진은 (성애화에 대한 낙관으로) 지나치게 물화하는 것이다. 그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게이 내부의 계급 차이로 인한 파국을 다룬) 영화 <폭스와 그의 친구들(Faustrecht der Freiheit)>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라는 어떤 부족의 쓰라리고 애틋한 삶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에 머무는) 박상영의 소설을 은근히 비판하면서 “성소수자라는 전체의 신화를 부인하며 그들 내부의 차이와 갈등을 세계의 다른 갈등과 (……) ‘교차’시킬” 때 그의 소설은 게이 민족지가 아니라 퀴어문학이 될 것이다.”16)라고 결론지을 때 ‘불화’라는 개념은 앞에서 성적인 “자유분방함”를 전적으로 옹호하던 그의 말과 충돌하여 아주 좁은 범위, 즉 텍스트(예술 작품 혹은 사회) 속 주체의 미시적인 실천 차원에서의 가시적인 ‘불화’에 고착될 것이다. 서동진이 저 글에서 처한 모순을 해결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퀴어’ 안의 모순을 끄집어내고 배치하여 ‘퀴어’를 쇄신하기. 그런데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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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동진, 「‘퀴어 문학’이라는 이 씨앗을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 웹진 <SEMINAR> 2호. 

14) 이는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빌린 개념이다. 유르착은 특정 담론의 의미화 작용이 개별 인간의 행위를 앞서고 포괄하고 집어삼켜버리는 것에 저항해 담론을 걷어내고 의미화하기 힘든 개별 인간의 행위로 돌아가려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명명한다.

15) “최근 스페이시(와 나)와 동갑인 나의 게이 친구 하나에게 ‘게이 바나 클럽에서 아무도 나를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화가 날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게이 문화의 이런 측면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어느 정도로 인종화하는가?” Ian Barnard, “Queer: Good Gay, Bad Gay, Black Gay, White Gay?”, QED: A Journal in GLBTQ Worldmaking Vol. 5, No. 2 (Summer 2018), pp. 108.

16) 서동진, 앞의 글. ]]

  

그것이 사회적 소수자건 특정한 구조적 역학이건, 기존의 ‘현실적’ 구조 속에서 제대로 상징화되지 못한 것들이 구조 안에서 억지로, 거의 내던져지듯 현시될 때의 혼란 혹은 왜곡은 저 상징화되지 못한 것들이 그 자신의 위상으로 인해 얻은 정치적 힘의 흔적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각각의 영역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런 흔적의 정체를 규명하고 구체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그동안의 (정치)철학의 주된 목적이요 과제였으며 ―가령 ‘모든 여자들이 입을 열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말17)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실천의 영역에서 이러한 논리가 가진 여전한 설득력을 입증한다―앞서 언급한 두 비평적 사례 역시 암묵적으로 이 논리를 긍정적 배경으로 깔고 가 ‘퀴어’에 전복적 역량을 부여하려 든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우리는 반문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역량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과연 없을까? 자신의 경험을 ‘인상적’인 형식으로 상징화할 방법을 찾지 못한, 아니 어떻게 상징화한다 한들 구조에 대하여 제대로 된 전복의 정조를 띠지 못할 ‘미미한’ 경험과 제스처들 말이다. 바이섹슈얼이나 논모노섹슈얼은 어떨까? 아니,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TERF들이 생각하는 것과 판박이로 ‘빻은’ MTF 트랜스젠더는? 게이라는 말도 모른 채 스스로를 이반이라 부르고 섹스에도 관심이 없는 남한의 중장년 남성애자 남성은? (당연하지만 더 비가시화된 퀴어가 꼭 더 심화된 차별을 받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영토화된 ‘퀴어’ 내부를 불편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모순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비난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대하는 건 결국 ‘퀴어’란 무엇보다 (각각의 정체성이든 ‘퀴어’라는 커다란 범주든 간에) 아주 적은 요소만을 공유하는 이산적 개인들의 불통합적 집합이란 사실에 억지로 눈과 귀를 막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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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는 미국의 시인 리엘 루카이저의 시 〈Käthe Kollwitz〉의 유명한 구절 "What would happen if one woman told the truth about/her life?/The world would split open"이 퍼지면서 와전된 결과인데, 이러한 와전은 원전의 훼손이 외려 선동을 위한 '창조적'인 방식이 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산포'의 미적인 역량을 암시한다. ]]


퀴어란 정상성을 이탈한(혹은 이탈하려는) 자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교란하는 자이며, 고로 퀴어 의식은 퀴어 의식이지 퀴어로 살기 위해 견지해야 할 필수 조건은 아니다. 퀴어 수행성이란 언제나 구조 안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기에 “어느 정도는 전복적이고, 어느 정도는 헤게모니적”18)인 이중성을 갖고 있으며 고로 “젠더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혹은 젠더의 계략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젠더를 전복하는 것과 같지 않다”19)는 이브 세지윅과 수재나 월터스의 말은 여기서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새로운 울림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요~’라는 다양성에의 의지와 그에 따른 재현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직시해야지만 ‘변태적 전복 대 정상성으로의 편입’이라는 가짜 문제를 기각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퀴어’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 방식을 구상할 수 있으리란 게다. 성소수자-층위와 변태-층위의 씨름은 말 그대로 끝없이 펼쳐져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기 위해선 ‘규칙화’된 소위 ‘퀴어적’ 형식들을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과잉성애화에 대한 경계와 비판. 이 말이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뉴욕 미술계도 아니고 이제사 동성애자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작업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는 남한 안에서20) 그런 주장을 하는 건 확실히 성급한 짓일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퀴어 담론에서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아예 배제하자고 할 생각이 없으며 ―오히려 그 가치의 열렬한 옹호자에 가깝다― 다만 이를 옹호하는 한편 그것이 (유일한) ‘퀴어적’ 형식으로 고착되지 않게끔 유의하면서, 나아가 ‘퀴어적’ 형식이란 것들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으면서 ‘퀴어’를 지시하고 구성할 방법을 ―물론 이 역시 영토화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 그리고 그 안에서 가능할 저항의 방법을 고민하는 것뿐이다.21) 말하자면 ‘덜 퀴어한’ 퀴어들을 옹호하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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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ve Kosofsky Sedgwick, “Queer and Now,” Tendencies, London: Loutledge, p. 15.

19)  Suzanna Walters, “From Here to Queer: Radical Feminism, Postmodernism, and the Lesbian Menace (Or, Why Can’t a Woman Be More like a Fag?)”,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21, no. 4 (Summer, 1996) p. 865.

20) 남웅, 「동시대 퀴어 예술의 예속과 불화」, 웹진 <SEMINAR> 2호.

21) 다른 언어/형식을 발명하기에 집착하는 건 어쩌면 정치적 객체의 우위에 대한 기피 심리에 기인한 걸지도 모르겠다.

22)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른바 '퀴어적' 경험에 맞지 않는 각각의 경험을 '미미'하고 '덜 퀴어한' 것으로 쉽게 치환해도 괜찮은가? 그런 방식은 이분법의 구도를 재요청하는 결과로 향하지 않는가? 물론 나 역시 그런 논리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 글에서는 '퀴어적' 형식이랄 것을 해체한다는 명목 아래 정당화할 수 있으나 좀 더 포괄적인 논의를 진행할 때에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


애석하게도 나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영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상영된 (이후 남한 땅 그 어디서도 볼 기회가 없던) <포트 어쏘리티(Port Authority)>(2019)는 그 몇 안 되는 사례다. 백인-이성애자-홈리스-남성 커뮤니티와 흑인-퀴어-볼룸 커뮤니티를 낮과 밤의 구도로 분리하고서 그 사이를 배회하는 의뭉스러운 백인 소년 ‘폴’(핀 화이트헤드)을 쫓아가는 이 영화는, 그 분리 및 짙은 색감의 조명, 일렉트로니카 OST 등의 형식이 형성하는 몽환적인 무드 속에서 일견 최근의 텀블러/인스타그램 룩에 편승한 흔해 빠진 ‘청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것이 상징화된 삶들 속에서 자신을 상징화할 온전한 형식을 찾지 못한 퀴어23)의 불안정성을 지시하기 위한 장치임이 드러나면서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달빛(Moonlight)>(2016)의 지루한 휘황찬란함은 남성성이 구성된 것이라면 ‘퀴어성’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지 못하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발로이고, <타오르는 여자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2019)의 짜증나는 순진함은 퀴어(의 관계)를 이상화한 80년대 말~90년대 초 서구-백인-동성애 미학 담론의 실패의 몰지각한 반복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포트 어쏘리티>는 퀴어 개인이 ‘퀴어적’ 형식을 초과한 채 존재할 수 있음을, 즉 ‘퀴어’라는 이름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그 불가능성 안에서 다시/새로 관계를 맺을 방법을 (불완전하게라도) 희망한다. 이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아찔할 만큼 적나라하게 제시되는데, 아마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을 당신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덜 퀴어한’ 퀴어들을 위한 몇 안 되는 영화라는 사실만큼은 당신께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당신과 함께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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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많은 관객들이 ‘폴‘을 이성애자-남성으로 인지하지만 사실 이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를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을 위해 간략하게만 설명하면, ’폴’이 다양한 ‘퀴어적’ 형식에 끌리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24) 2021년 3월 말 부터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의 제목인 <진실과 거짓 사이>로 OTT 서비스 왓챠에서 서비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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