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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an 01. 2021

12월 32일이 아니네


문득 속이 울렁거리고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유밍의 노래들을 셔플로 재생시킨 채 글을 쓰던 중 (위에 유튜브 링크를 걸어놓은) ひこうき雲가 틀어져 꽤 간만에 듣다가 그랬다. 못해도 200번은 족히 들었을 이 노래에 대해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보건데, 최근에 죽음에 대해 거듭 생각하던 게 중첩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코로나 19 때문이든, 지난 한 해 삶을 떠난 친구들 때문이든, 나 혼자만의 문제 때문이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이 자살로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살로 죽고 싶다, 는 게 아니라 자살로 죽을 거라는 예감. 그것 말고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보였다. 평탄히 잘 산다는 건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은, 병과 함께 살면서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삶에 감사하고, 삶을 갈구한다.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 죽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매일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살의와 괴로움을 안고 살지만, 오히려 그래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절대 그냥 죽지는 않을 거다. 잘 살고 말아야지. '바깥'으로 나가려는 자가 아니라, '바깥'을 이루려는 사람처럼.


지난 1년 간 '비평가'란 직함을 얻은 이후 이 직함으로 무슨무슨 일을 했나 순전히 결과론적으로만 돌아보자면, (발표 예정인 글을 포함해) 4개의 장문의 글을 기고했고, 2개의 어느 정도 정돈된 글을 여기에 썼고(<스타워즈: 스카이워커의 재림>즐겁게 일그러지는 영혼), 2개의 영화제에서 일을 했고, 2번의 강연과 2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다 2번이거나 2의 제곱이다... 하여튼, 글을 더 쓸 기회가 꽤 주어졌지만 코로나 19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번번이 좌절됐다. 그건 좀, 아니 많이 아쉽다. 제도 비판의 조류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당에 있어 불이익을 받은 일은 없었다. 적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좋은 글을 썼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아니, 내가 이 직함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확신이 안 선다.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체가 확신이 안 선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확신하며 살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당장 집 앞의 산이 내일에도 똑같은 산일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갈수록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확신 없는 상태로, 항상 모면과 유보의 삶을 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삶이 하여튼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것이다. 내년에는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길 바란다. 


올해 들어서 당신의 글에 생긴 변화가 무엇이냐, 하고 누군가 물었다. '올해'라는 단서가 붙을 때엔 이런저런 환경의 변화를 먼저 고려하라는 무언의 요구가 숨어있을 터이다. 등단, 나이, 코로나 19, 모 평론가와의 반목, 그리고... (...) 하지만 사실 이런 변화들 각각은 내가 글을 쓰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단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확언할 수 있긴 하다.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려)는 일이 조금이나마 늘었다. 그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글을 쓰는 게 더 힘겹고 더 어렵고 더 느린 일이 되긴 했지만(그래서 함께하는 편집자분들께 항상 죄송한 마음만 갖고 있다...), 하여튼 내 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을 당신이 감지했다면 아마도 그런 환경의 변화가 선행한 결과일 게다. 그리고보니 최근에 여기저기서 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었냐고 내게 물어온다. 보기엔 한참 영화 얘기만 하다가 갑자기 영화 얘기는 줄이고 소설이나 만화나 음식이나 TV 예능/드라마나 (...) 로 주된 화제를 전환하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고, 영화 얘기를 하려면 영화 얘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과, 영화 이외의 관심있는 것들에 대해 맘 놓고 얘기해도 이젠 괜찮겠다는 생각이 엮인 결과라 해야한다. 


재작년부터 이런저런 자리에서 얘기했던 것이지만, 좁은 범주로서의 영화 담론 소비자들에 나는 더 이상 큰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더 제너럴해지려는 욕구?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젖어들어가고 그래서 내가 사용하던 어떤 전제들이 의심스러워진 이상 그것 말고는 당장의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그 전제들을 이루는 요소들까지 한꺼번에 버려선 안 될 테고, 각자의 전제들을 훼손하고서 그 속에서 무엇이 각자인지, 아니 각자일 수 있는지 되묻는 태도가 필요할 테다. 더 과감하면서 더 세심하게. 그러면서 좁은 범주로서의 영화 담론 안으로 돌아가기. (어제 오늘 공개된 어떤 글들을 읽고 있다보면 이런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가령,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또 역사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이 역사를 만드는 거라면, 이 두 명제를 어떻게 한 큐에 적당히 합칠 수 있을까? 예술작품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서로에게 접혀들어가는걸까? 거기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건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을 갖고 씨름을 계속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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