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도록 아름답고 절절한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두 남녀 사이에 오가는 (파편적으로 나열되는 모잠비크의 숏들 위로 낭독되는) 편지들. 이는 외도의 끝을 촉구하는 구슬픈 독백의 교환이다. 딱딱하게 읽히는 절절한 말들이 그저 묵묵히 교환되는 그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음울한 감정이 점차 선명해지고, 곧 <타부Tabu>(2012)라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속을 옥죄어 온다. 아우로라라는 이름의 여자만이 쓰고 보낸 몇 편의 편지로 결국 허무히 끝난 외도/교환. 그리고 당장 무엇이 더 남아있나? 상쾌하고도 신화적인 드럼 라인이 침투한다. 하지만 이 노래는 60년대 걸그룹 로네츠(The Ronettes)와 프로듀서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걸작 Be My Baby면서 '그' Be My Baby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쓰인 건 저들과 동시대에 활동한 마다가스카르 출신의 가족 그룹 리 세프(Les Surfs)가 Be My Baby를 커버한 버전 중 하나인 Tu Seras Mi Baby이기 때문이다. 이 다음 숏에서 아우로라는 하염없이 흐느낀다. (카메라가 아우로라의 후경에 라디오를 걸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노래를 그도 듣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다. 이 다음 숏에 붙는 건 지안 루카 벤투라라는 이름의 남자가 아직도 화면 위를 흐르고 있는 이 노래에 맞춰 드럼을 연주하는 숏인데, 그의 직업이 드러머이며 외국의 어느 호텔과 계약해 장기 공연을 진행하고 있단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에, 어쩌면 아우로라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벤투라의 노래를 문득 들으며 흐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각각의 숏의 강한 분절성으로 인해 그 역시 모호하게 처리되어 확신할 수는 없다. 단지 Tu Seras Mi Baby가 서로 분리된 이들 사이를 모호하게 묶고 있다는 것만을 확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잠깐, 우리는 이와 비슷한 대목을 앞에서 보지 않았나? 영화의 전반부인 "실낙원" 파트로 돌아가 보면, 필라르라는 이름의 중년 여성이 있다. 12월 31일에 그가 (자신의 집에 묵겠다는 약속을 갑자기 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신분에 대한 거짓말까지 한) 한 여자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다시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이 Tu Seras Mi Baby가 약간 둔탁하고 뭉개진, (영상물에서 주로 인물의 심리와 상관없는 디제틱 사운드를 묘사할 때 쓰이는) 로파이한 질감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장면이 전환되어 그가 극장에서 (옆에서 곤히 잠든) 화가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다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Tu Seras Mi Baby는 화면 위를 우직하게 떠돌고 있어, 어쩌면 이 노래는 필라르가 보는 영화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필라르의 리버스 숏, 즉 (역반사된 영화의 빛에 필라르의 얼굴이 번쩍이는 걸로 보아 분명히) 상영 중인 영화의 시각적/청각적 이미지 일체가 장면의 구조에서 '빼기' 당했기 때문에 이 역시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필라르는 무엇을 보며, 아니 무엇에 대해 울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노래는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는 걸까? 이러한 '빼기'는 이 장면에 마법 같은 힘을 조성한다. 자신이 앞서 겪은 모든 실패에 대해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무엇도 아닌 것에 대해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이한 역설의 순간.
여기서 <타부>의 후반부인 "낙원"이 전반부인 "실낙원"에서 촉발된 플래시백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기억을 발화하는 건 늙은 지안 루카 벤투라지만, 그것을 플래시백으로 만드는 건 필라르가 아닐까? 달리 말해 우리가 보는 "낙원" 파트란 필라르가 벤투라의 기억에 자신의 주관을 걸쳐놓은 판본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영화를 보며 짐작한) 필라르의 태도가 "낙원" 파트의 방법론을 지탱하고 보증한다는 게다. '현재'에 속하는 이 이중의 인력 속에서 기억은 빠른 속도로 탈구되어 개인(들)에 내재적인 것이 아닌 외재적인 것으로 변이한다. 혹은 본래의 외재성이 수행적으로 드러난다. 인물들의 소거된 ('말소리'라기보다는) 대화 소리, 종종 주 서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그 자리에 존재하는 잉여적 대상들을 포착하는 '불가능한' 주관적 시점/청점 숏 등 "낙원" 파트의 미시적인 형식들은 여기에 배치할 때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 생각에 기인해 아우로라의 눈물을 필라르의 눈물 속으로 접으면, 두 눈물을 장식하는 Tu Seras Mi Baby가 공통적인 어떤 사실을 깨달은 후 떠오르는 감흥을 이르는 표지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실? 이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내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불안의 사실. 저 두 장면(의 눈물)은 바로 이 사실을 통해 공명하는 것이다. (혹은, 필라르는 벤투라의 말을 듣던 중 이 대목에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눈물을 흘릴 때에도, 그것이 자신의 비애감의 표현이란 건 알지만 그 비애감이 폭발한 정확한 요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재현할 수 없지 않던가? 그 순간에 오직 눈물만이 스스로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
한데 중요한 건 역설적이게도 이 (명확히 재현되지 않는) 불안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의 만남이 성립한다는 점이다. 아우로라와 벤투라, 필라르와 그가 겪은 여러 실패들. 물론 이는 개체/사건들이 서로 분리된 상태 그대로 충돌하도록 짜인 간접적이고 모호한 구도의 만남이지만, 누구든지 공존의 불가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에선 그것이 그 한계를 초과할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책일 테다. 그리고 그러면서 서로 다른 것들은 함성에 가까운 공명을 이루어 서로의 감각을 통째로 뒤흔든다... 이때 Tu Seras Mi Baby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깨달은 불안에 대한 표지이자 또 이를 바탕으로 개체/사건들을 새로운 느슨한 구도 속으로 슬며시 묶는 매듭으로서. 아마도 필라르가 보고 있던, 우리를 무지로 이끄는 무형의 영화는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할 힘을 가진 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필 스펙터의 손길을 거친 여러 노래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명료하게 들리는 보컬과 이를 둘러싼, 각각의 형태와 정체를 명료히 파악할 수 없이 응집된 온갖 소리들은 분리된 동시에 연결된 채로 우리에게 '쏟아진다'. 나와 함께하지만 함께하지 않는 것? 거기서 보컬은 음향적 요소들과 함께 노래를 이루는 게 아니라 마치 '쏟아지는' 음향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련한 투쟁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상쾌하며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는 어쩌면 이 일그러진 음향적 공간감을 순화하면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필 스펙터의 노래들은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라 커버 버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급변하는 기록체계가 원본과 파생본 사이의 강력한 분리를 야기했다고 말할 때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은 "원본"이 아니라 "파생본"인 것이다. 나에게 <타부>는 필 스펙터에 대한 최상급의 비평과 연구만큼이나 필 스펙터의 음악의 기이한 감흥의 정체를 간파하고 이용하는, 경의의 찬사로 보인다.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난해 중순부터 나는 어떤 자리를 위해 필 스펙터에 대한 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올해에는 꼭 마무리하려 한다. 대략 2016년부터 아이디어는 갖고 있었지만 그게 구체화에의 강한 열망으로 진입한 건 저 무렵이었고,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글을 함께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허나 지난해 말에 내게 들이닥친 이런저런 사건과, 처음에 떠올렸던 기획의 허무맹랑함을 뒤늦게 깨달은 것 때문에 작업을 중단한 이래 한 동안 자료 조사를 제외하곤 거의 손을 놓고 있었으며, 바로 얼마 전에야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1964년 이래 필 스펙터 사단 특유의, 마치 단전에서부터 울리는 것 마냥 두텁고 풍성한 사운드스케이프와 그 프로듀싱 방법론을 수식하는 데에 쓰여온 수식어인 "Wall of Sound"는 오랫동안 그저 각기 다른 소리를 최대한 조밀하게 짜 맞춰 하나의 무드로 수렴시키는, 예정조화적인 형식의 극단적 사례 정도로 이해되어왔으나 나는 그런 이해를 어느 정도 기각하고서 모노 스피커에의 고집, 에코/리버브 효과, 노이즈처럼 희미하게 남는 악기 소리 등 "Wall of Sound" 특유의 형식을 음악이 1950~60년대에 맞이한 어마어마한 변화에 대응하려는 자세에 근거한 '외상적'인 것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달리 말해 필 스펙터라는 아이콘에서 대중음악의 역사(적 전환)를 역산하기. 칸트와 들뢰즈, 굴드와 크라이들러, 키틀러와 파브리, 스크루튼과 펜먼을 오가며 진행되는 논의 속에서 레코드-음악은 그것이 이런저런 소리들을 한 데 종합한 결과물이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사실 때문에 제 고유의 문제를 갖게 된다는 점이, 그리고 청취자-주체와 레코드-작품 사이의 관계란 서로를 이용하고 자극하는 지저분한 관계라는 점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물론 아직 쓰고 있는 글의 구체적인 사항을 미리 밝히는 게 여러모로 좋은 일은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이 조급함에는 조금의 변명거리가 있다. 갑자기 필 스펙터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 필 스펙터가 죽었다. 라나 클락슨 살해 혐의로 형을 살다 교도소 안에서 '평범하게' 죽었다.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그를 추모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필 스펙터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가 지나칠 수 없는 천재요 영웅인 동시에, 지나칠 수밖에 없는 범죄자요 살인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유명인에 있어 역사적인 업적과 인간적인 과오는 분리해야 한다는 말에 절반만 동의한다. 업적으로 과오가 손쉽게 덮여지는 꼴을 수없이, 질리도록 봐온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 미적인 것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과오를 너무 쉽게 업적과 분리시키지는 말자. 대신 그것이 작업에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간에 업적이 과오 속에서 탄생했음을 끊임없이 직시하자. 업적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여기서 (우리 세대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작가성에 대한 논쟁으로 글을 접속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자리에서 할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필 스펙터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추모의 심정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그럼에도 우울을 느끼는 건, 그가 남긴 노래들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