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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Feb 12. 2021

여전히 거듭 〈무한도전〉을 논할 이유가 있다면?


작년 8월 발매된 영상비평지《마테리알 3호에 실었던 글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이 온라인에 공개됐다. 〈무한도전〉에 대한 나 자신의 오랜 (빠심과 까심이 혼종된) 관심을 여기서 '일단은' 결산짓고자 했다. 내가 보기에 〈무한도전〉은 우리 시대 혹은 우리 세대의 문화를 구축하는데 일조한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달라'고 말씀해주신《마테리알》 편집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누가 봐도 처참한 수준의 글이다. 개념어를 제대로 쓰는 데에도 실패했고("모더니즘의 기획에 입각한 통상적인 미적 시도들이..." 이 문장은 대체 왜 고수했는지 지금와서 보면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원래 제안받은 분량도 초과했고, 그럼에도 하려는 이야기를 그 안에 다 담아내지 못해서 마치 중간에 글이 끊긴 듯한 인상을 준다(사실 아닌게 아니라, 실수로 마지막 문장 몇 개를 지운 채 최종고를 송고했었다). 참으로 민망하다. 물론 훨씬 긴 분량을 염두에 두고서 느긋하게 메모를 하고 있던 차에 이 주제로 갑자기 글을 쓰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것 같지만... 하여튼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개정판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심상찮은 일일까? TV 예능 프로그램 〈돈 키호테〉, 〈플레이어〉, 〈끼리끼리〉 등을 조금씩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의문인가 싶어 해당 프로그램들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봤다. 이 프로그램들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을 발견한 건 역시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저 프로그램들의 형식, 그러니까 터무니없고 기괴한 일에 도전하거나, 고정된 멤버들을 매번 완전히 다른 극적 상황에 떨어뜨리는 (비)형식이 우리에게 〈무한도전〉의 시그니처로 각인된 지는 너무도 오래됐다. (......)〈무한도전〉이 종영하고 얼마 안 되어 누가 봐도 〈무한도전〉적인 프로그램들이 연달아 출몰하는 게 그저 우연일까? 또 이건 심상찮은 일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무한도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 '이후'의 초인기 예능 프로그램들(멀리로는 〈1박 2일〉 시즌 1, 가까이로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 사이에서도 나름의 인기와 영향력을 유지하던 때와는 달리 멤버들의 나이 듦 및 제작진의 변화 속에서 프로그램의 플롯이 '노후화'되고 식상해져—이 결정적인 원인을 여초 커뮤니티의 '프로불편러'들 탓으로 돌리는 이들의 비열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자신에 내포된 이데올로기들과 자신이 만든 형식들을 독창적/독점적으로 상징화할 힘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무한도전〉은 종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한국 예능계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의 끝이 아니라 〈무한도전〉적인 것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존속을 상징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돈 키호테〉를 비롯한 누가 봐도 〈무한도전〉적인 프로그램들의 잇따른 출몰은 존속의 사례라 할 수 있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니다." 


"여기서의 리얼리티란 충만한 충격으로 신체의 감각을 혼동시키는 '실감'이 아니다. 그것은 마름질 되지 않은 것과 마주하는 '실재'의 감각이며, 〈무한도전〉에서라면 이전의 TV 예능의 체계에서 예외상태나 잉여로 여겨졌을 순간으로 바뀐다. 멤버들의 기나긴 수다나 지지부진한 게임 진행처럼 내러티브 경제의 측면에서라면 편집 과정에서 들어내 마땅한 순간을 적극 활용하거나, 예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정형돈의 '웃기는 것 빼곤 다 잘하는 개그맨', 길의 '무리수')를 컨셉으로 밀고 가거나, 통제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공공장소로 나가 촬영을 진행하는 등, 〈무한도전〉은 (그저 가이드라인으로서의) 극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을 과잉 이용하면서 그것이 정말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임을 텍스트 내부에서 노골적으로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열심히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고 조작해 자신의 세팅에 포섭한다. ("뷁', "어쩌라고...?" 등의 특유의 자막은 그 자체로 예외상태적/잉여적이면서 또 그런 순간들을 수식하는 두 겹의 역할을 수행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 다루려고 했(으나 못했)던 나머지 부분은 살짝 변형되어 「즐겁게 일그러지는 영혼 - <가짜사나이>와 <대탈출> 사이의 진정성」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함께 읽어보시길 권한다.








~이 아래부터는 글을 읽은 분들을 위한 파편적인 후기~









“일상은 달아난다. (...)  왜냐하면 일상이란, 아직 형식화되지 않은, 즉 정보가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도, 이미 이전에 언급된 것에 대해서는 모든 관계에 앞서 놓여 있으면서 동시에 여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속에서, 왜 동시에 뭔가 본질적인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수긍하게 되는 것인가?”
Maurice Blanchot, “Everyday Speech”, Yale French Studies, No.73, p.15


이는 <무한도전>의 논리로 향하는 길을 터주는 텍스트다. 일상은 분열되어있다. 보다 정확히, 익숙한 것과 낮선 것은 일상 속에서 분열된 동시에 통일된 채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무한도전>의 논리는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이 글을 쓰면서 강력하게 의식한 4개의 텍스트가 있는데, 각각 허문영의 「웃음과 놀이, 혹은 비예술에서 배우기 - <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손지상의 「무한도전-좀비에 물린 한국 예능을 위한 백신」,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핼 포스터의 『디자인과 범죄, 그리고 그에 덧붙인 혹평들』이다. 앞의 두 글은 아주 나쁜 의미에서 의식했고, 뒤의 두 책은 좋은 의미에서 의식했다. 



가치판단과는 조금 별개로, 이 글에서 얘기한 것이 가장 밀도 높게 구축된 <무한도전>의 에피소드는 313화 뉴욕스타일 2부의 후반부인 '100분 토론'이라고 나는 본다. 유재석의 정리 멘트 "자 이제 오늘 토론... 이렇게 또 얻은 것 없이 마무리를..."은 어떤 점에서 <무한도전>을 관통하는 유머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테리알 3호가 발간되고 얼마 안 지나서 Ask.fm에 이 글에 대한 문답을 했는데, 이 글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해 여기에 개제한다. 


Q: 마테리얼에 쓰신 무한도전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논지에서 무도-이전의 예능이 무도의 특수성을 확보키 위한 곁가지로 다소 단순화되는 게 아닌지 싶었습니다. "이전의 TV 예능의 체계에서" "마름질되지 않은 것과 마주하는 '실재'의 감각이" '예외상태' 혹은 '잉여' 로서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했네요.


A: 그렇죠. 사실 웃음 혹은 유머 자체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며 대상을 기각해버리는 태도를 갖고 있단 점에서 그런 '실재'에 맞닿아있으니까요. 가령 메타 개그의 오랜 역사나, 개콘에서 심현섭이 실수로 성기를 노출했을 때 그게 경악과 웃음을 동시에 유발했던 게 그런 사례죠. 그니까 문제는 단발성에 그치는 그런 유머를 무도가 어떻게 이용했느냐에 있는 거고요. 그 글을 쓰면서 어떻게 짚고 넘어가야 명확해질까 고민했던 지점인데, 저 나름대론 "예외상태 혹은 잉여"라고 못을 박고, '무도가 그 기각의 대상을 무한정으로 확장하고 제 질서 안에 포섭했다'라고 얘기의 범위를 좁혀서 전제가 명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생각만큼은 못 된 모양이네요. 중요한 지적 감사합니다!

(https://ask.fm/persona768/answers/16247613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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