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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y 21. 2021

카녜 웨스트에 대한 메모


(...) 특정 스타일이 자신의 특징적인 인장이라 할 수 없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스타일에 대한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창작자들의 모습은 창작자의 '작가'적 자의식이 작품, 즉 재-반복으로서의 작업물을 뛰어넘는 광경을 보여준다. 저작권 옹호가 도덕으로 여겨지게 된 현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이들은 잘 쳐봤자 똑똑한 도둑에 불과하고, 그러니 이들을 후안무치한 카피캣이라고 쉬이 비난할 수 있을 게다. 허나 그건 상황을 지나치게 간단화하는 것일 터. 그런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비난은 사실 나쁜 것은 그저 나쁠 뿐이라는 동어반복만 반복한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 필요한 태도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자의식으로 이끌리는지를 총체적 맥락 안에서 파악해 다시 판단하는 것일 터. 여기서 나는 반사적으로 한 이름을 떠올린다-카녜 웨스트. 이 상황의 징후적 아이콘이라 할 만한 인물. 


그의 등장 이전에, 힙합에서 비트를 만드는 주된 기법 중 하나인 샘플링은 '계승'의 의식과 엇비슷한 효과를 창출하곤 했다. 가령 우 탱 클랜은 크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콘셉트를 중화 무협 영화에서 따왔을 뿐만 아니라 그 영화들의 소리를 샘플링해 곡을 만듦으로서 무협 영화가 흑인 문화 안에서 갖는 위상을 드러냈으며, 나스의 팬들은 The World Is Yours를 듣고서 이 피아노 라인의 원 주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누구(인 아마드 자말)는 어떤 음악가였는지 찾는 내기를 벌였다. 파편화된 표면의 재맥락화를 통해 본래의 맥락을 재발견하고 활성화하는 영적인 '계승'의 작업. (개중엔 매들립과 제이 딜라처럼 이런 효과를 미적 방법론으로 밀고 나간 사례도 있었다) 이는 힙합이 (흑인-)문화의 광기를 민속지적 양식으로 승화하는 독창적인 음악 장르로 형성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문장의 인과를 뒤집어서 말하자면, 많은 래퍼/프로듀서들은 근본적으로 '음악 덕질'인 동시에 '소리 도둑질'이라는, 원 대상에 대한 애정과 폭력을 한 몸에 갖는 역설적 위상을 가진 샘플링에 이런 방식으로 진정성을 부여해 샘플링을, 그리고 그 기법을 근간 중 하나로 삼는 장르인 힙합을 정당화해온 것이다. 이 정당화는 말하자면 장르의 규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나아가면 우리는 힙합의 역사를 인정-상징 투쟁의 양상으로 독해하는 견해와 마주칠 것이다. 허나 이에 대해선 다른 자리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


그런데 카녜 웨스트는 샘플링을 둘러싼 이런 규칙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며, 그가 제이-지, 저스트 블레이즈와 함께 (제이 딜라의 뒤를 이어) 대대적으로 유행시키고 발전시킨 하이피치 소울 샘플링은 원곡이 마치 카녜의 곡의 느린 버전처럼 들리게 만들며 (벤야민적인 의미에서) 오리지널의 위상에 균열을 내면서도 일정 부분 '계승'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카녜가 숭배의 대상을 바꾸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숭배?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순차적으로 들으면 카녜가 항상 청자의 입장에선 살짝 민망할 정도로 특정 대상에 과하게 매달리며 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절절히 고백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대상의 전이가 매 앨범마다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대학 삼부작'에서 제이 지, 마이클 잭슨, 자신의 어머니 등에 대한 (애교에 가까운) 숭배는 [808s & Heartbreak]에서 부재하게 된 대상에 대한 비애적 숭배를 거쳐,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Watch the Throne](의 일부), (특히) [Yeezus]에 이르러선 숭배할 외부의 대상을 새로 찾는 대신 -No Church in the Wild의 훅을 떠올려보자-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로 변모했으며, 절묘하게도 정확히 그때 그의 샘플링은 더 이상 '계승'과는 관련이 없는 스타일이 되었다. 


샘플이 된 곡들 원래의 형체를 단 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잘게 쪼개고 일그러트려 다른 여러 샘플들과 무차별적으로, 요설스럽게 뒤섞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 음악을 듣는 데 큰 상관이 없어진 것이. 니나 시몬이 누구고 킹 크림슨이 뭔지 잘 아는 게 지금 이 노래를 듣는 데 무슨 효과를 준단 말인가? 샘플이 원래 어떤 곡인지 찾는 사람은 아직도 많지만 ―Who Sampled 사이트나 유튜브에 널린 디거들의 채널― 그 원곡을 전부 듣고 원곡의 음악가가 누구인지를 파헤치려는 디거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다. 이는 작품 내부 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과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가령 Blame Game에 자신의 곡 Avril 14th이 무단으로 샘플링됐음을 안 에이펙스 트윈이 카녜 측에 이메일로 '원한다면 이것보다 더 세련된 버전을 당신이 원하는 속도로 연주해 새로 곡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카녜 측에서 '이건 당신 노래가 아니라 우리 노래다'라고 '철벽'을 친 건 유명한 일이다(출처). 이렇게, 카녜 웨스트는 이전의 프로듀서들이 샘플링에 부여하느라 애쓴 미적 진정성을 거침없이 폐기하고서 '소리 도둑질'로서의 샘플링을 그 자체로 긍정해 밀고 나가는 천박함을 자신의 모토로 내세웠다. 말하자면 매니아 아닌 콜렉터로서의 디거. 카녜의 천박함이 그 당대의 문화의 그림자에 적을 두고있다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자명할 테다. 웹하드와 토렌트를 기반에 둔 온라인 해적질의 시대에야 우리는 비로소 유독한 폭력성이 애정을 이루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음을 우회책 없이 인지할 보편적인 미적 방책을 손에 쥔 걸까.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는 어쩐지 '취향 없음'이란 상태가 사회적으로 주류화된 양상과 겹쳐지지 않는가? 나는 이전에 말한 "취향을 전면화"와 반대되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혹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힙합의 해체적 본성에 대한 ('인간적') 반발의 산물이 과장된 자아라고, 그래서 힙합의 역사는 곧 고정점의 자리를 다시 찾는 순응적 역설의 역사라고 (프랑코 모레티를 따라?)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해체적 본성이 곧 과장된 자아를 창출하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








(해당 글은 2019년 말에 공개했던 글 「영매로서의 '작가' (1)」의 후속편으로 준비 중인 「영매로서의 '작가' (2)」의 초반부다. 사실 이 대목은 「(1)」을 공개했을 때 이미 완성했었는데, 「(2)」 전체를 완성하는 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계속 미뤄지고 미뤄져 이젠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보니 조바심이 들어 홧김에 공개한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고, 음악 글쓰기 워크샵인 'Various Critics'에서 함께 글을 쓰는 이엔씨 님의 이번 글 트릭놀로지의 유령들을 읽다가 카녜 웨스트가 거론되는 부분을 읽고 피드백을 드리면서 이 대목만이라도 먼저 공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원래는 「(1)」을 포함해서「영매로서의 '작가'」를 전반적으로 보완해 다른 매체에 정기 연재를 하고자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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