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Aug 06. 2020

즐겁게 일그러지는 영혼

<가짜사나이>와 <대탈출> 사이의 진정성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유튜브 예능 콘텐츠 <가짜사나이>를 한 편으론 징그럽게, 또 한 편으론 흥미롭게 봤다. 맨몸 운동을 한답시고 김계란이 '이끄는' 유튜브 채널 피지컬갤러리를 구독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가짜사나이>로 흘러간 건데... 이 '콘텐츠'는 정말 이상하다. 너무 보기 싫고, 짜증나고, 심지어는 유해하다고까지 생각하는데 ―당장 페이스북에 검색해봐도 이 콘텐츠가 어떤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지가 바로 보인다― 다름아니라 그 기반에서 <가짜사나이>의 흥미로움이 발생해, 고통스럽게 꾸준히 봤다.


내 생각에 <가짜사나이>의 흥미로움은, 분명 콘텐츠의 줄기 자체는 '군대가서 고생 좀 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라는 일종의 보수적 성장서사를 의도하고 또 그렇게 자연스레 흘러가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교육생들이 교관의 말에 제때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실은 촬영용 드론의 소음 때문이었다는 후일담부터 공혁준의 (싱겁고 성급하게 정리된) "주작" 논란까지, 김계란의 이름 옆에 (매우 진지한 상황에서도) '교관' 명칭 대신에 붙는 '대머리'부터 인터넷 셀렙으로서의 고통을 말하는 교육생들에게 (신입 유튜버인) 에이전트 H가 위로와 조언을 해주는 (시청자의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파트까지, 1화에서 훈련 강도를 낮춰달라는 제작진의 요구부터 3화에서 교육생 전원이 퇴교하자 (누가 봐도 급조한 티가 나는) '무사트 서바이벌 교육 베이직 과정'에 들어가게되는 과정까지, 그리고 마지막화에서 마지막 훈련 직후 갑자기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감동 무드까지. <가짜사나이>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교육생들이 보수적 성장서사에 속한 수난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순조로운' 광경이 아니라 그 (방송-)체험이 자신을 이루는 요소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온갖 종류의 방해와 중단, 곧 (평범한 의미로든, 맑시즘적인 의미로든) 모순으로 인해 자꾸만 이상해지고 좌절되는데도 ―공혁준의 "주작" 논란에서 보여지듯 이는 심지어 텍스트 바깥에서도 이뤄졌다― 성장서사는 하여튼 꾸역꾸역 지속되(려하)는 기괴한 광경인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파열된 서사라니! 본 콘텐츠가 대놓고 참조한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의 파열이 남한 군대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모양새가 시청자들에게 지적받은 결과, 즉 서사 자체의 패착이었음을 떠올리면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가짜사나이>의 경우가 더더욱 기괴하게 보인다. 


김계란은 '무사트 서바이벌 교육 베이직 과정'을 감행한 이유를 '(유튜브 콘텐츠치고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이유로 드는 건 현상에 대한 내 관심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차라리 "일종의 보수적 성장서사를 의도"했다는 앞의 말을 뒤집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UDT 훈련이 아니라 거기서 펼쳐지는 모순들이 이 콘텐츠의 핵심이라고, 모순을 해결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외려 전면화한 채 서사에 포함시켜버리는 억지스런 봉합 자체가 <가짜사나이>의 진정한 의도라고 말이다. 나는 《마테리알 3호를 위해 쓴 글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에서 "기존의 TV 예능의 체계에선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최대한 '예능화'하기, 요컨대 그것이 <무한도전>의 논리요 <무한도전>이 바꾼 한국 예능의 패러다임"이라고 썼는데, 이 생각의 연장선에 <가짜사나이>를 배치한다면 <가짜사나이>는 <무한도전> '이후'의 논리를 위태로울 정도로 밀어붙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어떤 면에서? <무한도전>의 진짜 서사가 개별 에피소드가 아니라 긴 방영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축적된 다양한 캐릭터성에서 메타적으로 조직되던 반면 <가짜사나이>는 그런 메타적 장치 없이 앞서 말한 대로 "총체적으로 파열된 서사"로만 성립된다는 면에서. 그렇기에 내게 <가짜사나이>의 인기는 적잖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젠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난 모순을 한껏 (엮는다기보다는) 그러모으는 부조리성이 예능에 있어 완전히 '일반적'인 유희 대상이 된 걸까?



당신은 반문할 수 있다. TV 예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아마추어인 유튜브 예능이기에 이런 수준의 모순과 파열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어쩌면 당신은 2010년대 초의 아프리카 TV/페이스북 라이브의 사례들을 먼저 떠올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카메라, 하나의 마이크, 하나의 숏, 생방송이란 최소한의 조건으로 방송이 진행되면서 가능해지는 우연-모순들) 그러니까 '일반적'이라는 수사는 그래도 아직까진 과장된 게 아닌가? 하나 tvN의 예능 <대탈출> 시리즈의 존재가 이런 반문을 무력화시킨다. 방탈출 게임의 포맷을 어마어마하게 확장해 정교한 세팅과 상세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이 시리즈는 매 에피소드의 허구적 세계가 성립되는 방식에서 <가짜사나이>와 직접적으로 공명한다. 사이비 종교의 만행, 예정된 살인, 질병 테러 등 허구적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안으로 투입되는 멤버들은 그야말로 영웅인데, 이 허구적 세계를 담는 그릇이 콩트도 미니 시리즈 드라마도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선 실제 삶에서의 성격과 위상이나 허구적 세계로의 투입을 위한 개연성같은 자신의 모순을 뭉개고서 봉합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히 조율되어 몰입할 수 밖에 없는 극적 상황이라 해도 그들이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는 한 이 봉합이 적당히 이뤄질리 만무하고, 결과적으로 시청자는 잘 조율된 허구적 세계를 배경으로 멤버들의 존재 자체에 결부된 모순이 계속 덜렁거리는 "파열된 서사"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상황이 이 프로그램에선 대개 문제라기 보다는 유머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아니, 장동민이 등장한 시즌 1의 "벙커" 에피소드처럼 메타 개그를 대놓고 활용한 경우를 염두에 두면 이런 표현은 살짝 모자라다. 그런 모순이 <대탈출>에 있어 모종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라고 해야한다.


진정성? 이 때의 진정성은 흔한 고착적 정의, 즉 믿음에 대한 진지하고 감상적인 자기 증명/재현과는 다르다. 그 반대편에서 "나는 진정성 따위에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가 바로 이 맥락에서의 진정성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냉소로서의 진정성. 믿음을 거부하는 분열적이고 유희적인 자기 증명/재현. '순수'나 '진짜'가 사후적으로 구성/연출된 것이라는 후기 구조주의의 선구자들의 교훈을 엄격하게 되새긴다면 진정성이란 개념은 보다 포괄적으로, 특정한 생각의 '아바타'가 되기 위한 퍼포먼스-즉 의지에의 의지로서 새로 받아들여져야 할 테다. 그리고 그 안에 한 쪽에선 대상에 자신을 내걺으로서, 다른 한 쪽에선 대상에서 자신을 떨어트려놓음으로서 자신을 구성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야한다. 하지만 어떤 이가 한 의제에 있어선 전자를, 다른 의제에 있어선 후자를 주장하기도 하는 것처럼 두 진정성은 칼로 베듯 말끔히 갈라지지는 않은 채 한 단어안에 뭉뚱그려지는데, <가짜사나이>와 <대탈출>이 서사를 하여튼 계속 진행시키면서 모순을 전면화하는 모습은 바로 이 상황, 두 진정성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이 상황을 포착해 전시한다. 앞서 말한 "대상"을 이 둘에 걸맞게 '서사'로 치환한다면 좀 더 명징하게 읽히리라. 즉 서사(가 제공하는 체험)에 자신을 기꺼이, 온전히 내걸려는 의지와 서사에서 떨어지려는 의지의 '팽팽한' 뒤얽힘, 그리고 그런 뒤얽힘의 산물로서의 "파열된 서사". 중요한 건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충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또 다시 변화한다. 우리는 <가짜사나이>와 <대탈출>에서 가능하면 두 진정성 모두를 추구하고 또 요구하는, 더욱 더 분열적이 된 주체의 출몰을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자문한다. 어쩌면, 진짜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도래한 건 다름 아니라 지금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런 가능성이 남한에선 이미 <무한도전>에서부터 진행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에서 펼치고 있다. 미안하지만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어그로를 끌었다. 안타까운 수준의 글이지만 그래도 읽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보이는 이 태도도 지금 이 글의 논지과 연계를 갖는데...

작가의 이전글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를 쓰고 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