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자음과 모음》2020년 여름호(45호) 크리티카 부문에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라는 제목의 아주 짧은 글로 참여했다. 《자음과 모음》의 이번 호에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가 게스트 에디터로 참여해 '이것은 퀴어문학입니다'를 주제로 (편집진의 말을 빌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밝히지 않은 퀴어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했으며, 이번 크리티카 역시 그 연장선에서 진행됐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은 퀴어문학입니다'를 위한 비공식적 서문 혹은 뒷바침이 되길 바라면서 썼고(물론 나는 잡지 출간 이전까진 여기에 실린 작품들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수록작도 내가 최종본을 송고한 이후에 발표됐으니...), 그래서 어느 정도는 소심하고 안전한 글로 읽힐 터이다. 그것 말고도 좀 불만족스러운 글이긴 하다만, (그 이유는 밑에서 설명할 예정) 하여튼 여러분이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다. 아, 그리고 오한기의 새 단편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과 민경환/오은교의 각각의 테마리뷰 「공유된 출구에 대한 합법적 불신과 다른 입구들」/「여성들의 잡스러운 독서사, 불투명한 문서고와 환상의 그림자들」은 역시나 기대한 대로 훌륭했다. 꼭 두 세번씩 읽으시라.
"전화통화에서 『자음과모음』 이번 호의 주제를 듣자마자 내 머리는 반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전화기로 넘어오는, 요청받은 원고에 대한 설명을 잘 붙잡으려 애썼고, 다른 한쪽은 2016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왜 하필 2016년인가? 그 유명한 <아가씨>가 개봉한 해이기 때문이다. 좀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퀴어소설의 문제의식은 (……)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한 것’으로 인식하는 이 사회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오혜진의 물음은 이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 즉 성 정치적 정상성의 잣대에 의해 모순, 곧 ‘퀴어한 것’으로 호명된 일련의 경험과 제스처들을 어떻게 형식화해 의식적으로―작가 개인의 정체화나 커밍아웃에 대한 말이 아니다―배치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며, 만약 퀴어영화, 나아가 퀴어예술이란 게 존재한다면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때 배치는 큰 두 가지 층위의 씨름에 의해 제 뼈대를 갖추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앞서 ‘퀴어’를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개념“이라 부른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옹호는 과잉성애화가 퀴어 커뮤니티 내부를 지정 성별/외모/인종/지역의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드는 핵심 이데올로기라는 걸 그냥 지나치진 않는가? 퀴어 ‘진정성’의 표지로서의 섹스, 곧 ‘위반의 규칙화’(리타 펠스키).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자유가 어떤 격차를 기반으로 성립되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주의하고 비판해야 한다. 요컨대 양경언이 정체성을 (보편성이란 명목으로) 지나치게 경시한다면 서동진은 (성애화에 대한 낙관으로) 지나치게 물화하는 것이다. "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요~’라는 다양성에의 의지와 그에 따른 재현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해야지만 ‘변태적 전복 대 정상성으로의 편입’이라는 가짜 문제를 기각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퀴어’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구상할 수 있으리란 게다."
"<문라이트(Moonlight)>(2016)의 지루한 휘황찬란함은 남성성이 구성된 것이라면 ‘퀴어성’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지 못하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발로이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2019)의 짜증나는 순진함은 퀴어(의 관계)를 이상화한 80년대 말~90년대 초 서구-백인-동성애 미학 담론의 실패의 몰지각한 반복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진실과 거짓 사이>는 퀴어 개인이 ‘퀴어적’ 형식을 초과한 채 존재할 수 있음을 (...)"
~이 아래부터는 글을 읽은 분들을 위한 파편적인 후기~
글의 제목은 자넷 잭슨의 걸작 [Janet Jackson's Rhythm Nation 1814]의 마지막 트랙 Interlude: Livin'...In Complete Darkness를 조금 비튼 것이다. 처음 제목을 보고 한 친구는 고다르의 <시대의 어둠 속에서>에서 따온 거냐고 물었다. 그렇진 않지만 좀 뻔한 스타일의 제목이었나 생각하게됐다. 다른 한 친구는 찜방 얘기냐고 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런 제목이라면 찜방 얘기가 와야 어울리겠구나 싶더라.
"하지만 동일시가 복수적이며 사람들은 하나의 장면에서도 다양한 위치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는 순간, 그리고 어떤 동일시도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걸 고려하는 순간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에 실린 글인 주디스 버틀러의 「경쟁하는 보편성들」의 한 문장이다. 어쩌면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 글일 지도 모른다. 어떤 동일시도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그 역은 어떨까? 즉, 어떤 정체성도 특정한 동일시로 반드시 환원될 수는 없다면? 이성애 규범적 패싱같은 '장치'들의 차이가 경험과 효과의 차이를 창출한다는 ‘구성적’ 본질주의를 긍정하는 동시에, 젠더 수행을 비롯한 여러 삶의 양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포괄할 더 큰 범주가 있다는 ‘이산적’ 본질주의를 긍정해야한다는 난해한 문제가 '우리' 앞에 있다. 혹은 리타 펠스키의 말을 다시 빌려, "대중문화 작품을 진보적인가 아니면 반동적인가라는 명칭으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근시안적인 반응이다. 환상이 주는 쾌락은 이런 형태의 수단과 목적의 계산법과는 적합하지 않다."
"퀴어 '진정성'의 표지로서의 섹스"라는 문장을 쓰다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섹슈얼리티의 무가치화를 꿈꾼다는 점에서 섹스의 정치를 논하는 이들은 에이섹슈얼 정치와 '여튼 전략적'으로 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섹스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세상.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다. 적어도 지금 전개되고 있는 퀴어 운동은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저항과 곧바로 등치시킬 뿐 섹슈얼리티의 무가치화를 지향한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과하게 말해, 목적이랄 것은 말 뿐인 운동으로 보일 정도다. 광범위한 퀴어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당신도 당연히 간파했겠지만, 글을쓰는 내내 지속적으로 떠올렸고, 하지만 종국엔 굳이 직접 참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 가야트리 스피박과 신유물론-페미니즘의 흐름이다.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와 카트린 말라부 -그 자신은 이 프레이밍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지도 모르나, 말라부의 논리가 신유물론과 꽤 맞닿아 있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의 가소성 개념은 구조의 운동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당하는' 주체의 광범위한 특성을 오히려 저항의 영토로 삼길 제안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이들이 양경언처럼 소수자를 '바깥'을 향한 대문자 기표로 소환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본문에서 어느 정도 설명했으니 굳이 여기서 부연할 필요까진 없을 터이다. 또한 몸을 전적인 담론화의 대상으로만 구축하지 않고 젠더와 같은 층위의 네트워크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로 확실히 인식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신유물론-페미니즘은 담론화에 잘 들어맞지 않는 객체들을 긍정할 새 접근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니 '덜 퀴어한' 퀴어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퀴어'를 생성의 프로세스에 계속 밀어넣고 싶은 나로서는 스피박과 신유물론-페미니즘을 참고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신유물론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 소수자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사라 아메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했듯 페미니즘은 정동이론이 형성되기 한참 전부터 정동이랄 것을 문제시했으니...)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들을 직접 논해야만 내 글이 진행되지는 않는 만큼 그들을 빼도 상관없다는 결론이 이르렀다. 물론 논리의 레퍼런스를 짚고 넘어가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허나 그건 그 논리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성과가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내 경우엔 해당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또 관성과 유행 쫓기로 이해될 것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결과물은 그에 비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초기 구상에 비해 다소 안전한 결론으로, 또 진부한 일반론으로 향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 가장 적절한 피드백을 준 건 아무래도 M인 것 같아, 그와의 대화를 일부 발췌한다. (이하의 "[...]"는 내가 추가한 축약 표기이다)
M: "여기서 그럼 말씀하신 문제, 일반론으로 넘어가는 문제를 생각하면 아마 서동진의 논의를 기각하는 듯 하다가 부분적 수리를 결정하는 지점에서 이미 일반론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걸 어찌 막아볼 수 있을까 잘 생각해봤는데 여기까지 넘어가면 그 결론은 못 피해요. 저라면 틀을 짤 때 기존 문단에 조금이나마 친숙한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에서 출발해서 그로츠 같은 걸 슬쩍 건드리고 [...] 그 다음에 퀴어성의 문제에 있어서 섹슈얼리티/본질주의 문제를 건드릴 것 같아요. 과감함은 많이 줄겠지만 이러면 문제가 조금 오픈된다고 느끼는 건 (최소한 제게) 지금 '퀴어한 것'을 묻는 문학장의 입장에서 님의 결론은 '퀴어한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지 싶군요. 양자의 씨름이라고 했지만 님의 입장은 퀴어적 특수성을 부정하는 입장처럼 '들려요'. 저는 그걸 주의했을 거 같네요.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생각에 실패는 글에 있다기보단 지금 문학장에서 수용될 수 있는 조건을 넘어선 글이기 때문인 것 같고,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안전한 결론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입니다. [...] 결론부에서 급격하게 퀴어니스를 '바깥'으로 규정하는 느낌('퀴어'라는 제도에도, 제도로서의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을 받고,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많다고 느껴요. 제가 그렇게 읽었다기보단 그렇게 읽힐 여지가 많다고요. 재밌게 읽었지만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네요."
또 다른 친구 G 역시 흥미로운 피드백을 주었다. 그는 M과는 다른 지점을 짚어주었다. 그의 말도 일부 발췌한다. (사적으로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라 편하게, 그러니까 맞춤법이나 논리정연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썼다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G: "사실 니 글은 [망명과 자긍심]같은 책이 번역된 직후에 나와서 하려는 이야기의 과감함이 좀 죽은 건 사실임. 그래도 한국의 담론장에선 여전히 좀 과감하게 읽힐거라고 보는데, 그건 글의 구조적 차원에서 더 그래.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이 글의 구조가 문예지에 실리는 비평들의 형식을 패러디한 걸로 보이거든? 논문의 열화 버전들 있잖음 ㅋㅋ 그니까 그런 형식을 모범생처럼 따라가는 걸로 보이긴 한데,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 거기서 어긋나고 조롱하려고 안달난 것 같단 거. 퀴어 영화 얘기를 한다고 하면서 <아가씨>로 시작하면 대부분 뒤에서 할 얘기가 예상되잖아 시선과 응시니 주체성이니 하는 거 말임 벌써 존나 곰팡내나는ㅋㅋㅋㅋㅋㅋ 근데 너는 그런 얘기들이 쓸모없다고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거지 예를 들어서. 이걸 글 전체에서 실천하고. 너한테 부과된 알리바이를 영악하게 잘 활용한단 느낌이 들고, 그래서 과감하게 읽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