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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y 20. 2020

 《한편》기고와 그 후기


민음사의 인문잡지《한편》 2호에 「네임드 유저의 수기」라는 제목의 짧(고 그닥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 에세이로 참여했다. 이 글을 구상 중이던 때에 마침 적확한 타이밍으로 청탁 메일이 왔고, 덕분에 나의 사적 회고를 공적 지면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잡지에 참여한 다른 분들이 '인플루언서'란 키워드에 다소 분석적으로 접근한다면 나는 인상적으로 접근한 편에 가깝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윤해영씨의 글과 함께) 좀 튀게 읽힐 것이다. 실제로 내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으며, 그래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 이유진씨의 글과 함께 잡지의 맨 앞에 실은 것이리라 짐작한다. 이 점 양해해서 읽어주시길 바란다. 또, 부족하고 갈팡질팡대는 초짜에 열심히 조언해주신 편집자 신새벽씨에게 감사드린다. 




"신춘문예에 당선돼서 막 평론가로 데뷔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우습고 어이가 없을 게다. 그래도 말을 꺼내보자면-상을 주고받는 것 만으로 이른바 문화(그것이 문학이든 미술이든 영화든)를 존속시킨다는 건 이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제도'의 공모전이라는 문턱을 넘은 이들에게 상과 '작가'라는 이름표를 나눠주고 여기저기에 소개해 작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원조하면서 시장을 활성화하는, 이른바 문화가 돌아가고 존속하는 기존의 방식이란 크게 보면 거의 한계를 맞이했다는 게다. 그게 '새로운 미적 흐름'을 만든다는 딱딱한 착각이 부식되었다고 말해도 되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이리 단언할 수 있는 것도, 내가 2017년까지 왓챠에서 El Topo라는 닉네임으로 소위 '네임드 유저'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왓챠는 ('영화 자체'에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한) 주류 영화 평단과 남성 위주의 영화 커뮤니티에 불만을 갖고 있거나, 긴 글 쓰기를 주저하거나, 인정 욕구가 강한 나 같은 이들의 도피처로는 최적의 플랫폼이었고, 나는 그러한 특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웬만큼 궤도에 오른 인플루언서들은 대안적 권력으로, 보다 명확히 말해 권력을 대신할 권력으로 나서게 되며, 이때 '제도'는 축적된 것들 덕분에 인플루언서들의 인기를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최종 심급의 역할을 떠맡는다. 역설적이게도 기성 미디어는 자신의 근간을 위협하는 그 원인 덕분에 (상상적으로라도) 권위를 일부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자들이나 지망생들만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제도'를 위한 새 톱니바퀴가 되어 '제도'를 부당하게 재특권화한다."






~이 아래부터는 글을 읽은 분들을 위한 파편적인 후기~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어떡해야 이 글이 남성 지식인 특유의 알리바이로 읽히지 않을까?'였다.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 상황에 연결시키며 은연중에 자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승화하고, 자신의 실패담을 과잉 전시(하지만 정작 핵심은 외면)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과거에서 말끔히 분리해내려는, 약삭빠르고 뻔뻔한 자의식으로 글이 귀결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썼고, 그래서 계속 '나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잘 모르겠다. 자기 객관화를 시도한 글에 대한 자기 객관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글 전반에 흐르는 '다르지 않다'는 논지가 자신에게도 잘 적용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제목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다. 나는 '네임드 유저'라는 키워드가 전면에 나서면 글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한 반면 편집자분들은 이 키워드를 밀고 나가야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가 확실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는 당신도 알고있다) 어차피 이젠 그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영역이니, 지금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 이 글은 (글의 말미에서도 강조하듯) 나의 경험 속에서 메타적으로 완성된다. 지금까지 나는 원고 청탁을 비롯, 나의 (직업이라기 보다는) 직함에 관련된 일거리를 7개 제안받았는데, 그 중 이 글을 포함해 5개를 진행했고 또 하고 있다. 영화 비평이란 풀 안에서 보면, 올해 초에 '공식' 딱지를 단 비평가치고는 꽤 많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내가 트위터와 브런치를 열심히 쓰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 몇 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있는가? 나의 데뷔는 0에서의 출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고급 영어 능력의 소유자가 '어찌 되었든'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지적인 권력과 자본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온라인 상의 활동은 의도하진 않아도 일종의 문화 자본을 만든다. 그렇다면 '신인'이라는 말도 더 이상 예전처럼 통용되기는 힘들다. 문장 창작광장에 꽤 오랜 기간 글을 써서 지망생 커뮤니티 안에선 어느 정도 유명세를 가진 사람도, 그런 경험없이 혼자서 글을 쓰던 사람도, 등단하면 여튼 같은 '신인'이다. 하지만 정말 같을 수 있나? '신인'이라는 말이 제대로 된 의미를 갖기에는, (인터넷을 이용한) 지망생 커뮤니티나 장르 문학의 접근성과 활동성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것은 지식의 제도의 표준적 절차, 즉 제도 안과 밖의 기준을 갉아먹고 모순*을 증폭시킨다. 물론 이 문제의 벡터는 이 방향으로만 운동하지는 않는다. 이젠 "그런 경험없이 혼자서 글을 쓰던 사람도" 지망생 커뮤니티에선 데뷔와 동시에 원로 취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반복과 전도. '기성'과 '대안'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 꼬리잡기를 지속한다. 여기서 누가 더 책임이 있느냐고 따지는 건 별로 쓸모가 없다. 각자 뻘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술의 쓸모'를 이제 그만 입에 올릴 때가 됐다.

 

*한국식 등단 제도의 모순에 대해서라면 다음의 글들이 '재밌게' 읽힌다. 배명훈, 계기가 작가를 만든다 "http://ch.yes24.com/Article/View/40705윤재성, 박다래, 박서련, 서호준, 백년 동안의 슈스케  "https://www.d5nz5n.com/work/46/episode/129송한별, 등단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닌가"https://missingarchive.postype.com/post/5297530"


'기존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하나로 뭉뚱그려지긴 하지만 미적 전략과 영향 관계에 있어 겹쳐지지 않는 영토들'과 '미적 전략과 영향 관계에 있어 겹쳐지지 않지만 기존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영토들'은 동등한 문제다. 이걸 놓치면 어리석은 공회전만 영원히 하게 될 것이다. 지금만큼 이런 역설을 사유하기에 적절한 때는 없다. 


#비평가의임무 라는 해시태그가 있는데 왜 임무에 대한 얘기는 한 문장에서만 짚고 바로 넘어가는가. 애초에 이 글의 목적은 변화의 정체를 설명하려 애쓰는 것이지, 저것에 대한 좋은 유형을 제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생각을 조금만 밝힐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곧 발표될 어떤 글의 한 대목을 미리 가져오자면, 

"일정한 분량의 텍스트에 대한 (무제한적인) ‘사용’과 (한정적인) ‘해석’은 서로 다를뿐더러,―인기 소년만화 <하이큐!!>(2012~)를 예로 들자면, 극 안에서는 그저 한 번 인사했을 뿐인 쿠로오 테츠오와 사와무라 다이치를 갖고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며 BL 동인지를 만드는 것이 ‘사용’이라면 캐릭터들 간의 관계 속에서 호모에로틱한 기류가 억압된 상태로 떠도는 것을 지적하는 건 ‘해석’이다. 그런데 비평이란 것은 종종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려 들곤 한다―" 

즉 비평은 작품을 난도질하고 그 너덜너덜한 파편으로 핵심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비평가가 위기 앞에서 첨병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이 작업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점에서 비평가는 굳건히 신용할 수는 없는 족속들이요, 겉핥기에 능한 사이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상찬에 가까운 말이다. 


혹여나 잘못 읽히지 않을까 해 덧붙이는 말. 나는 이전의 비평가들을 마냥 부정하거나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증오하고 있지. 특히 내가 그런 논리에 적극적으로 포섭되어 헛짓거리를 일삼은 당사자이다보니 그 증오는 더더욱 크다(그리고 아직도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아야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가령 《키노》의 흥망성쇠, 특히 지저분하기 짝이 없던 결말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과연 없을까? 임근준같은 비열한 자에게서 배울 게 전혀 없을까? 그렇진 않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자기 표현이란 명목으로 공짜 데이터를 생산 및 유통하고 있다. 그런 주제에 열심히 자기PR을 해 하나의 브랜드를 형성했던 이전 세대를 비난하는 건, 결국 지 얼굴에 침 뱉는 꼴인 게다. (이들의 표현이 브랜드를 넘어서 자기PR로 귀결됐다는 건 다른 문제지만) '좋은 것만 본다'는 말은 괴상하게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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