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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Feb 10. 2020

추모 커크 더글라스

커크 더글라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난 건 가장 최근에 본 그의 출연작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악한과 미녀The Bad and the Beautiful>(1952)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데요, 만약 당신께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고 스포일러 없이 영화를 만나고 싶다면 뒤로 가기를 누르시라고 잠깐 텀을 두겠습니다. 하여튼 여기서 커크 더글라스가 분한 주인공 조너선 쉴즈에게 끔찍하게 배신당한 경험을 가진 세 영화인들은, (잠정 은퇴 상태였던) 그가 구상중인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 입장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한 명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시나리오를 빼앗겼고, 한 명은 그를 사랑했으나 버림받았고, 한 명은 그 때문에 부인이 죽었으니, '현재 여러분의 성공에는 쉴즈의 몫이 크다'는 프로듀서설득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겠죠. 그들 모두가 쉴즈에 대한 각자의 회상을 마쳤을 때 때마침 쉴즈에게서 전화가 오고, 이들은 자리를 파합니다. 네, 상식적인 반응이지요.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프로듀서의 사무실을 나서는 도중에 멈칫하더니, 이들은 바깥에 있는 비서용 전화기를 들어 쉴즈의 전화를 듣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그의 새 프로젝트에 대한 말이 오가고 있을 테죠. (스피커폰 기능이 없는 시절이니)  3명은 다다닥 붙은 우스꽝스런 자세로 전화를 엿듣고, 그 동안 그들의 얼굴 잠깐 동안 감정이 스쳐지나갑니다. 호기심, 경악, 애상... 아무래도 이들은 곧 쉴즈와 함께 할 것 같죠.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절묘하게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엔딩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들은 대체 무슨 연유로 끔찍이도 싫어하 쉴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극에 있어 설득력을 갖는 것인가? 사장의 설득에 넘어간 것인가? 하지만 그랬다면 바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겠지요. 여전히 싫긴 해도 그의 능력은 인정하는 걸까? 렇다면 다른 건 설명 가능할 지라도 애상의 분위기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이상한 엔딩은 도덕적 의의 굴레로 우리를 밀어넣지요. 이 비약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를 확신할 수 있는 건 영화 디제시스 상에서 저 3명이 처음 함께 만난 장면 때문입니다. 거기서 (쉴즈와 결별하고 배우로서 성공한) 조지아 로리슨은 (한창 시나리오 작가로서 쉴즈와 협업하고 있는) 제임스 리 바틀로와의 만남에서 쉴즈 사랑을 이야기하죠. 바틀로는 로리슨아직 쉴즈를 사랑하는 것 같다 말하고, 로리슨은 그건 첫사랑이란 열병의 잔해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그건 단지 자신을 위한 선언이었을 뿐, 그의 사랑은 여전히, 그저 다른 방식으로 지속된 것으로 보이죠. 론 우리 모두 보았듯 리슨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은 하여튼 여전히 (영화 제작자로서의?) 그를 사랑합니다. 왜? 라는 상식적인 반문은 여기서 별로 유효하지 않요. 왜냐면 사랑에 구체적인 이유는 없고, 오직 그 (불명확한) 상태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을 때 그의 추한 면마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떠올려보십시오. 사랑은 우리를 대상에 미치게 만들고, 대상을 떠난 이후라 해도 그 이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도록 이끕니다. 그 모순적 상태를 긍정하려하는 이 순간, <악한과 미녀>는 사랑에 대한 도덕극으로 도약하지요. 도덕의 인과율을 종종 벗어나는 예외적 사건으로서의 사랑.


말이 많이 길었습니다만, 제 결론은 단순합니다. 커크 더글라스는 그런 사랑의 대상이 될 만큼 변덕스럽고 사악하고 능력있고 잔인하고 신경질적이고 헌신적인, 다분히 모순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데 있어 당대 그 누구보다도 큰 재능을 발휘했던 배우이고, 그렇기에 그를 추모하는 데 이 영화의 엔딩만큼 적절한 장면도 없으리라는 거죠. 하여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미스테리한 대상인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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