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Feb 01. 2020

<스타워즈: 스카이워커의 재림>

<스카이워커의 재림은 JJ Abrams의 가장 실망스러운 영화다>


이 비디오 에세이는 <스타워즈: 스카이워커의 재림Star Wars: The Rise of Skywalker>(이하 <스카이워커의 재림>) 이 '좋은 영화'가 되는 데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꼼꼼히 따진다. 요약하자면, 영화 작가로서 J. J. 에이브럼스 특성인 스피디한 페이스가 스타워즈라는 신화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가속화된 나머지 온갖 요소들이 서로 따로 놀게끔 했으며, 뒤에 가서도 그것들을 수습하는 데 실패해 -가령 핀이 레이에게 하지 못한 말은 결국 인물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렌이 벤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한 편의 영화보다는 (좀 많이 긴) 유튜브용 클립 컴필레이션에 가까운 결과물이 탄생했다는 게 이 에세이의 견해이다. 이를 반박하는 것은 좀 무리한 일인데, 틀린 설명도 아닐 뿐더러, 나 역시 <스카이워커의 재림>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좋은 영화'가 절못 된다 보기 때문이다. 세간의 평가를 따르자면 "영화답지 않은 영화". 아마 이 영화가 고전의 반열에 오르거나 후일 대중적 재평가의 대상이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옹호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스카이워커의 재림>은 구성의 측면에 어느 정도 (마찬가지로 지난 해 나온)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괴작 드라마 <일찍 죽기엔 너무 늙었다Too Old to Die Young>를 연상시다. 유튜브용 비디오 클립으로 편집됐다면 명장면이라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을 독립적인 흐름의 장면들이 드라마틱한 고저나 통일성 없이 어거지로, 마구잡이로 붙어있 바로 그 때문에 부정적인 감상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깊이도 끈기도 없는 이 흉측한 플롯들은 감정과 이야기가 자라날 기미를 사정없이 뜯어먹어 신화적 블록버스터와 드라마 미니 시리즈라는 각자의 장치를 심히 오염시키는데, 특히 <스카이워커의 재림>의 경우 다른 영화도 아니고 말 그대로 신화가 된 스타워즈의 최종장을 담당했기에, 전작들과의 논리적 연속성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더 크고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여기서의 오염이란 실은 장치들 자체의 문제가 아닌가? 작품의 실패가 그냥 실패로 지칭되는 대신 유튜브용 클립 컴필레이션에 가까워보인다는 평으로 귀결되는 것은 곱씹을만 하다. 영화와 유튜브용 클립 컴필레이션의 차이?


한 쪽에서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통해 비디오 클립이나 짤방-GIF로 짧게 조각난 영화들이 수 없이 많이 유통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아이맥스4DX 상영관을 지닌 멀티 플렉스 극장 존재 자체로 웅장한 영화들이 유통된다. 우리네 영화 관람 환경은 일견 그렇게 양극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금에 콘텐츠라는 개념이 모든 문화 활동을 포괄하는 블랙홀이 됐듯, 후자 VOD 플랫폼과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을 거쳐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간에 전자에 편입되기 마련임을 과해선 안 된다. 이미 제작과 동시에 해체될 운명에 처하는, 거대한 소스로서의 화들. 제아무리 스타워즈 시리즈라 한들 이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이 환경 속에 <스카이워커의 재림>을 배치해보자. "유튜브용 클립 컴필레이션에 가까운", "흉측한 플롯"의 "영화답지 않은 영화". 어쩌면 <스카이워커의 재림>은 이 운명에 대한 나름의 과격한 대면 방식이 아닐까?


당연하지만 나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 스타일리쉬한 명장면으로만 영화를 꽉꽉 채우는 식의 '열린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화가 된 블록버스터에 운명을 기입해 육화하는 사보타주다. 어떻게? 극장용 영화와 유튜브용 영상 사이의 차이를 불화로 번역해서. 포스트 시네마 담론의 나쁜 파생물들은 종종 '디지털 이후 모든 영상물은 영화다'라는 괴이한 평등론을 펼치곤 하지만 -가령 <트윈 픽스: 귀환>이 어떻게 영화냐는 반문에 "당연히 영화지 바보야"라고 답하며 논쟁 자체를 기피하는 태도들- 그것은 영상이 재생되는 장치(이는 공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화냐 드라마냐 영상 설치 미술이냐 같은 '장르'의 문제이다)가 그 자체로 어떻게 '습관화된 기대'를 담보하며 그럼으로서 같은 행위라도 다른 정보값으로 치환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어리석게 무시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화는 극장 밖에도 있다'와 '영화는 극장에 있다' 모두를 진리로 받아들여 중첩시킬 필요가 있다) 에이브럼스는 저런 태도에 유혹되지 않고 신중하게, 소위 '영화'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당신네들이) 이 신화가 지금 이 환경 속에서도 견고하게 지속되어야 한(다고 우긴)다면 순순히 응하는 대신 운명 바로 앞까지 데려다 놓겠다는, 아니 아예 그 안으로 밀어넣어진 상태를 보여주겠다는 극단적인 오기의 결과인 게다. 거기서 '영화'는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게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요컨대 오염을 통해 더 큰 오염을 가시화하기. 


이 얘길 하면서 내가 떠올리는 건 레이와 렌이 텔레파시로 조우하는 장면들이다. 물론 <스타워즈: 마지막 제다이Star Wars: The Last Jedi> 역시 (숏-리버스 숏을 이용해) 이 설정을 독특하게 구현하긴 했지만, 라이언 존슨은 텔레파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기껏해야 공간적 착시 정도로 다뤘다는 점에서 과감함이 한참 부족하다. 그에 반해 에이브럼스는 이를 한 장소, 한 프레임 안에 레이와 벤을 욱여넣(면서도 정작 당사자들은 그 장소의 구체성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는 우연적이고도 임시적인 미지의 시공 X를 창출하는 힘으로 다룬다. X에서 그들은 잠깐이나마 서로가 속한 장소에 직접 영향을 행사하거나 무언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설정은 "흉측한 플롯" 속에서 특별한 빛을 발하는데, 각 장면의 지나친 독립성이 신화적 블록버스터의 공식(남녀의 멜로, 팬서비스, 적의 새로운 무기, 웅장한 전투 등...)을 기계적으로 스테레오 타입화한 형태라면 X는 서로가 속한 장소-즉 프레임, 숏, 나아가 장면까지도 관통해 오염시키면서 그 독립성의 기반을 새로 재편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이 측면에서 <스카이워커의 재림>은 <너의 이름은.>와 유사하게 보인다. 반 페미니즘적이라 오도되었단 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를 메타적 관점으로 밀고 나가면 우리는 '서사시의 성격을 지닌 2~3시간짜리 장편 영화'란 평가의 잣대가 영화의 현대화에 따른 한시적, 역사적 조건 중 하나일 뿐이란 주장에 닿을 터이며, 곧 영화의 형태란 X같은 것이라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스카이워커의 재림>이 소위 '영화'답지 않다는 평은 오히려 작품에 대한 적확한 찬사로 바뀐다. 물론 이 사보타주가 행복하게 벌어졌을리는 없다. 그건 그 작품에 연관된 모두를 위기로 몰아넣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노동집약적이며 거대 시장 스타워즈 수준의 블록버스터라면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리라. 아마 J. J. 에이브럼스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찍었을 게다. 아니면 디즈니 임원들을 쳐죽이는 심정으로 찍었거나. (물론 나는 <스카이워커의 재림>의 제작 과정에 대한 수 많은 루머와 가십을 알고 있으나, 그것을 굳이 여기서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스카이워커의 재림>을 억지로라도 옹호해야 하지 않을까.




+

사실 깊이와 끈기가 없다는 건 에이브럼스에게 하루이틀 가해진 비난이 아니다. 애초에 에이브럼스의 이야기는 세세한 서사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말한 "스피디한 페이스"의 문제인데, 여유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씬과 씬 사이를 타이트하게 접어가며 캐릭터와 이야기에 깊이(의 착각을 일으키는 묘사)를 생략해 플롯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가령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에 대한 기존 팬들의 주요 비판점 중 하나는, 주인공 제임스 커크가 정확히 어떤 성격의 캐릭터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나 '떡밥'처럼 깊이의 감각을 형성하는 요소들이 중요하게 제시되긴 하나, 이들은 큰 이야기를 추동시키키 위한 맥거핀일 뿐이다. 즉 깊이 없는 깊이. 이 때 깊이 대신 나서는 건 사건이다. 사건이 어떻게 다른 사건으로 변형되는가. 사건 안에 다른 사건이 어떻게 침투하는가. 사건과 사건은 어떻게 충돌하는가. 그러면서 어떤 속도와 마찰을 창출할 것인가. 사건의 강도 변화 양상, 그것이 바로 에이브럼스의 영화인 게다. (어쩌면 그 특유의 렌즈 플레어는 이 변화가 남긴 흔적이 아닐까?) <스카이워커의 재림>의 X는 이 변화가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나타난 사례라 할 만 하다. 

작가의 이전글 「(이전)같지 않으리 - 데이빗 린치론」에 붙이는 첨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