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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an 14. 2020

「(이전)같지 않으리 - 데이빗 린치론」에 붙이는 첨언


그렇다. 뭐...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바이섹슈얼인 나는 한국 첫 오픈리 퀴어 영화평론가가 되었다. 슬프게도. 이후에 더 많은 동지가 생긴다면 좋겠다.


아니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글의 완성도라는 개념을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면서도, 온전한 해체주의자가 될 수 없는 나는 그것을 하나의 글 안에서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따로 첨언을 붙이는 것도 괜찮은 행동일 게다. 저 글에서 (충분히) 하지 못한 말들을 얼마간 되짚는 첨언. 이건 하나의 글이 기념비가 될 가능성을 다른 글로 방해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방해가 유머러스해지길 바란다. 예전의 내가 한 말을 베끼자면, "결국 유머란 견고하게 세워진 픽션과 픽션들 사이를 관통해 구멍을 뚫는 화살이다. (...) 유머가 유머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 한 유머란 성공적인 유머일 수는 없다." 뭐, 부끄러우면 어쩔거야. 중요한 건 어떻게 구멍을 잘 뚫을 것이느냐다.

 

심사평을 보면 "지적 여정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이란 대목이 있는데, 아마도 이는 두 가지 단점에 대한 감상일 것이다. 하나는 이 글의 리듬이다. 초반 3개 문단은 서두르는 듯한 인용과 예시로 스피디하게 또 명료하게 전개했는데, 그 이후에는 이런저런 설명과 반박에 집중하면서 좀 느려진다. 아마 여기서 글이 늘어진다 느낀 이도 적지 않을 텐데, 이에 대해선 나의 큰 목적이 린치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고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필 4번째 문단에서부터 자동차에 대한 설명을 한 켠에 잠시 밀어놓은 것을 이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동차 얘기만 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의 비약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냥 이렇게 넘어가기는 어렵다. 내게는 버릇이 있는데... 좋게 말하면 구체적으로, 나쁘게 말하면 장황하게 항상 설명하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때엔, 심각하면 말문이 막힐 때도 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왜 <이창>은 좋은 영화인가요? 나쁜 영화라는 게 아니라, 이 영화의 어디가 훌륭하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가서요."라고 내 면전에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에게 맞추어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을 하려다 결국엔 어버버 거리며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훈련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복되는 표현이다. 이건 정당화하기 힘들다. 나열법의 표현이 너무 많이 쓰였다. 지금 보면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 표현들인데 말이다. 10번째 문단과 11번째 문단이 특히 그렇다. 이 표현들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늘어지는 느낌을 오히려 배가시키고 있다. 서두르지말고 글을 쓰자. 앞으로 좀 주의하자.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 "의심의 여지 없이 자명하고 단단한 삶의 규칙이자 중심으로서의 현실(성)은 없다"고 쓰면서, 나는 지금의 방향이 아니라 린치의 지도 작법에 집중한 글을 잠깐 상상했었다. 지도? 그렇다. 장소로서의 세상을 느끼는 방식을 통계화한 평면. 이 때 은유로서의 지도 작법은 그 느낌을 개방해 장소들 사이의 거리와 연계를 상상적으로 재구축하는 행위를 이른다. 린치의 영화가 꿈같다는 말들은 그의 지도 작법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이레이저헤드>의 행성들, <블루 벨벳>의 과도하게 평온한 럼버튼, <광란의 사랑>의 뒤틀린 지리 감각 등을 떠올려보라. 당대성과 현실성이 제거된 '미국의 어느 도시'들. 여기서 나는 문득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린다. 만약 오즈 야스지로가 무시간성과 비인간성을 규칙으로 삼은 허구의 독아론적 세계 안에 실재를 흘려보내 그로 인한 균열의 과정을 포착하는 작가라 한다면, 데이빗 린치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두 감독은 허구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서 상반된 생각을 갖고있지만 말이다. 그것이 오즈에게는 인간에 무심해 인간들의 양상을 '하여튼, 어떻게든 변화하기는 하는 비스듬한 영역' 정도로 취급하는 절대적 자연이라면, 린치에게는 실재와 판타지가 한 데 우글거린 채 각축을 벌인 과정-결과이다. 그 속에서 현실(성)의 빈약한 기반과 구성이 드러나는데, 린치는 바로 이 감각으로 미국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이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그로 인해 여러 트라우마를 떠안게 된 (가령 베트남 전쟁) 역설적 역사의 국가가 아니라, 초국제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해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영토만 가진 국가이다("Make America Great Again!"). 그런데 그것은 미국식 통제력이 애초부터 자초한, 그 안에 내재되어있던 결과이다. 미국식 통제력은 외려 통제 불가능한 영역을 늘리고 그 곳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상세히 말하는 것으로...) 통제력이라는 건 불안정한 바탕 위에 세워진 가건물에 불과하다. 이 때 통제력이란 앞서 말한 "현실(성)"의 동의어다. 몰락하는 미국의 지도는 '보편 문명' 바깥의 영역까지 중첩된 혼란스런 자연의 지도이기도 한 게다. 즉 "현실(성)은 없다"란 말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의 신체를 고기 뭉텅이처럼 뭉개서 그렸던 것과 같이, 혹은 사무엘 베케트가 자아를 끊임없이 미분하는 ‘소란스러운’ 글쓰기를 하던 것과 같이, 하나의 이미지에 내재하는 변화에의 잠재력이란 문제로 우리를 이끄려는 집요한 제스처인 것이다.


이 문장은 내가 들뢰즈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일부러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나의 욕심을 최대한 절제한 결과이기도 하다. 욕심대로 했다면 린치를 영화 밖의 예술가들과 엮는데 한 문단을 썼을 것이다. 영화를 영화 안에서만 논하는 건 가면 갈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홀로 설 수 없는 예술인 영화에서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린치 수준의 멀티 플레이어라면 더더욱. 아니, 실제로 그의 영화는 최근의 미술 작업들과도 높은 친족성을 보이지 않나? 가령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논한 문장들은 신유물론이나 사변적 실재론이 유행하면서 함께 등장한 영상 설치 작업들(가령 지역 검사 투표의 과정을 나열하면서 거기에 따개비나 스컹크를 행정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류)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게다. 당연하지만 린치가 훨씬 더 예민하고 구체적이다.


그리고 쓸모없는 얘기인데, 개인적으로 린치와 유사한 다른 예술가를 논한다면 만화가 케빈 하이젱가(Kevin Huizenga)를 거론하고 싶다. 기호나 시간같은 극적 장치들이 '올바른' 서사에서 이미 자율화되어 예술 형식이라는 평면 위에 우글거리는 광경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시간"과 "서사"이다.


"이는 우리가 거창하게 세계라 부르던 것이 실은 기껏해야 자아를 안정화하기 위해 마련된 (지젝이 말한) 구조화된 판타지 중 하나일 수 있음을 암시하며 그러한 세계(들)를 다양한 방식으로 품는 광활한 평면, 퀭텡 메이야수의 말을 빌리자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의 존재와 그 나름의 ‘질서’를 (희미하게라도) 인식시킨다."


지젝과 메이야수를 함께 거론하는 이 대목에서 대충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변적 실재론이 다소 폭주하고 있으며(이런 의견에 대해선 서동진의 해제를 참고하라), 이 담론을 적당히 진정시키는 건 90년대에 지적인 '청춘'을 보낸 정치철학자들의 연구라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니까 총체성과 주체의 존재를 기각하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 개념들 속에서 이런저런 과감한 잠재성을 구상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리라는 게다. 애초에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질서를 우리가 정녕 지각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데이빗 린치는 둘 사이를 적절히 조율할 단서를 제공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스탠리 카벨과 조너선 크래리까지 인용했어야 했다. 이 두 사람은 "영화는 회의론의 움직이는 영상"(카벨)이라는 생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멀티 플레이어"인 린치가 왜 하필 자신의 메인 스테이지로 영상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를 준다. 14000자라는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통채로 들어냈지만, 만약 쓰여졌다면 그 문단은 11번째 문단 다음에 와서 글의 절정부를 담당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지의 연속성과 말의 관계에 천착하는 카벨의 회의주의적 영화론은 종종 린치를 위해 쓰여졌단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한 편 조너선 크래리를 언급한 것은 그의 「시각의 현대화Modernizing Vision」라는 논문 때문인데, 여기서 그는 인간의 신체를 둘러싼 시각 모델의 헤게모니가 변화하는 양상을 그린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시각 문화 전통에서 '자연스러운 시각', 즉 객관적이고 투명한 세계를 보장한다고 여겨진 카메라 옵스큐라의 시각 모델은 19세기에 이르러 (잔상이나 환영같은 근본적 한계로 인해 객관적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극복 대상으로 여겨진) 인간의 신체가 시각 모델의 새로운 중심으로 서면서 단절과 변환을 겪게 되었는데, 그러한 과도기에 태어난 영화는 이 새로운 시각 모델의 한계를 중핵으로 삼은 대표적 탈중심적 시각 매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논하는 탈중심성은 린치의 불확정성과 거의 안정적으로 포개진다. 요컨대, 린치의 파격적인 스타일은 영화가 태동할 때부터 중핵으로 삼고 있는 문제와 그 잠재력에 대한 원론적 고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이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이 글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본성에까지 이"른다는 심사평에 좀 더 어울리는 글이 됐을 게다. 


<스트레이트 스토리>에 대해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도 적잖이 아쉽다. 물론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에선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언급하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의 중요성을 남들처럼 간과하는 것 같아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을 자꾸 받는다. 다수의 리뷰들은 "다분히 린치적인 구석은 드물게 그러나 분명히 발견된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고 또 부족한 표현이다. 나는 이전에 레너드 코헨에 대한 글에서 "I'm Your Man의 예외성은 외려 그 예외성에 의해 코헨의 멜랑콜리를 엄격히 내재한 산물로서 귀중함을 풍부하게 두르는 것이다."라 쓴 바 있는데, <스트레이트 스토리>에도 이 수사를 적용시킬 수 있다. 과도하게 말한다면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블루 벨벳>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를 합쳐서 존나게 늘린 영화일 것이다. 느슨한 평온함 속에 끼어드는 불안한 감각과 그것을 다시 마름질하는 감성적 터치들은 린치의 필모그래피 안에 배치할 때 오히려 지극히 언캐니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을 그냥 기각해선 안 된다.


<트윈 픽스: 귀환>에 대해선 아직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다시 과거의 나를 베끼자면, "예컨대 수전증에 걸린 듯한 '핸드핼드'들이나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 "사악한 힘이 진동하는 에피소드 1과 8에선 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에 입회하고 있다는 충격을 주는 한 편 모든 것을 쌓아올렸다가 전부 무너뜨리고 부숴버리는 피날레에선 영화가 붕괴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는 충격을 주는 이 대작은, 이전 시리즈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각주로 만들어버리며 더 나아가 감히 영화사 전체와 대결하려 합니다." 



이건 그냥 넋두리. 원래는 문학 평론으로 응모하려고 했다. 예전같은 영화 글을 쓰는게 좀 지루해지기도 했고, 내가 과연 제대로 된 문학 평론을 쓸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정지돈 박솔뫼 오한기 정세랑 김초엽 등등 서로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 소설가들이 어떻게 현재의 문학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기위해 어떻게 제도권 문학이라는 바운더리에 스스로를 의탁하는 역설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 쓰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문득 미완으로 남겨둔 데이빗 린치 작가론을 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건 전적으로 최근에 읽고 있던 『서구 종말론』과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에 의한 것이다. 하여튼 원래 쓰던 글에서 선회해 이 쪽에 전념하기로 했고,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만약 당선이 안 됐다면 '왜 그거에 전념하거나 같이 써보지 않았을까'라고 자책하다 죽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반 정도 쓰다 남겨놔서 좀 아쉬운데, 언젠가 가능하면 다시 그 글에 전념하고 싶다. (찔러주시란 말입니다 여러분)



Ask.fm에서의 문답 하나로 본문을 마치고 싶다.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해도 괜찮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어 다행이다.


먹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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