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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26. 2019

오카자키 쿄코, 소란스런 90년대

고맙게도, 단행본 브랜드 고트 덕분에 아름다운 오카자키 쿄코의 아름다운 만화들을 연달아 공식적으로 한국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남한 땅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끼리 고독하게 오카자키 오카자키 중얼거릴 필요가 거의 없어졌다는 게다. 작년엔 (다소 불만족스러운 형식이었지만) <리버스 엣지>(1994)를, 올해는 (아직 이번에 나온 판본을 보진 못했으나) <핑크>(1989). 그리고 <헬터 스켈터>(1996)를 (현재 시점에서) 아직 작업 중이라고 한다. 고트에 거듭 감사를...


지금 현재에 보면,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들은 현재가 마치 장기 1990년대인 것 같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소비 문화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90년대는 흔히 개인의 개성 표출을 통한 문화적 저항이 힘을 얻은 시대로 생각되나, 실은 개성이 여기저기서 폭주에 가깝게 난무하고 얽히면서 그 속에 있던 불화들, 문제들이 제도로서의 문화로 '안전하게' 소급되기 시작한 시대에 가깝다. 달리 말해 문화라는 틀은 마침내 내부에 있는 외부로서 자유로운 억압의 장으로, 이념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은 취미판단의 대상으로 격하됐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실패했다'는 정치적 허무감은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성이 도처에 난무하기'만' 하는 폐쇄된 영역 속을 살아간다는 허무감. 90년대란 다른 것보다 그러한 역사적 절단의 기점이었다 보는 게 보다 정확할 테다. 이 허무감을 미적 양식으로 승화한 대표적인 예술가는 물론 (카라타니 코진이 말했듯) 무라카미 하루키로, 그는 이미 80년대부터 허무감을 번지르르한 '시적 패잔병'의 감상으로 가공해 유행시키는 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카자키 쿄코는 하루키와 달랐다. 그는 이 허무감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개인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의 캐릭터들은 개성이 난무하는 세계의 알레고리를 상연한다. 친구다운 친구, 가족다운 가족, 사회다운 사회라는 '상식적인' 집단적 바탕 없이 거의 단독자로 존재하는데다, 개성들에서 흘러나오는 자극에 휩쓸려 '상식적인' 삶의 감각이 무뎌진 그들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좀비처럼 보인다. 아니, 분명히 좀비이다. 생명체다운 생기는 보이지 않고 신선한 살덩이같은 새 자극을 찾아 고독하게 방황하는 모양새가 좀비의 그것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사회의 정체성도 내면의 영혼도 조각조각 오려져,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극을 느낄 (수 없는) 육체 뿐이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핑크>에서 외계인에 대한 생각과 강간 위험에 대한 생각을 동시에 하는 유미, 그리고 <리버스 엣지>의 시체와 그것을 보러다니는 3명의 주인공. 오카자키 특유의 간소하고 얇은 펜선과 거친 드로잉은 세계를 경험하고 감각하는 핵심 단위인, 허나 이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엔 너무나 빈약해진 육체를 적확하게 형상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마지막 장편인 <헬터 스켈터>는 육체에 대한 오카자키의 문제의식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신기한 타이밍이다)


그들도 자신이 좀비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는 있어,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최대한 몸부림치기는 한다. 시체를 보며 자신은 좀비가 아니라고 자위하는 <리버스 에지>의 야마다를 떠올려보라! 허나 그것은 애완 악어에게 싫은 인간을 먹어치우라 말하거나 UFO를 부르는 의식을 치르는 등의 '초월적' 반항에 그치거나, 결국 타인의 육체가 훼손되는 걸 보고야 마는 파국적인 '육감성'으로 향하는 양극단으로 치우쳐진다. 개성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지만 실체적 행위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90년대가 중요하다면 그건 그 이전의 것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이 가속회로 속에서 고속으로 운동하게 된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오카자키 쿄코는 진단한다. 그가 근친상간, 매춘, 퀴어, 존속살해 등 자극적 소재에 천착하는 건 (종종 소재를 무의미의 감상으로 가공하는 하루키 류의 방식이라는 오해를 사긴 하나)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상투적인 자극을 과도할 정도로 늘어놓으며 역으로 거기서 오는 허무감의 양상을 성찰하려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잠재된 유희적 저항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유미의 독백에는 한 마디가 더 붙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끔찍하다.' 


여기서 한 가지 문, 우리는 과거의 회복 없이 좀비에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젠 좀비를 인간의 새로운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오카자키 쿄코는 답을 주지 않고, 혹은 못하고 펜을 꺾었다. 그걸 생각하는 건 우리의 몫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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