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례. 작년 트위터 오타쿠판에서 소위 '그림러'라 불리는 이들 사이에 작은 분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 <오소마츠상>에 기반을 둔 2차 창작을 하던 인기 '그림러' A가 다른 '그림러' B에 대해 자신의 그림을 '파쿠리'(속어로 '도작'을 의미하며, 그림체나 구도같은 스타일을 베끼는 것을 이름)했다고 공론화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그림체와 연출 방식은 적잖이 유사했으며, A가 B보다 먼저 '그림러' 활동을 시작한 것 역시 명백했으므로 A의 이의 제기는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사태는 처음에 예상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몇몇 이들이 사실 A 역시 (타카하시 루미코나 히와타리 사키 류의) 둥글둥글한 90년대 소녀 코미디 만화 스타일을 반복했을 뿐이지 않느냐고 지적한 것이다. A는 자신은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지만 그건 B 역시 마찬가지지 않겠느냐는 재반박이 이어졌고, 사태는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B가 '파쿠리'를 했냐 안 했냐로 시작된 분쟁은 고유의 특색이 없는 그림도 자신에 대한 '파쿠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로 바뀌었고, 한 동안 타임라인은 이 문제로 시끌시끌했다. 이 분쟁은 오타쿠들 사이에서 쓰이는 '파쿠리'란 개념이 실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우스꽝스럽게 드러낸 사례였다.
두 번째 사례. 김예림이 아예 림 킴으로 활동명을 바꾸고 돌아와 싱글 SAL-KI를 냈을 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존나 소피적 케이 팝하네!" 여기서 "케이 팝"이란 특정한 방법론을 공유하는 지역적인 (장르라기 보다는) 현상을 이른다. 어떤 방법론? 스트리밍의 발명이 가능케 한, 유행하는 수 많은 스타일에의 중심 없는 차용/소비. 거칠게 말해 일렉트로닉 댄스에 힙합과 알앤비 +a를 비율을 맞춰 (영화 시퀀스 편집을 하듯이) 융합하기.추천 알고리즘을 미학적 기반으로 삼은 듯한 스타일. 그리고 부재하는 중심의 자리에 후천적으로 중심이 들어선다. 어떤 중심? 과장된 자아. 아무리 작은 스타일이라 한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모종의 '이야기'를 형성하다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속에서 자아(의 형태를 한 무엇인가)를 생성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2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케이 팝 아이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룹의 작업물을 관통하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것 -특수한 세계관을 구성한다거나, 뮤직 비디오에 사회적 메세지를 숨겨놓는다거나...- 을 떠올려보라. 엄청난 무게를 지닌 과장된 자아. (시각적 양식들까지 통틀어) SAL-KI에는 여러 음악가들의 이미지가 겹쳐서 아른거린다. 영향관계가 보인다, 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스타일이 보인다. 소피, M.I.A., COUCOU CHLOE, 그리고 여러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음악들. 이들의 스타일을 융합하기 위해 김예림은 다른 케이 팝 아이돌들처럼 세계관을 구축하는 대신 페미니즘과 동아적 퓨처리즘을 끌고 와 동양 여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설파한다. 이는 과장된 자아가 현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 설파 자체는 가십이나 사회적으로 나름의 의미를 갖지만 실은 쉬이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일 뿐이다. 유튜브나 사운드 클라우드를 뒤져보라, 이 노래와 똑같은 전략의 음악이 넘쳐나니. (게다가 정말 김예림이 상상하는 것처럼 '동아시아 연대'란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다) 그러니까, 김예림 자신은 스스로가 굉장히 파격적인 물건을 내놨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사실 철저히 기존 케이 팝의 방법론 안에서 '개성적'으로 놀면서 그것의 방법론을 온 몸으로 방증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문단은 김예림이 [GENERASIAN]을 내기 전에 다 쓴 것인데, 이 앨범을 듣고 나서 기존의 생각이 더욱 굳혀져 수정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례. 하와이안샐러드라는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듀오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의 작업들이 만화를 비롯, 과거 미국에서 유행한 인쇄물들을 명백히 표절했다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나는 이 논란 이전엔 이들의 작업을 전혀 몰랐고 작업 외적인 것만 대강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찾아보니 캐릭터 외형이나 펜선 묘사 등이 (웃어넘길 만한) '파쿠리' 수준을 넘어 명백하게 표절한 티가 났다. 특히 이들의 몇몇 작업은 누가 봐도 전설적인 카툰 <낸시>에서 레이아웃이나 오브제를 첨삭한 듯한 수준의 유사함을 보였다. "30~50년대 미국 카툰과 애니메이션의 경쾌한 감성을 담은 그림 작업물을 선보"인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던 이들은 사실 그 시절의 감성이 아니라 그 시절의 작품들을 고스란히 따라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하와이안샐러드는 이 논란을 계기로 (명확한 해명 없이) 해체하게됐다. 여기서 우스운 사실 하나, 과거 하와이안샐러드는 자신들의 작업이 몇 번 도용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저작권 의식 함양을 외치고 다녔으며, 한 번은 어떤 캐릭터가 상업 목적으로 무단 사용되자 해당 캐릭터를 저작권 등록하기도 했다.
... 위에서 열거한 사례들은 현재의 문화 시장에서 '작가'란 개념 -나는 맥락상 일부러 저자와 작가를 분리하지 않고 '작가'로 뭉뚱그렸다.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의 위상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당신은 내가 할 말을 짐작하고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애초에 인기를 얻은 원류에 대한 모방이 유행의, 나아가 창작의 근본적 형태가 아닌가? 하지만 저 사례들은 이전의 그것들과는 좀 다르다. 가령 90년대에 해외에서 유행하던 여러 문화 양식을 한국에 소개한 '수입상' 서태지에게는 그래도 그걸 자기 나름대로, 한국의 상황에 맞춰 가공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때까지는 패러디나 패스티쉬에도 정통적 '작가'상이 나름대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험과 관점과 취향을 바탕으로 "수많은 문화의 원천에서 이끌어낸 일단의 인용문들로 짜인 피륙"(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으로서의 작은 세계-작품을형성하는 논리이자 기능인 그 '작가'. 여기서 방점은 "관점과 취향을 바탕으로"에 찍혀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저 사례들은 앞선 설명과는 달리 관점과 취향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재-반복의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를 섣불리 '유행에 편승'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설명을 위하여, 본 상황의 대표적인 현상이라 할 뉴트로 열풍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학자 에리카 발섬은 「전시장 안의 영화, 폐허 속의 영화」라는 논문에서 '폐허애호증'에 젖어있는 당대의 비내러티브 영화 실천들을 검토하며 "아날로그와 쇠퇴"에 대한 애착은 디지털 시대의 ‘매끄러움(seamlessness)’이 야기하는 불안의 징후, 곧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아직 잃지 않은 이전 시대에 대한 향수"(안드레아 후이센)의 결과라 진단하고선 거기서 "영속적인 현재"에 대항할 어떤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이를 본 논의에 맞춰 한 번 뉴트로 열풍에 대한 코멘트로 확장해 독해해보자. 미래(성)의 소진이나 '매끄러움'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폐허애호증'은 널리 공감을 얻는 주장이고, 실제로 발섬이 말하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실천들이 있긴 하니 그의 논지에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다. 허나 내 생각에 결론적으로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벤야민을 반복하면서) 제창한 '포스트-매체 조건' 내지는 '매체의 재창안'을 도식적으로, 순진하게 반복한다. "과거의 생산품들이 더 이상 스스로를 새롭게 치장하는 광택을 띠지 못해 완전히 잊혀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대중 문화로부터 버림받은 대상들 속에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대상들 안에 잠재된 복합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는 삶과 예술적 실천을 옹호한다."라는 대목이 특히 그러한데, 여기엔 "매체가 메세지다"라는 마셜 맥루한의 유명한 테제가 결국 '매체 자체의 판타즘'을 생산할 뿐이라는 크라우스의 (자기회고적인) 비판으로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가장 빈번하게 간과되는 사실; 소수적 속성은 그 자체로 저항의 힘을 발산할 수 없다. 뉴트로가 주요한 상업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현재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있던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정의는 뉴트로보다는 8~90년대의 레트로나 리바이벌에 적합한 설명이다. (그 점에서 마크 피셔의 어느 인터뷰는 발섬의 관점에 대한 교정점으로써 참고할 만 하다)자신이 끌어들이는 과거의 기호를 인터페이스 삼아 전체-즉 과거(의 경험)를 지시하는 게 이전의 (하이데거적인?) 현상이라면 작금의 현상은 그런 데에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게다. 시티 팝같은 신자유주의 황금기의 음악과 공사장, 폐허 모델의 카페 디자인이 동시에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저런 관점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케이 팝 뮤직비디오의 흔한 컨셉이 된 베이퍼웨이브는 또 어떻고?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게 옳다. 과거의 기호들은 이미 그 구체적인 역사성을 상실해 그저 (지금이 아닌 어느) '과거'라는 개념 속에 뭉뚱그러져 있다고.
오늘날 문화 시장에서 시공간의 간극이 급진적으로 줄어들고, 요즘 말로 '플랫'해지고, 나아가 선형적 시간관이 붕괴하면서 역사(성)는 그 힘을 잃고 그 자리를 (물신주의적인) 기억이 대신하고 있다, 는 것은 이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나 프레드릭 제임슨을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문화 이론에 눈꼽 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쓸 만한 보편적인 레토릭이 되었다. 특히 (한국에 한정된 이야기긴 하지만) 뒤늦게 번역 출간된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의외의 호응을 얻은 지난 해 부터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레토릭을 문화나 미학에 대한 담론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보편성에 현혹되어 담론의 역사적 환경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어떤 역사적 환경? 장르의 존재. "인기를 얻은 원류에 대한 모방"의 다성적, 장기적인 반복. 반복의 계열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원류가 특정 설정을 위해 취한 사회와의 친화성은 점차 부차적인 것이 되고 계열에 속한 작품들의 내적 형식의 문제로 치환되어, 종국엔 장르 자체를 모종의 규칙을 지닌 세계로 구성시킨다. 종종 우리는 특정 작품을 말하기 위해 규칙에 순응하며, 그 규칙이 아예 우리네 삶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인문학자 이우창은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은 그 자체로 인간사회의 상당한 영역을 차지하는 고유한 현실, 적어도 그 현실의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류는 위치에 걸맞는 권력을 상실하고 이미지는 나름의 자율적인 힘을 얻는다. (이는 일본 오타쿠 문화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동물화'로 이어진다) 해럴드 블룸이 잘 증명했듯, 소위 말하는 '클리셰 부수기'는 사실 장르의 한계를 지적하고 또 위협하는 제스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세계가 된 장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예컨대 지금 독일에서 제작되는 공포영화들이, 러시아에서 쓰이는 SF 소설들이, 록 음악이 각각 나치즘, 스탈린, 냉전과 무슨 구체적인 관련이 있겠는가? (예술성과 정치성의 대립에 관한 논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렇듯 수 많은 장르가 세계로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한 와중에 인터넷이 문화 안으로 들어오면서, 무한히 접속되려는 인터넷의 욕망과 자율적인 힘을 누리려는 이미지의 욕망은 절묘히 겹쳐져 현재의 이미지 생태계, "과거의 기호들"이 "그 구체적인 역사성을 상실해 그저 (지금이 아닌 어느) '과거'라는 개념 속에 뭉뚱그러"진 채 한 데 부유하는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이름의, 지금과는 다른 차이에 의한 특이한 경험을 과시적으로 표방하는 여러 상이한 개별 이미지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물론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기념비적 저서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에서 쓴 말을 조금 바꿔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차이에 의한 특이한 경험"에 대한 매혹에서 저 두 욕망이 함께 발견된다는 점에서, 뉴트로는 본문의 주제로서의 "상황"의 대표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당연히 차이다. 앞서 발섬의 논문을 짚고 넘어간 것은 그것이 '과거'를 끌어들이는 양상 속에서의 차이를 잘못 다룬 대표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매끄러움'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폐허애호증'은 반만 알고 반은 모르는 말이란 게다. 가령 이러한 이미지 인식론의 대표주자로 인지되곤 하는 히토 슈타이얼은 저화질이나 글리치같은 열화의 속성을 지닌 '빈곤한 이미지'를 저항의 근원으로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것이 포르노, 부동산, 금융화, 정보, 군사 기술,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의 파생물이며 이들과 충분히 공모할 수 있다는 신중한 양가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가? (이는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인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뉴트로에서의 '과거'의 기호들 역시 양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격렬히, 의도적으로 현재성에 반기를 들 때 조차 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거름망에 걸러져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에 자본주의는 문화 안에서 욕망과 불안정성을 자극하고 통제하는 데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영리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차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 속을 살아가는 지금의 '작가'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호들, "인용문들"을 가공-재해석하는 수고를 상대적으로 덜었다. 좀 과장해서, 이젠 그저 자신의 취향을 전면화해 차이(의 느낌)를 생산하는 '과거'의 넘쳐나는 개성적인 "인용문들"을 거의 고스란히 게제하고 이어붙이기만 해도 충분히 개성적인 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맘에 드는 스타일을 대거 구입해 마음대로 재구성하는 관광객식 소비-생산자 모델. 차이(의 느낌)를 '유치함'과 '촌스러움'으로 밀고 나가 일그러진 이미지를 제시하는 베이퍼웨이브 역시 같은 류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눈이 쨍한 원색의 디자인, 국적과 형체를 가리지 않는 복고, '좆같은 보노보노 PPT', 요한 일렉트릭 바흐같은 밈(Meme)으로서의 음악... 말하자면 과잉된 차이(의 느낌으)로 (역사적) 차이를 없애기. (여담이지만, 이 맥락에서 '신추상회화' 따위를 그럴듯하게 들먹이는 비평가나 큐레이터들이 같잖게 보이는 건, 그들이 '신추상회화'를 특별한 미적 경향으로 정의하는 논리를 이런 이미지들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시간성이니 매체의 월경(越境)이니 하는 설명에 포함되지 않는 이미지가 지금 얼마나 된단 말인가?) 여기에는 더 이상 레트로에서 작업의 근원으로 발견되는, 미래의 결핍으로 인한 불안(혹은 과거에 대한 향수)을 찾을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작금의 현상이 이전에 대해 갖는 변별점이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불안을 근원으로 지목하는 이론들은 좀 미심쩍다. (항구적인 '향수적' 주체를 상정할 수 밖에 없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지나치게 밀고 나가는 듯 하달까? 기존의 레트로라면 이러한 설명이 적합하겠으나, 미래의 결핍은 물론 불안마저 '자연화'된 지금까지 밀고 나가기엔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남웅의 2015년 글 「안녕한 듯, 안녕하지 않은, 안녕한 것 같은, 안녕들하십니까?」와 김뺘뺘의 2017년 글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1)」는 이 지점을 파악하는 실마리를 주는 가장 가까운 텍스트이다. 이 중 전자를 직접적으로 건드려보자. 접두사 '유사'가 갖는 함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남웅은 웹 데이터베이스를 통하여 언제든, 얼마든 사용될 수 있는 유사 과거 -앞에서는 "'과거'의 기호"라 부른 것- 의 범람에 의해 출몰한, 극도로 혼재된 시공간이 바로 현재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본문에서 앞서 몇 번이고 반복했던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웹 데이터베이스는 그저 혼재된 시공간을 창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소실점이 부재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실체들 뿐 아니라 가치관 또한 명확하지" 않은, 심지어는 재난이나 테러같은 폭력의 스펙터클조차 무수한 유사 정보 속에서 그 실재감이 희미해지는 등 "완전한 파국도 예견할 수 없는 유사-멸망의 시대"로서의 '좀비 모더니티'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임근준이 주장하는 '좀비-모던' 따위와는 다르다- 로 나아간다. 당신도 심리적 만족을 위해 흥미로운 '콘텐츠'를 찾아 수 시간 동안 멍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곤 하지 않나? 여기서 근원이 되는 감정은 불안보다는 권태에 가깝다. 김뺘뺘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활동이 큰 맥락이나 조류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욕망이 없는" 감정. 불안은 그것을 돌파하고 싶다는 야심을 생성할 수도 있지만, 행동에 대한 기피인 권태는 그 대신 사회에 대한 냉소와 경멸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냉소와 경멸로 이어지는 역설의 가능성을 생성한다.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과 이별을 직감하고 있는 연인들의 싸움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그러면서 진보라는 개념에 들러붙어있던 정치/사회적 의미는 차차 부식되고, 상업 트렌드의 시간차에 따른 변화가 제1 의미로 앞서 나간다. 줄리아나 브루노가 '쇠퇴로 잠식된' 시대라 부르고 사이먼 레이놀즈가 맘에 드는 "시대 양식을 순전히 임의적으로 돌려쓰는 지경"이라고 조롱한 것보다 더 나아간 이 권태로운 차이의 흐름 속에서, 개성적인 것의 재-반복은 그 자체로 유행의 원류가 되고 (이안 보고스트가 말한 "예정된 진부화") '작가'는 개성있(는 척 하)는 '존잘'의 동의어가 된다. 세계의 모든 것이, 아니 세계 자체가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대로 데이터베이스적 자연이 되었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이용하는 '작가' 역시 마찬가지로 데이터베이스적 존재가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