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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2. 2023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러브 라이프> 후카다 코지 2022

*스포일러 포함     


 시청 복지과에서 일하는 타에코(키무라 후미노)와 지로(나가야마 켄토) 부부는 아들 케이타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케이타의 오셀로 대회 우승 겸 지로 아버지의 65세 생신파티가 있던 날, 불의의 사고로 케이타가 세상을 떠난다. 후카다 코지의 <러브 라이프>는 영화가 이 부분에 이르는 30여 분의 시간 동안 이 영화의 전체를 미리 펼쳐 둔다. 케이타는 타에코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타에코와 케이타가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타에코의 전남편이 농인임을 미리 알려준다. 지로의 아버지는 타에코가 이혼했었다는 사실을 못 미더워한다. 지로는 타에코와 결혼하기 전 만나던 야마자키(야마자키 히로나)라는 사람이 있었고, 타에코를 만나게 되며 그와는 파혼하게 되었다. 축하파티와 생신파티라는 일상적 상황 속에서 이 가족에 관한 정보들이 흩뿌려진다. 케이타의 죽음은 조금씩 겹쳐 있으며 조금씩은 서로에게 비밀이었던 정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케이타의 남편인 박신지(수나다 아톰)는 4년 전 집을 나갔다. 그랬던 그가 케이타의 장례식에 갑작스레 나타난다. 이 순간은 타에코와 지로 부부의 삶을 뒤바꾸어 놓는다. 케이타의 죽음과 박신지의 귀환 이후 많은 비밀이 드러나고 많은 감정들이 뒤집힌다. 지로의 아버지는 어느 순간 타에코를 ‘인정’한다. 생활보장을 신청하기 위해 시청을 찾은 박신지로 인해 한 차례 정리되었던 타에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 때문일까, 지로는 자신이 떠났던 야마자키에게 만남을 청한다. <러브 라이프>는 케이타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된 변화들을 차근차근 쌓아 나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추던 비밀들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흥미롭게도 이 톱니바퀴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감정적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기어를 바꾸듯 각자의 톱니바퀴의 위치를 바꾼다. 이 지점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나 <우연과 상상>, 혹은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떠올릴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세 감독 모두 구로사와 기요시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순식간에 감정의 흐름을 바꾸고 상대방에 관한 태도를 뒤집는 사람들. <러브 라이프>는 삶이 그러한 변화 속에 놓여 격동하고 있음을 간결하고 깔끔한 필치로 선보인다. <러브 라이프>에는 <아사코>나 <우연과 상상>의 2장 같은 극적 구성이라던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보여주는 ‘청춘’의 마법 같은 것은 없다. 스승인 기요시의 영화들이 보여준 스산함도 가급적 배제한다. 후카다 코지는 그러한 장치들을 내려놓은 채 맞물려 있는 삶들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다소 막장드라마스럽게 다가올지라도 말이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의 관객 대부분이 지적할 법한, 박신지라는 이상한 한국이름(극 중 박신지는 자이니치가 아니라 한국인이다)과 괴상한 한국 결혼식 묘사 등도 아쉽게 다가온다. 다만 이 부분은 <러브 라이프>의 결정적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그리고 최근 몇몇 일본 영화에서 종종 느껴지는 미심쩍음은 농인과 수어를 등장시키는 방식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수어를 또 하나의 언어로서 등장시켰다. 다국어로 진행되는 연극 [바냐 아저씨]를 위해 한국 수어가 사용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주인공은 농인 복서다. 농인 복서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영화의 청각적 리듬을, 이를테면 주인공이 러닝할 때나 미트를 치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을 강조한다. <러브 라이프>는 관계에 관한 영화인 만큼, 그것을 타에코-지로-박신지 세 사람의 관계망 속에서 활용한다. 세 사람이 함께 자동차에 타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타에코와 지로의 음성대화를 농인인 박신지는 알 수 없다. 반대로 타에코와 박신지의 수어 대화를 청인인 지로는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박신지가 한국인이며 한국 수어를 구사하는 농인이라는 설정은, 타에코가 얼떨결에 그의 수어통역을 맡게 되는 극적 수단이 된다. 물론 세 영화 속 농인 묘사가 옳지 않다던가 말도 안 되는 수어를 영화에 삽입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들 영화에서 농인과 수어가 종종 영화적 수단에 머물 뿐임을, 더 나아가 수어라는 언어가 지닌 물리적 침묵의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영화에 도입되고 있다는 인상이 떨쳐지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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