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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3. 2023

공존하는 현실들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2023

 *스포일러 포함     


 음모론은 현실을 찢어놓는다. 음모론자들이 생성한 허구는 생성형 AI의 이미지보다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움직인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각본보다도 매혹적이다. 물론 그들의 허구는 정교하지 못하다.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고, 논리적 허점은 신앙에 가까운 믿음으로 메꿔진다. 때문에 음모론은 영화의 주요 소재 중 하나였다. 추락한 UFO, 외계인과의 근접 조우, 외계 기술을 사용한 기술 발전, 생체실험, 은폐된 국가폭력과 같은 것들은 무수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소재였다. 이들은 음모론을 서사의 내적논리를 짜맞추는 일종의 ‘미싱 링크’로 사용했다. 혹은 그 반대로, 음모론에 장단을 맞춰주며 그것의 논리적 정합성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최근의 할리우드는 음모론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음모론에 논리를 부여하는 대신, 음모론의 작동방식을 플롯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조던 필과 도널드 글로버가 이 분야의 최전선에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종차별의 역사적, 사회학적 맥락을 각종 하위문화와 묶어내 일종의 음모론으로 빚어낸다. 샤프디 형제는 태연하게 존재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가공해내고 그것에 마법적 힘을 불어넣는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팝컬처 자체가 일종의 음모론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신화나 설화, 비극을 변용해 사용하는 로버트 에거스나 데이빗 로워리 같은 이들과도 구별된다. 음모론은 대안적 현실을 생성하고, 그곳은 그곳에 속한 인물들을 지박령으로 만든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은 지박령이다. 각자의 이유로 ‘소행성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 이곳을 찾은 이들은 갑작스러운 외계인의 출몰과 그로 인한 프로토콜의 발동으로 인해 일주일간 발이 묶인다. 인구 87명의 마을에 발이 묶인 이들은 일종의 구경거리가 된다. 누구의? 외계인 출몰 소식이 외부에 폭로되자 몰려든 구경꾼들은 바리케이드가 쳐진 마을 바깥에 작은 유원지를 만들어낸다. 웨스 앤더슨의 강박적인 스타일이 만들어낸 아웃사이더들의 유토피아가 으레 그렇게 다뤄지듯이. 또 하나의 구경꾼들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극 중 극으로 꾸며낸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한 호스트(브라이언 크랜스톤)의 존재는 이를 선언하듯이 말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극작가 콘래드 어프(에드워드 노튼)가 쓴 극본의 제목이며, 관객들이 목격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연극이 진행되는 무대다. 영화는 연극 무대와 연극이 창작되는 과정을 다룬 극 바깥의 모습을 교차로 담아낸다. IMDB는 이 영화를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라 분류하지만, 사실상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창작에 관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무대 밖의 배우이며, 그들은 연기하는 영화 바깥의 배우들은 1인 2역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무대 위의 지박령, 창작의 지박령들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감독의 전작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구성된다. 후자가 잡지의 형식을 영화로 끌어왔다면, 전자는 극본의 형식을 따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극본이 쓰이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이 담긴다. 호스트의 진행을 따라 등장하는, 일종의 TV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제작기는 이 영화 자체가 연극의 프리뷰 쇼와 메이킹 필름이 교차되며 결합된 형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차는 연극 창작 자체가 일종의 주술적 행위임을 폭로한다. 극작가 콘래드와 연극 감독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 연기 코치인 것 같은 슐츠버그(윌렘 대포)가 배우들 앞에서 그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모습은 마치 최면술 시연처럼 느껴진다. 만약 해당 장면에서 대사를 삭제한 채 인물들의 모습만 본다면, 이 장면을 오컬트 영화의 한 장면이라 우겨도 무방할 지경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제시하는 음모론은 이런 것이다. 창작은 일종의 제의이며, 그것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말도 안 되는 극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제목의 연극은 이상하다. 전쟁사진작가 어기(제이슨 슈왈츠먼)는 자동차가 고장 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멈춰 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천재소년’ 아들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소행성의 날 행사에서 진행된 과학상을 받기 위해 그곳에 온 것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13분간 정차한다던 버스에서 내린, 십여 명의 학생과 선생을 포함한 승객들은 그대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지박령이 된다. 마을 인근에서는 종종 핵실험이 벌어진다. 이 공간에서 인물들의 직업, 사진기자, 배우, 선생과 같은 것들은 무의미해진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알맞은 행동들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그것은 직업적 행위라기보단 봉쇄령이 떨어진 마을에서의 무료함을 달래 보려는 발버둥에 가깝다.     

 웨스 앤더슨은 이 발버둥을 담아낸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강박적으로 화면 구도에 집착하는 연출자다. 특유의 대칭 구도, 정확한 각도로 정해진 패닝과 틸팅, 영화의 모든 프레임을 엽서 굿즈로 만들어도 될 것만 같은 미적 강박이 그의 영화를 지배해 왔다. 당연히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발버둥이다. 앞서 창작과정이 일종의 제의적, 주술적 행위라고 적었다. 그것은 엄격한 규율과 절차를 요구하는 행위다. 웨스 앤더슨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 영화에는 그 요구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일종의 글리치들이 존재한다. 대칭에서 살짝 어긋난 인물의 위치, 수십 년 전의 괴기영화를 연상시키는 대각선 로우앵글, 잘못 등장했다면서 잠시 ‘애스터로이드 시티’ 속에 등장한 호스트, 갑자기 달궈진 버너에 손을 얹는 어기 같은 것 말이다. 우리의 지박령들은 봉쇄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혹은 극의 답답함, 더 나아가 웨스 앤더슨 영화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글리치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창작행위의 바깥에서 제기된 창작에 관한 음모론이라면, 이 글리치들은 음모론 내부에 존재하는 현실이 그 바깥과 접촉하는 순간들이다. 음모론이 만들어내는 것은 허구적 현실, 대안현실이다. 미군이 외계인을 감금한 현실, 랩틸리언들이 미국 정치계를 장악한 현실 같은 것들. 극을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안현실을 만드는 것과 같지만, 그 모든 것은 ‘극’이라는 경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구조는 그 경계를 겹겹이 쌓은 뒤 자잘한 몇몇의 글리치들로 그 경계를 흐린다.      

 때문에 어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이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 특히 각본에서 삭제된 캐릭터인 아내를 연기했어야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마주치는 순간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이름의 음모론이 켜켜이 쌓아 올린 겹들을 뚫고 나가 그 바깥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맞이한 바깥은, 그들이 왜 강박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알려주는 것은 단지 그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들이 집단최면에 걸린 것처럼 슐츠버그의 말을 반복하는 것도, 연극 공연기간 내내 백스테이지에서 생활하는 슈버트의 이상한 방식도, 호스트의 말을 따라 묘사되는 각본가의 이미지와 존스 홀의 캐스팅 비화도, 그 모든 것은 창작이라는 제의를 신성화하는 것에 할애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황당한 연극은 어떻게든 무대 위에 올려진다. 심지어 존스 홀이 잠시 문(들)을 열고 나가 바깥과 접촉하는 사이 콜사인을 놓쳤음에도 공연은 진행된다. 대역의 존재는 그야말로 극과 음모론의 존재 방식, 엄연히 존재하는 구멍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메꿔버리고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존스 홀이 다시금 무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그는 다시 어기가 되었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에필로그에서, 잠에서 깨어난 어기는 지난 자정께 봉쇄령이 해제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잠시간 연애감정을 주고받은 밋지(스칼렛 요한슨)를 비롯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지박령들은 봉쇄 해제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극은 끝났고 지박령을 옥죄던 족쇄는 사라졌다. 외계인의 출현과 봉쇄령을 통해 만들어진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둘러싼 음모론은, 훔쳐간 소행성을 다시 돌려준 외계인의 행동과 봉쇄령의 해제로 인해 끝났다. 모든 것은 음모론이 존재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가? 이 지점에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 글의 첫 문단에서 언급한 다른 감독들의 작품이 벌였던 것, 음모론적 형식이 일종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웨스 앤더슨의 방식대로 밀어붙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은 평면 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시공간에, 서로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 비록 갑자기 달궈진 버너에 손을 얹는 것처럼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 현실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라고 웨스 앤더슨은 <프렌치 디스패치>에 이어 주장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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