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2. 2023

마일즈라는 이름의 새로운 캐논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2023

*스포일러 포함     


 멀티버스만큼 순식간에 지겨워진 소재도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지난 2년 사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플래시> 등을 통해 유사한 설정 설명을 들었어야 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도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 또한 미겔 오하라(오스카 아이작)의 입을 통해 자신만의 멀티벌스 설정을 풀어놓는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의 매체에선 이미 하나의 클리셰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기에, 멀티버스가 지겹다는 말은 다소 어색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가 각각의 멀티버스를 소개한 것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영상화된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멀티버스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CW 애로우버스의 <플래시>와 이 영화의 전작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하나 더하자면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였으나,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의 MCU가 ‘멀티버스 사가’를 표방하며 지금의 피로감을 불러왔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개봉했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플래시> 바로 다음 주 개봉했으니, 한국의 관객들은 상당히 짧은 간격으로 두 개의 멀티버스 이야기를 관람하는 셈이 되었다.     

 MCU에서 멀티버스 이야기에 주축이 되는 캐릭터들은 로키, 닥터 스트레인지, 스칼렛 위치, 앤트맨 등이지만, 코믹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은 스파이더맨이다. 무수한 피터 파커와 그의 변형된 형태들은 물론, 그웬, MJ, 메이 숙모 등 다양한 주변인이 스파이더맨이 된 에피소드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중 단연 흥미로운 사례는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다. 극장용 영화로는 <뉴 유니버스>를 통해 처음 소개된 이 캐릭터는, 피터 파커와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난 사례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 특이사례에 주목한다. 전작에서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난 그는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다른 멀티버스로 접근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짧은 시간 동료들과 함께했던 그는 그웬(헤일리 스타인펠드)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중 웜홀을 소환하는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과 얽힌 사건들이 이어지고, 미겔 오하라를 중심으로 스파이더우먼(이사 레이), 스파이더펑크(다니엘 칼루야), 스파이더 인디아(카렌 소니), 스칼렛 스파이더(앤디 샘버그), 그리고 그웬 등으로 구성된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의 임무에 마일즈가 휘말린다. 미겔은 각각의 멀티버스가 ‘위대한 거미줄’인 스파이더버스로 연결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각각의 스파이더맨들이 각성을 위해 겪어야 하는 캐논(canon, 공식설정)이 붕괴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캐논의 종류는 관객이 앞서 보았던 여러 스파이더맨의 사례들이다. 방사능 거미에게 물리기, 벤 삼촌이나 메이 숙모의 죽음, 친밀하게 진해던 경찰서장의 죽음 등.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마일즈의 존재 자체가 캐논을 벗어난다는 지점이다. 마일즈가 물린 거미는 그가 사는 지구-1610이 아니라 킹핀의 입자가속기를 통해 넘어온 지구-42의 거미이며, 그렇기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마일즈가 스파이더맨이 되고 지구-1610의 피터 파커가 사망했다는 것이 미겔의 설명이다. 전작이 멀티버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가까운 사람-삼촌의 죽음을 통해)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나는 마일즈의 이야기였다면, 본작은 캐논이 아닌 마일즈가 스스로를 캐논에 기입하는 이야기다. 물론 영화는 “To be Countinue...”라는 자막을 띄우며 마일즈의 캐논화(化)를 속편으로 미루지만.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최대 강점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지점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세 명의 스파이더맨과 다섯 빌런을 모아 놓고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벌였던 무수한 뻘짓을 떠올려보자. 심지어 그 영화는 다른 멀티버스를 묘사하지도 못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각각의 멀티버스를 하나의 콜라주처럼 붙여 놓는다. <베놈>과 <모비우스> 등이 속한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는 물론, 샘 레이미의 트릴로지와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 영원한 J.J.J.인 J.K. 시몬스의 목소리와 레고 유니버스(제작자인 필&로드의 전작이 <레고 무비>다), 스파이더맨의 첫 영상화였던 60년대의 애니메이션부터 최근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마블 스파이더맨] 속 피터 파커까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무수한 우주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각각의 스파이더맨들을 한데 모은다. 물론 여기까지였다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노 웨이 홈>이나 <대혼돈의 멀티버스> 수준의 팬서비스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 영화는 캐논이라는 주제를 메타적으로 활용한다.     

 스스로 마일즈의 ‘숙적’이라 떠벌리고 다니는 삼류 빌런 스팟은 멀티버스와 캐논이라는 소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반영한다. 마일즈는 흰 피부에 검은 웜홀을 달고 다니는 그의 외형을 보고 젖소나 달마시안 같다고 놀린다. 스팟은 원작에서도 그다지 유명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더 유명한 빌런(닥터 옥토퍼스라던가...)의 하청을 받는 빌런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스팟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그와 마일즈의 첫 싸움 이후부터다. 무수한 웜홀을 발사하며 힘을 소진한 스팟은 오로지 흰 피부만이 남는다. 다만 그의 피부는 온전히 하얗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백지에 옅은 인물 선만 그려진 듯한 그의 모습은, 캐논은 물론 코믹스 자체가 그려지기 이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스스로 소형 입자가속기를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가 힘이 강해진 이후 스팟의 묘사는 펜선만 있는 그림 콘티와 혼란스러움 그 자체인 낙서 사이의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스팟은 캐논에 속하지 못한 마일즈가 자신만의 캐논을 쓸 수 있는, 기존의 캐논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대신 새로운 캐논을 그려나갈 수 있는 백지가 된다. 미겔은 마일즈에게 스파이더맨과 친밀한 관계인 서장이 죽는 캐논을 설명한다. 마일즈는 스팟과 싸우는 과정 중 경찰서장이 될 아버지 제프(브라이언 타이리 헨리)의 죽음을 목격한다. 마일즈는 스파이더버스의 변칙점인 자신과 죽음이 예정된 제프 모두를 구하는 선택을 하고자 한다. 이 지점은 스파이더맨 특유의 테마, 둘 중 하나를 포기하게끔 강요된 상황 속에서 무엇도 포기하지 못하는 스파이더맨 특유의 선함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향한다.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에서 아이들이 탄 버스와 MJ를 기어이 동시에 구해내던 피터 파커, 친애하는 빌런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구해내고자 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등을 떠올려보자. 마일즈에게 스파이더맨 캐논은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이념뿐이다.     

 코믹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온 수백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고, 수채화, 레고, 실사, 콜라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 세계들이 등장하며, 마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무수한 밈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현란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결국 모든 스파이더맨 창작물이 마주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반복한다. 누군가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나올 때마다 “또 삼촌이 죽는구나” 하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다. <뉴 유니버스>는 그러한 스파이더맨 캐논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익숙한 교훈이라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새롭게 도입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또한 그 기조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캐논이라는, 가장 코믹스적이라 할 수 있는 소재를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마일즈의 성장에 녹여내었다. 코믹스의 [스파이더겟돈] 이벤트를 차용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기본적인 세팅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마일즈의 여정을 그려낸다. 2024년 개봉 예정인 속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이상, MCU가 계획하는 <시크릿 워즈> 이벤트처럼 진행될 수도, 코믹스의 얼티밋 유니버스를 애니메이션 버전의 지구-1610B로 유지하는 방식일 수도, 혹은 인커전 같은 거창한 이벤트 없이 독립적인 세계를 이어갈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모두가 피로감을 호소하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단순히 카메오 잔치를 벌이며 과거의 명대사와 명장면을 재현하는 팬서비스의 영역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2대 OOO으로 불리는 슈퍼히어로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이 쏟아지는 와중에,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멀티버스를 경유하여 앞선 세대의 유산을 성공적으로 극복 및 계승해 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늦게 찾아온 오리진 스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