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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6. 2023

너무 늦게 찾아온 오리진 스토리

<플래시> 안드레스 무시에티 2023

 *스포일러 포함     


 DCU가 출범하는 와중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 DCEU의 실패는 크로스오버의 대상이 없이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내세웠다는 점에 있다. 배트맨 영화 없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라던가, 난데없는 팀업 무비였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저스티스 리그> 같은 작품들은 무수한 캐릭터를 빠르게 소개했을 뿐, 많은 팬의 외면을 받았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삼은 특유의 분위기, 사실상 신적 존재에 가까운 여러 메타휴먼들의 액션을 담아내는 방식 등은 나름대로 호평을 받았으며,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늦게나마 인정받았다. 하지만 DCEU는 <플래시>를 통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차례 감독이 변경되고 주연배우의 범죄가 공론화되며 제작과정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공개된 <플래시>는, DCEU가 진작에 했어야 했던 일을 나름대로 영리하게 풀어나간다.     

 CW 애로우버스의 드라마 <플래시>가 있긴 했지만, 플래시(에즈라 밀러)의 오리진 스토리가 영화화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오리진 스토리라고? 상반된 두 편의 <저스티스 리그> 속 플래시의 모습은, 물론 MCU의 스파이더맨처럼 철딱서니 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완성된 히어로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정신적인 성장을 겪으며 당당한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가 어떻게 능력을 얻었는가에 관해서도 짧게나마 등장한다. <플래시>가 택한 방식은 멀티버스를 통해 다른 우주의 배리 앨런이 플래실 거듭나는 과정을 기존의 배리 앨런이 돕는 것이다. 이 선택은 꽤나 흥미롭다. 원작 코믹스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벤트인 [플래시포인트]를 원작 삼는 이 영화는 많은 요소를 모티프로 가져온다. 능력을 잃게 되는 플래시, 어딘가 다른 모습의 배트맨, 저스티스 리그의 부재, 슈퍼맨(영화에서는 슈퍼걸)의 감금 등등. 플래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아직 ‘플래시’가 되지 못한 다른 우주의 배리 앨런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팀 버튼의 <배트맨> 속 배트맨(마이클 키튼), 우리가 아는 설정과는 조금 다른 슈퍼걸(사샤 카예)이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멀티버스를 다룬 최근의 영화들은 여러 멀티버스를 오가는 활극이거나, 얼떨결의 주인공의 세계에 떨어진 이들과 힘을 합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플래시>의 멀티버스는 이와 약간 다르다. 유사하지만 다른 여러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배트맨이 스파게티 면으로 이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기본적으로는 <백 투 더 퓨처>의 타임 패러독스와 같은 방식의 플롯을 이용한다.     

 플래시는 엄마 노라(마리벨 베르두)가 살해당한 날로 돌아가 엄마를 살리고 아빠 헨리(론 리빙스턴)의 누명을 벗기려 한다. 그가 바꾼 과거는 노라를 살리지만 새로운 타임라인이 적용되는 우주를 만들어낸다. 마치 마티 맥플라이의 선택들이 미래를 끔찍하게 만들거나, 자신이 태어나지 못하게 될 뻔 했던 것처럼 말이다. DCEU의 배리 앨런이 멀티버스의 배리 앨런을 돋는 모습은 어린 아버지를 돕던 마티의 모습을, 어딘가 변화한 세계의 모습은 비프가 세계를 지배하는 <백 투 더 퓨처 2>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거를 건드리지 말라는 배트맨(벤 애플렉)의 조언은 타임 패러독스를 다루는 영화들의 단골 대사다. 이러한 설정은 <플래시>가 다루는 멀티버스를 다른 영화들의 것과 차별화한다. 사실상 이름만 ‘멀티버스’이지, 과거로 떠나 어린 자신을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시간여행 영화나 다름없다. 영화 후반부 스피드포스가 붕괴되며 여러 멀티버스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여러 캐릭터(DC를 원작으로 한 여러 영화/드라마의 인물들)가 그저 팬서비스일 뿐임을 영화는 강조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뒤늦게 찾아온 이 오리진 스토리는 썩 성공적이다. 플래시/배리 앨런이 어떤 인물인지 충실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DCU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DCU의 배트맨은 조지 클루니인가?) 다소 밋밋한 ‘장소’로 묘사됐던 CW <플래시>의 스피드포스와 달리 주마등을 연상케 하는 이번 영화의 스피드포스라던가, 영화 초반부 배트맨, 원더우먼(갤 가돗) 등과 협업하는 모습, 다시 한번 재현된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의 지구침공 등도 만족스럽게 그려진다. 과거 잭 스나이더가 직접 선보인 비주얼에 비하면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그동안 MCU, 엑스맨 유니버스, CW 애로우버스 등에서 묘사된 여러 스피드스터 캐릭터와 다른 방식의 묘사를 찾아내려 시도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다만 액션의 모든 순간을, DC 팬들이 GIF로 저장하고 싶은 순간들로 채우고 싶다는 욕망은 종종 민망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가족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교훈, 끝없이 등장하는 코미디와 액션 등은 140분의 러닝타임을 일종의 과포화상태로 만든다. 지루할 틈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영화이지만, 동시에 피로를 유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CW 애로우버스의 배리 앨런이 아니라 제이 개릭(드라마 <플래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정체는 사실...)이 카메오 출연했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CW에선 이미 몇 차례 멀티버스 소재의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선보인 바 있고, DCEU의 플래시 또한 출연했던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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